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유대인들만 있던 곳에 오다.

Hernhut 2020. 9. 1. 22:47

나오미의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릭이 죽고 그녀는 두 아들과 남게 되었다. 그들은 모압 여인을 그들의 아내들을 얻었는데 하나는 오르바요, 다른 하나는 룻이었더라. 그들은 거기서 약 10년을 살았는데 말론과 길룐이 죽었더라. 그러므로 그녀는 남편과 두 아들이 없이 거기에 남게 되었더라”(룻기 1:3-5).

 

모든 성경과 같이 룻기는 구원에 관한 이야기다. 룻기가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련된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련된 메시지로 전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룻기는 이스라엘에서 구별된 새 민족에 관한 구원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 새 민족은 마태복음 21:43절에 나오는 민족이다. 이 민족은 거룩한 나라요, 애초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제안한 왕국을 그들이 거절한 왕국을 제안한 이방 민족이다(베드로전서 2:9). , 룻기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고, 교회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거부했던 하늘 왕국을 대신 차지해 산출된 새 민족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밝혀진 교회에 대한 것들은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다뤄지지 않았다. 교회가 산출되기 전 이스라엘과의 하나님의 거래는 이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교회의 산출과 그 교회와의 하나님의 거래는 이전에 있었던 이스라엘과의 하나님의 거래로만 일어날 수 있었다. 비록 이스라엘과 교회는 분리되고 구별되는 독립체들이지만, 이 본질을 뗄 수 없는 연결고리가 둘 사이에 존재한다. 따라서 룻기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교회를 중심으로 하지만 이스라엘과 교회 모두와 거래하는 방식으로 시작하고 계속되며 끝난다.

 

룻기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서 사는 것으로 시작한다. 1장 후반부부터 이스라엘과 관련해 이중적 그림을 계속해서 그리고 있다. 미래에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을 특별하게 보여주고, 오늘날 교회 시대에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룻기는 상속 구속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이어, 미래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떤 것이 준비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교회에 관해 룻기는 은혜의 구원으로 시작한다. 구원의 목적, 그리스도인들이 계시 된 목적을 깨닫기 위한 합당한 준비, 그리고 교회 시대가 끝날에 있을 심판의 때를 계시한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미래 시대에 상속을 구속받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상속자가 왕국을 취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예비 된 것을 보여줌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룻기는 두 민족 이 같은 곳에서 끝을 맺는다. 메시아 왕국은 상속 구속을 하게 되고, 구속된 상속에 관해 두 민족을 부르신 목적을 알게 하는 것으로 메시아 왕국에서 두 민족이 끝난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교회와 관련된 문제처럼 다뤄진 이스라엘은 배경에서나 간간이 나타나고, 전체적으로는 교회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에스더에서 보여주는 것과 정반대다. 에스더에서 이스라엘은 전체적으로 볼 수 있지만, 교회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가족의 지체들

 

커다란 실수는 룻기를 연구할 때 구원이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믿음을 통한 은혜로 받는 구원은 4장에서 보아스의 구속 관점에서 잘못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4장에서 그런 관점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4장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교회 시대가 끝나고 난 후에 하실 구속 사역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 , 이미 이방인들에게서 구별되어 오늘날 가족의 한 지체된 사람들을 위해 하실 장차 구속 사역과 관계가 있다. 룻기에서 믿을 통한 은혜로 받는 구원은 1장 초반부에서 볼 수 있다. 4장으로 갈수록 믿음을 통한 은혜로 받는 구원을 찾아볼 수 없다. 4장에서는 구속 사역을 찾아볼 수 있는 데 이는 오늘날 교회 시대가 끝난 후 심판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관계가 있다. 또한, 4장에서 볼 수 있는 미래 구속 사역은 상속과 관계가 있다. 이 구속 사역은 보아스가 그의 구속 사역과 관련해 그의 아내로 룻을 취한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아내로 이미 계시 된 신부를 취하실 것이다.

 

1) 죽음으로

 

이방 땅에 살던 이방인인 룻과 오르바는 기근으로 베들레헴에서 내몰렸던 유대인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모압 땅에까지 갔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대표한다. 룻과 오르바는 결혼을 통해 유대인의 가족이 되었다. 룻은 말론과 혼인했고, 오르바는 길룐과 혼인했다(룻기 1:4; 4:10). 하지만 이 책에서 모압에 살 때 그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모압으로 유대 가족이 들어온 이후 일어난 일을 짧게 밝히고 나오미의 두 아들의 혼인과 죽음 직후 또 다른 이야기를 전개한다(1:4, 5). 죽음으로 가족관계가 해체되었다. 그렇지만 룻과 오르바는 여전히 가족의 구성원이었고, 둘 다 나오미의 며느리로 남아 있었다(룻기 1:6, 7; 2:20). 하지만 룻기는 룻과 오르바가 보여준 이런 면을 계속 전개한다. 따라서 룻과 오르바는 그림 속으로 들어온 죽음을 통해 유대인 가족 구성원의 완성체로는 전개되지 못한다. 오히려 죽음은 눈앞에 있는 현실이었다. 죽음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었고, 선택해야 하는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 예표에서 실제로 옮겨가면서 눈에 선한 것은 가족의 죽음이다. 룻기는 오늘날과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을 말하고 있다. 죽음과 피 흘림에 의한 이 구원은 오늘날 구원받지 않은 유대인과 이방인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성경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을 구원하여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오직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때 멀리 떨어져 있던 이방인들이 가까이 오게 된 것”(고린도전서 15:3; 에베소서 2:13)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를 흘리심이다. 구원받지 못한 아브라함의 씨인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서먹서먹한 사이다.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들처럼 하나님께 어색할뿐더러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과 이방인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인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하나님께 오는 방법은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유대인과 이방인은 같은 가족의 구성원이 되고, 이 가족 안에서 똑같이 아브라함의 씨인 것이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사도행전 16:30, 31). 그러면 성령은 그리스도가 갈보리에서 완성하신 사역을 바탕으로 각 개인에게 생명을 호흡하시고, 각 개인은 죽음에서 삶으로통과한다. 이 방식으로 각 개인은 위로부터의 태어남을 체험한다(요한복음 3:3, 6, 7; 5:24; 에베소서 2:1). 그러면 거듭남과 동시에 일어나는 교회 생활과 특별히 관련된 그 영의 사역이 있다. 각 개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영에 잠기고, “한 새사람”, “거룩한 민족”, 한 때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젠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이방인으로 구성된 독립체가 된다(에베소서 2:15; 베드로전서 2:9, 10).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씨이시기에 그들 역시 아브라함의 씨이다(갈라디아서 3:16, 29).

 

이 가족관계는 한 새사람과 아브라함의 씨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셔서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 한 새사람을 구성하심과 관계가 있다(갈라디아서 3:26-29). 구원받지 않은 유대인과 이방인은 똑같은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들 스스로 구원받았는지와 한 새사람의 일부가 됨을 알게 된다. 유대인은 한 위치에서 이스라엘로 옮겨가고, 이방인도 유대인에게 낯선 위치에서 믿는 유대인이 소유한 이스라엘로 옮겨진다(에베소서 2:12-15). 나라, 국가라는 단어는 헬라어 politeia폴리테이아(πολιτεία). politeia는 시민권, 통치권과 관계가 있다. 통치권은 하늘에 속한 왕국의 영역과 관계가 있다. 오늘날 교회 시대 동안 이스라엘에서 빼앗은 왕국의 그 영역은 한 새사람을 구성하는 자들에게 확장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창조가 되고, 한 새사람을 형성하는 구원받은 유대인과 구원받은 이방인들(고린도후서 5:17)은 제안한 하늘에 속한 약속과 축복과 관련된 동료 상속자들이다(에베소서 3: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약속에 따른 아브라함의 씨요, 상속자들이다. 모든 일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까지 이끌려지고 아브라함에게 거슬러 올라가고 간다(창세기 12:1-3; 22:17, 18; 갈라디아서 3:29).

 

2) 이방인의 충만

 

오늘날 교회는 이방인의 충만과 관계가 있다. 이 이방인의 충만은 유대인의 죽음에 따라 진행될 것이다. 유대인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위해 사람들을 세상에서 밖으로 끌어내시려고 이방인을 방문하셔서 그들을 충만하게 하시려는데 있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으로 그 민족 일부가 눈이 멀고, 기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사역하셨다. 하나님의 사역은 일부의 이스라엘이 회개할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 눈이 멀지 않은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옮기시면 비로소 교회 시대가 끝날 것이다. 교회 시대가 끝난 후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을 공급하셔서 유대인들의 눈은 뜨게 될 것이다(누가복음 24:16-31; 사도행전 2:36-39; 3:19-23; 15:14-18; 로마서 11:24-26).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거래하실 것이다.

 

이방인의 충만과 하나님의 완전하신 목적과 계획을 이해하려면 다니엘 9:24-27에 있는 다니엘의 70주 예언을 알아야 한다. 이 예언은 유대인과 예루살렘 성에 밝힌 70이레와 관계가 있다.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이 예언은 유대인의 구원과 관련이 있는 예언이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죽은 뒤 수 세기가 흐른 마지막 때를 가리킨다. 이 마지막 때는 다니엘의 70이레 예언 중 다니엘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향해예비 된 마지막 한 이레 즉 7년을 가리키며 이때를 보통 “7년 환난기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회복을 보여주기 위한 이정표인 다니엘의 70이레 중 앞부분은 이미 성취되었고 나머지 한 이레 즉 7년은 앞으로 적그리스도의 때에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충만함은 다니엘 예언의 시간 내에 있는 곳에 맞춰져야 하는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사역은 이스라엘이 회복되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 이것은 이 주제는 성경이 말하는 분명한 가르침이다(창세기 24:1-25:34; 사도행전 15:14-18; 로마서 11:24-26). 다니엘 70이레 예언은 이스라엘 역사의 특정한 시간에 시작해 메시아 왕국으로 끝난다. 하지만 예언에는 계산되지 않은 틈이 있다. 하나님은 특정한 시점에서 연대계를 정지시키셨다. 정지시키신 시간은 7년이다. 7년은 계산되지 않았고, 그 틈에 하나님은 새 민족을 창조하시고, 조성하셨다. 하나님이 그분의 이름을 위해 이방인에게로 돌아서셨고, 그들을 불러내셨다. 70이레 예언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으로 시작했다(다니엘 9:25a). 이 예언은 B.C.465-423년에 메대와 바사 제국을 통치하던 아닥사스다 1세가 B.C.444년경에 명령했다. 아닥사스다 1세는 고레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고레스는 에스더에 등장하는 아하수에로와 같은 왕이다. 아하수에로는 복음서에 나오는 헤롯과 비슷한 호칭이나 성이다. 그러므로 고레스와 아하수에르가 같은 사람이라면 70이레 예언은 에스더에 있는 일들이 일어난 직후에 일어난다. 다니엘 예언은 에스더에서 전개하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 회복된 메시아 왕국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언을 이루시려고 연대계를 멈추시고 7년 짧게 완성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따로 떼어 놓으시고, 그 민족 대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새사람 즉 새 민족을 조성하셨다. 하나님은 연대계를 멈추시고 이스라엘이 완전히 분리하신 오늘날 이 새 민족과 거래하신다. 비록 이 7년의 연대계 멈춤이 69이레 끝에서 일어난다고 예언에 계시 되었을지라도 예언의 어떤 부분에도 연대계의 멈췄다는 것이 내용은 없다. 연대계의 7년 멈춤이 있었지만, 예언 그 자체에는 없다. 오히려 연대계의 7년 멈춤은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 보아야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다른 부분의 성경을 비춰 이 예언을 보아야 한다. 다니엘 예언 속에 있는 연대계의 7년 멈춤은 계시 된 두 사건 사이에서 일어난다. 62이레 후에 메시아가 죽겠으나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성과 성소를 멸하러 오실 왕의 백성들을 위해 죽은 것이다(다니엘 9:26). 다니엘 9:25절에 7주를 더해 모두 69주가 된다. 이는 483년이 되는 것이다.

 

이 연대계의 7년 멈춤은 이스라엘의 메시아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 죽은 때부터 시작하는 A.D.33년이었을 것이다. 예언에 따르면 오늘날 교회 시대가 끝나고, 7년의 연대계가 멈춘 것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 다니엘 70이레 예언의 마지막 70번째 이레가 시작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과의 거래를 회복하시는 일이다. 예언에 서술된 이 모든 일은 예언에서 다뤄진 시간적 범위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은 예언에서 계산되지 않은 7년의 연대계가 멈춘 상태이라서 왕의 백성들을 회복시키는 일은 7년의 연대계 멈춤이 다시 움직일 때부터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언의 483년이 지나간 뒤에,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 끊어지게 되었다.

 

태양력으로 볼 때 1년을 365.25일을 사용하기 때문에 B.C.444년 초부터 A.D.33년 말까지의 시간은 477년이다. 하지만 성경은 태양을 중심으로 한 지구의 움직임으로 계산한 날수가 아니라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달의 움직임을 기초하여 360일로 계산한다. 따라서 대니얼의 예언에서 1년은 365.25일이 아니라 360일을 기준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477년 태양력은 음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렇게 바뀌게 하는 것은 477년으로 계산했기 때문에 예언에서 말한 483년을 채우고도 약 1년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간은 예언에서 언급된 두 사건에서 시작 부분과 끝부분에만 2년으로 계산되었다. 따라서 태양력의 매년 에누리 시간을 삭제하면 약 1년이 더 없어질 것이다. 아닥사스다 1세의 명령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못 박힘에 이르기까지 480년을 360일로 계산되었다.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짜를 각기 다르게 사용해 오고 있다. 하지만 그 날짜를 정확하게 아는 이들은 없다. 대개 A.D.32년이나 A.D.33년이 다니엘 예언에 가장 적합한 때라고 본다. 다니엘 예언을 보면 A.D.32년이나 A.D.33년이 아닥사스다 1세가 명령한 세속적인 역사와 딱 맞는다. 하지만 세속적인 역사로 A.D. 33년을 십자가에 못 박힌 해로 여길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예루살렘이 서기 70년에 타이터스 휘하의 로마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라. 이에 앞서서 이스라엘에 하늘 왕국을 제안하고, 재제안을 했었다. 그 제안은 침례자 요한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와 열두 명, 일흔 명 등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 제안은 약 3년 또는 3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 제안을 번복하고 자기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 후, 이스라엘에 왕국을 다시 제안하는데 이것은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사역 함께 교회가 건축된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사도행전 28:28까지 계속되었다. 하늘 왕국에 대한 제안은 이스라엘의 회개 요청으로 시작되었다(마태복음 3:1, 2). 처음 하늘 왕국을 제안할 때부터 재제안을 하기까지 이러한 방식은 계속되었다(마태복음 4:17; 10:1-14; 누가복음 10:1-12; 사도행전 2:16-39). 성경에서 숫자 “40”을 완전한 수로 사용하는데(민수기 14:34; 누가복음 4:2; 사도행전 1:3) 이 숫자는 이스라엘이 분명하게 회개할 40년이었다. 이 기간은 완전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할당된 기간을 따라 심판이 임할 완전한 기간이다. 이 완전한 기간은 마태복음 22:1-14절에 있는 혼인 잔치와 완전히 일치할 것이다. 혼인 잔치는 예루살렘이 머지않아 멸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회개하기를 거절하고, 재제안된 왕국에 대해 최종적으로 거절할 것이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2:7). 왕국을 위해 이스라엘이 회개하도록 하는 침례자요한의 사역은 예루살렘의 파괴 40년 전 A.D.30년에 시작되었어야 했다. 그에 이어 예수님의 사역이 3년에서 3년 반 정도였기에 A.D.33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짜와 정확하게 맞는다.

 

하지만 요컨대 인류의 추론과 세상의 역사는 다니엘 예언의 날짜가 맞아야 한다. 아닥사스다 1세가 통치할 때부터 정확하게 483년이 되는 그날까지 그리스도의 못 박히신 십자가 사건에 개인적으로 이끌려질 것이다. 그리고 2,000년 전 유대인들은 예언 속에서 483년 끝에 이르렀을 때 메시아가 계셨고, 십자가에 못 박아 살해할 것을 알아야 했다(이사야 53:1-12; 스가랴 12:10; 13:6).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이런 면에 있어서만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성경을 보지 않고 이 일을 백성들의 관심에 호소하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다니엘의 예언을 볼 수도 있었고, 그 예언이 시작되었을 때의 역사도 볼 수 있었다. 정확한 날짜에 대해 확신이 없더라도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예언의 시간을 쉽게 계산하고 종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과거 이스라엘 역사 끝 무렵에 일어났다. 아직 그 예언이 완성되기까지 7년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시대가 끝나갈 무렵 기독교에서 아주 유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인간의 시대는 6,000년이 계속되고 있고, 주의 시대 1,000년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오늘날 교회 시대에 할당된 시간이 거의 끝났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은 2,000년 전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했던 것과 같이 행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보려고 하지 않고, 간단하게 계산해 보고,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사람들에게 알리려 한다. 2,000년 전 이스라엘과 같이 거의 우주적인 침묵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

 

정해진 시간에 관해 예언된 사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 된 것은 2,000년 전 이스라엘의 사람들에게 무시되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이 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아주 비슷한 차원으로 무시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확인하고 이것을 계산할 때 그는 오늘날 교회 시대에 기껏해야 몇 년 남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일에 다시 한번 개입하시려고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483년 후 연대계가 다니엘 예언에서 멈췄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민족이 나타났다. 이 새로운 민족의 연대계는 과거 두 시대의 연대계 길이와 같은 길이로 진행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민족에게 2,000년을 흐르게 하고 계신다. 2,000년이 흐르고 있지만, 멈췄던 7년이 시작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이스라엘과의 거래를 위한 2,000년이 흘러가고 있다.

 

우리가 사는 교회 시대는 예언에 계산되지 않은 483번째와 484번째 이레에 진행되고 있다. 이 새로운 교회 시대에 하나님은 그분의 이름을 위한 백성들을 이방인에게서 하늘로 옮기신다. 이 교회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 가정관리자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새사람과 거래하신다. 이 교회 시대에 하나님의 그영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기 위해 이 세상에 계신다. 그 신부는 주로 이방인들 가운데서 얻게 된다. 그영께서 오늘날 교회 시대에 그분의 일을 마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새사람은 하늘로 옮겨질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거래를 완료하시려 그들에게 돌아가실 것이다. 다니엘의 예언 마지막 7년이 흐르게 되고 490년이 채워질 것이다. 예언에서 계시 된 것처럼 이스라엘은 회복되고 메시아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이방인의 충만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교회 시대에 이방인 이외에도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란의 마지막 1/2 기간에 144,000명의 구원받은 유대인들이 세계 곳곳에서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 무수히 많은 이방인이 구원받을 것이다(요한계시록 7:9-17; 12:17). 하지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은 오늘날 교회 시대에서만 구원받는 이방인들이다. 이들에게만 이방인들의 충만이라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환란기에 구원받은 이방인들 역시 이방인들의 충만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충만에 포함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본거지

 

비록 이스라엘이 교회 시대에 따로 구별돼 있지만, 하나님은 다른 가정관리자와 거래하고 계신다. 여전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오늘날 그들이 아닌 새로운 민족과 거래하시는 그림에 남아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제외하고 하나님은 구별된 시대에 다른 가정관리자들과 거래하실 수 없으셨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이 이방인들과의 거래하시는 그림에 남아 있는 것은 룻기에도 분명하게 계시가 되었다. 룻의 행동은 항상 나오미와 관련이 있다. 나오미는 남편에 이어 두 아들이 죽은 이스라엘을 예표한다. 이것은 예표와 실제에서도 보여 주는 방법이다.

 

룻기 1:6, 7절에서 룻과 오르바가 그들의 고국에서 떠나 나오미와 함께 또 다른 나라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룻만 이스라엘을 향해 나오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오르바는 나오미 곁을 떠나 그녀가 자라던 집으로 돌아갔다(룻기 1:8-18; 히브리서 11:15, 16). 룻과 나오미는 함께 이스라엘을 향해 여행했다. 한 사람은 고국을 떠났고, 한 사람은 자기의 나라로 돌아가게 됐다. 두 여인은 같은 방향으로 여행했다. 그들은 그 땅뿐만 아니라 그 땅의 특별한 부분 베들레헴을 향해 여행했다. 그들은 보리와 밀 추수가 시작되는 베들레헴에 도착했다(룻기 1:19-22).

 

그들이 베들레헴에 들어온 후 룻은 나오미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 가까운 친척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을 볼 수 있다(룻기 2:1-3). 죽음이 결혼 관계를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결혼 관계로 맺었던 가족관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 보아스는 여전히 나오미의 가까운 친척이었고, 룻에게도 가까운 친척이었다(룻기 2:20). 룻은 나오미와 가족관계로 룻기 전반에 걸쳐서 보아스와 가까운 친척 관계임을 입증하고 있다. 룻기 2:2, 19 3:4절에서 룻은 나오미에게서 두 가지 것을 지시받았다. 보아스의 밭에서 추수 기간 이삭을 주우라는 것(룻기 2:2, 19-23)과 추수 끝 무렵 타작마당에서 보아스를 만나라는 것이었다(룻기 3:1-4). 보아스 밭에 있는 룻은 나오미와 가족관계라는 나오미에 대한 언급으로 확인된다(룻기 2:6). 룻은 나오미와 살면서 완벽하게 나오미의 지시를 듣고 따랐다. 룻은 다른 유대인 여인들과 보아스의 밭에서 추수하는 내내 나오미와 함께 계속 살면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룻은 보리와 밀 추수가 끝날 때까지 이삭을 줍고,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보아스의 젊은 여인들로 가까이 머물렀다(룻기 2:23).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룻은 나오미의 지시를 완벽하게 따르는 자로서 있었다. 룻은 나오미의 지시에 따라 타작마당에 나가기 전에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준비했다. 타작마당에 나가서도 나오미의 지시를 따랐다. 타작마당에 가서 일한 후 룻은 나오미와 함께 거주할 곳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나오미의 지시를 따랐다.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그가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룻이 시어머니에게 가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하니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리고......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하니라”(룻기 3:5, 6, 16, 18).

 

그런 후 4장은 오늘 이 일을 마치는 보아스와 관계가 있다. 4장은 보아스가 룻을 자기의 아내로 취하는 것, 상속 구속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보아스가 그의 구속적 사역을 완료하고, 룻이 그의 아내가 된 후에도 전과 같이 여전히 그림 속에 나오미가 있다. 룻과 나오미의 관계는 변한 것이 없다. 룻은 여전히 나오미의 며느리요, 나오미는 보아스와 룻에게서 태어난 어린 아들을 돌보는 새로운 임무를 맡았다(룻기 4:13-17). 나오미에게서 나온 지시와 방향이 산출된 두 번째 세대가 그림 속으로 들어온다.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을 의지하지 않고, 그 민족과 연결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구원자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이스라엘에 빼앗은 왕국 영역의 위치에 있게 됐다. 이스라엘이 이 그림에 없다면 이전의 것은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12아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인에게 출애굽기 12장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표 되신 타락한 사람을 대신해 죽은 구세주를 주었다(요한계시록 5:5, 6). 이스라엘은 성령의 중보로 유대인에 의해 전적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인에게 주었다(시편 147:19, 20; 베드로후서 1:21). 이스라엘은 이 땅의 왕권과 권위를 발휘하도록 하늘과 땅에 속한 왕국의 영역의 저장고를 만들었었다(창세기 22:17, 18; 출애굽기 4:22, 23; 19:5, 6).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이스라엘은 왕국의 하늘에 속한 영역에서 왕권과 권위를 발휘할 권리를 빼앗겼다. 하늘의 왕국과 관련된 이스라엘의 왕권은 유대인들에게서 빼앗았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즉 한 새사람은 이스라엘이 거절한 하늘에 속한 왕국을 받도록 산출되었다(마태복음 21:33-43; 베드로전서 2:9, 10). 이 새로운 민족의 산출은 첫 번째로 유대인 구세주를 통해 얻은 영적인 생활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었다. 둘째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각 개인을 그영의 사역을 통해 아브라함의 정체성에 의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또 그것을 넘어서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해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계시하는 유대인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세상에서 일할 사람이 그 땅을 향해 여행하는 것에 관해 알아야 하는 모든 것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타작마당과 그 너머에서 그분을 만날 준비할 방법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에 의해 존재한다. 이스라엘은 오늘날 교회 시대와 메시아 시대에도 이런 방법으로 그림 속에 남아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