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그분은 영이시다.

Hernhut 2022. 3. 19. 14:27
“하나님은 영[생명의 근원이시지만 아직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시다. 그분을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요한복음 4:24)

그분은 생명의 왕이신데 그러면 생명은 무엇인가? 생명은 그 영이시다(로마서 8:10). 또한, 생명은 그 영을 분배하심의 결과다(요한복음 6:63). 그 영은 생명이시오, 그 영이 생명을 주신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이 영이시라고 말한다. 요한복음 4:24절은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라”

이 구문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하나님, 이다. 이 표현은 더욱 강하고 직설적이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 영이시다. 생명은 그 영에서 나오고, 하나님은 영의 하나님이시다. 그 영을 만지고, 영 안에 있는 풍성을 누리지 않고는 그분을 만지고 그분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이시오, 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임재로 오기를 갈망한다면 그분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 그분은 누구신가? 그분은 생명의 왕이시오, 생명의 저자시오, 생명의 창조자시다. 그러므로 생명은 그 영의 연속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을 만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영 안에서 생명을 만지고, 누릴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영이 살아있지 않으면 그는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영 안에서 생명을 만지지 못했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그분을 만난다면 영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임재 안으로 오면 그분과 대화하고 성경을 읽고, 찬양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자기의 영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영에 관심을 두는 것에 가장 큰 장애물은 자기의 마음이다. 주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시도할 때 마음을 통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것이다. 생각은 어디에나 있는데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을 때까지 깨닫지 못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얼마나 거친지에 놀랄 것이다.
“내가 왜 비행기를 타고 있지? 내가 왜 아프리카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내가 왜 대가를 치르는 것을 생각하고 있지?”

이런 경우라면 뭘 해야 할까? 가톨릭처럼 어떤 사람은 묵주를 사용한다. 이것은 염주를 사용하는 불교 신자들과 같은 원리다. 구슬을 세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염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구슬을 사용하여 마음을 가라앉힐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만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로 읽고, 한숨을 쉬거나, 신음하는 것으로 주님께 올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주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영이 찬송하거나 한숨을 쉴 때 그분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이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과 영은 하나이시다. 그 영을 만질 때 하나님을 만진다. 하나님을 만질 때 그리스도인 자신의 영 안에 있어야 한다. 영이 없으면 하나님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있음을 깨달을 때 그 영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계신다. 주님과 친밀하기를 원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영이 건강해야만 한다. 주님은 생명의 왕이시다. 생명은 그 영과 친밀한 관계이다. 다시 말하는 데 그리스도인의 영은 건강해야 한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영 안에서 주님께 열도록 어떤 영적인 훈련이 있다. 영적인 훈련을 받을 때 영적으로 한숨을 쉬고, 영적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영적으로 신음하고, 영적으로 그분에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마음을 이기도록 그분께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아프리카에, 아시아에, 중동에, 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도 좋다. 그 영을 만질 때까지 주님과 계속 대화하라. 그 영을 만질 때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안정되고, 주님 안에서 살면 주님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