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가라지들 중에서 알곡을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믿지 않는 자들 중에서 믿는 자들을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 주님은 그렇게 쉽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가라지야.”
“저것도 가라지군.”
“뿌리째 뽑아야 다신 얼씬도 안하지.”하고서 뽑아냈을 때 아주 좋은 많은 양의 밀도 뿌리째 뽑혀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밭에 상당한 해를 입히고, 종자뿌리는 자에게 손실을 입히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주님을 섬기려 한다면 큰 피해를 입힐 위험에 빠지게 된다.
실제의 밀과 가라지는 완전히 다른 식물이다. 하지만 자랄 때에는 마치 같아 보인다. 밀은 가라지가 되지 못하고, 가라지는 밀이 되지 못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영적적용은 흑과 백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그 이유다. 하지만 실제로 믿지 않는 자들이 회개할 수 있고, 그들이 믿는 자가 될 때를 알 수 없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가라지들로서 시작했다. 그런 후 복음을 듣고, 알곡이 되었다. 어떤 누군가가 믿을 수 있었던 때에 뿌리째 뽑아 버렸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종자를 뿌리는 자는 여기서 말했다.
“둘 다 수확 때까지 같이 자라게 두어라. 수확하는 때에 내가 거두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먼저 가라지를 함께 모아 불태우게 단으로 묶되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하시니라.”(마 13:30)
주님은 그분의 추수를 주장하러 오시는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교회 안에 둘 다 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복음은 그 사역이 완료가 될 것이다. 그래야만 가라지에서 알곡을 분류할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많은 믿는 이가 그들의 믿지 않는 이웃과 같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완전히 성숙하지 않고, 거듭나는 날에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한다. 바울과 같이 그들은 부르짖는다.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지는 내가 찾지 못하노라. 이는 내가 원하는 선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을 곧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롬 7:18–19)
모두가 개인적인 죄들과 문젯거리들로 고통 받고 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빛 비추러 오실 때까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요한은 말한다.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우리가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
비록 더 이상 가라지들이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가라지들 같다. 어떤 믿는 이들은 믿지 않는 자들처럼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요한은 죄를 고백한다면 용서받고,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한다(요일 1:9). 이른 시기에 뿌리째 뽑혔다면 이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교회 생활에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쫓아내야 할 때가 있는 반면(고전 5:1–5), 그들이 회개하고 사랑으로 보답할 때가 있음을 기대해야한다(고후 2:6–8). 주님의 은혜로 가라지 같은 믿는 이들이 알곡으로 회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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