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벵가는 1881년 중앙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그는 넓은 들판에 밝고, 강하게 자랐다. 한 여인의 남편이요,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그는 어느 날 코끼리 사냥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그가 가정이라고 했던 다 무너진 캠프를 찾아 돌아왔다. 그의 아내, 아이들, 그리고 친지들과 친구들은 살해당했다. 그들의 육체는 진화된 열등민족이라 말하는 것에 대항하다가 벨기에 정부 폭력집단에 의해 무참히 훼손됐다. 오타는 나중에 잡혔고 마을을 떠나 노예로 팔렸다. 그는 아프리카인 탐험가로 알려진 사무엘 베르너가 그를 노예시장에 데려가 벨기에 사람 콩고라는 사람에게 팔려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키가 약 150cm, 몸무게가 47kg이었던 그는 종종 “꼬마”로 불렸다. 사실 그는 아들이요, 남편이요, 아버지였다. 오타는 1904년 세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 인류학관에서 “상징적인 미개인”으로 전시되었다. 다른 피그미족처럼 지적 테스트를 해서 “야만인종”이 지적으로 얼마나 부족한지를 백인과 비교하고, 이와 같은 고통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그는 과학자들에 의해 연구대상이 되었다.
미국 과학지 1904년 7월 23일자에 기록되었다.
“그들은 작고, 유인원을 닮은 꼬마요정 같은 생명체다. 그들은 완전히 야만적으로 산다. 그들의 몸에는 꼬마요정 같은 특성과 다른 니그로인들, 가장 저속한 피그미족에 없는 경계심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니그로인, 저속한 피그미인들 보다 더 지적인 것을 나타내는 특성이다.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다. 그들은 가축이 없다. 그들은 사냥을 하고, 올가미를 놓아 동물들이 걸리면 그것을 먹는다. 니그로인의 양식이나 가축들을 빼앗아 살아간다. 그들은 물이 넉넉하지 않지만 숲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니그로 부족 주변에 작은 군락을 세운다. 그들은 탁월한 존재와의 접촉으로 금속을 다루는 것 같다.”
그들은 1902년 스미스소니언 잡지에 아주 재능 있는 피그미 무리를 찾았다는 H.H. 존스톤의 연구를 발표하지 못했다. 피그미 무리의 환경에서 연구했을 때 존스톤은 피그미 무리가 흉내를 잘 내고, 신체적으로 날렵하고, 빠르고, 민첩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도로 발달한 사회적 기술과 구조를 가지고 있는 뛰어난 사냥꾼들이었다. 외부 사람들이 그들을 원시적이라고 생각했을 때 피그미족들은 실제로 하나님에 관한 강한 유일 신앙을 가졌다. 최근 연구는 더 확실하게 해주었다.
“이투리 숲 피그미의 종교는 하나님께서 생명력 전체를 소유하시고, 그분이 창조하신 사람들에게 나눠주시고, 그 사람들을 존재 안으로 데려가시고, 그들을 완벽하게 하신다는 신앙을 가졌다. 피그미족은 ‘빛을 만드신 그분이 어둠도 만드셨다.’고 한다.”
베르너가 피그미 아프리카인 왕을 방문했을 때 노래와 선물, 음식, 팜술, 드럼을 선사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고, 거래가 기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윈주의자들은 이러한 어떤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와 같은 관찰은 피그미가 열등하고, 인간 이하였다는 진화에 대한 그들의 선입견이나 관점과는 맞지 않았다. 피그미족이 세인트루이스에 있었을 때 그들은 비웃는 사람들의 소재가 되었고, 밀침과 쿡쿡 찌름을 당했다.
“사람들은 피그미족들을 사진 찍고, 도망하게 하려고 전시장에 왔다. 어떤 이들은 서로 반대하는 이들과 싸우러 왔다. 베르너는 피그미를 아프리카로 안전하게 돌려보내는 데 서명을 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산산이 찢길 때까지 전시회장에서 싸움을 했다. 거듭해서 군중들은 흥분했고, 광분한 상태에서 끌어당기고, 밀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흉해 보였다. 그때마다 오타와 배트와는 가까스로 뽑혔다.”
그 전시회는 인간 진화단계에 대한 완벽한 과학적 입증이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배적인 백인에게서 완전히 분리되도록 하는 데 가장 진한 흑인을 필요로 했다. 알려진 가장 낮은 문화에 살았던 오타의 존재는 인류의 가장 높은 극치를 대표한 코카시안과 현저히 대조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사이 전시를 담당하는 동물학자들은 그들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일찍이 원시인의 머리는 잘려나갔고 두개골로 결론이 났다. 두개골 크기가 지능지수였다고 믿는 과학자들은 원시인 두개골이 정치인 다니엘 웹스터에 속한 사람들보다 더 크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때늦게 베르너는 오타와 다른 피그미 사람들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냈다. 오타는 곧 재혼을 했지만 그의 두 번째 아내는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 그 또한 백인들과의 관계 때문에 그를 아는 이들로부터 배척당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오타는 혼자인 것을 알았다. 다음 여행에서 아프리카로 오타를 데리고 올 것이라고 말했던 베르너와 함께 오타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 미국으로 되돌아 온 베르너는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보물 상자를 팔고, 자기가 기르던 동물을 동물원에 팔려고 했다. 베르너는 심각한 재정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오타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베르너가 브롱크스 동물원 책임자 호르나디 박사로 오타에게 나타났을 때 오타가 전시장에 다시 나갈 것이라는 것이 분명했지만 이 때 그 전시회는 심각한 사기를 당했다. 1906년 9월 9일자 뉴욕 타임지 헤드라인은 “부시맨이 브롱크스 공원 유인원과 우리를 같이 쓴단다.”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비록 호르나디 박사가 공공을 위해 강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전시를 권했다고 주장하지만 타임지는 그가 “외형적으로 야생동물과 흑인 사이에 다른 점이 없다고 보았고, 미국 동물원에 가장 먼저 사람이 케이지에 전시되고 있다”고 기록했다.
타임지 9월 10일자에는 또 피그미족에 대해 기록된 것이 있었다.
케이지 앞에는 항상 군중이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 폭소가 터졌다. 그리고 정원의 모든 구석에서는 “피그미가 어디 있니?”라는 질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은 “원숭이 집에 있어.”라고 대답했다.
오타의 삶을 광범위하게 연구한 브라드포드와 블룸은 동물원에 있는 피그미에서 오타 벵가를 알렸다.
전시의 영향은 방문자의 질문들로 분명해졌다.
“그는 사람이야, 원숭이야?”
“중간에 어떤 것이 있었지?”
“저것 사람에 속해 있는 거야?”라고 독일인 관객은 물었다.
“저것 사람이지?”
아무도 인간에 대해 유인원이나 앵무새로 오해하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훨씬 더 가까워졌다. 피그미가 사람인가? 원숭이인가? 진화의 단계 중 하나인가? 호르나디 박사는 다윈이론을 추종자가 되었다. 1906년 9월 11일자 뉴욕타임지는 그가 아프리카 야만족이 유인원과 아주 닮았고, 인종에 대한 계층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을 실었다. 전시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1906년 9월 16일까지 약 40,000명이 동물원에 찾았다. 폭도들에 의해 잡아당기고, 밀침을 당하고, 쿡 찔리거나 꼬집혔기 때문에 군중들이 너무 많아 경찰들을 전시간을 오타를 지키는데 배치했다. 모든 광분을 묵과한 것은 아니다. 흑인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오타를 방어하러 갔다. 타임지 9월 10일에 실린 기사에서 고든목사는 말했다.
“우리 인종은 우리 중 유인원과 함께 전시되지 않고서는 충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9월 12일에는 다른 말을 했다.
“목사는 진화가 학교 교과서에서 지금 가르쳐지고 있고, 구구단보다도 논쟁의 여지가 더 없다고 말해야 했다.”
언론의 열광적인 관심은 오타가 철창에서 풀려나게 되는지에 쏠렸지만 구경거리는 계속되었다. 타임지는 9월 18일자에 또 기사를 썼다.
“일요일 공원 방문객이 40,000이었다. 거의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의 아이는 공원에서 아프리카에서 온 야만인에 시선을 끌게 하려고 원숭이 집을 만들었다. 그들은 온종일 아프리카에서 온 야만인을 법석을 떨고, 환호하고, 소리 지르며 야유하고 따라다녔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고, 다른 이들은 그를 넘어뜨렸고, 그럴 때마다 모두 다 그를 비웃었다.”
결국, 호르나디는 스스로 언론의 압박이나 구경거리가 불러일으킨 피로로 그만두었다. 오타는 동물원에서 풀려났다. 몇 달 후 그가 돌보고, 동정할 어떤 기관을 세웠다. 그가 동정하고, 돌볼 기관을 세운 린치버그와 버지니아에 있는 흑인 공동체에 갔다. 그는 침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의 영어는 급속히 향상되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아이들을 돌보았고, 그들을 보호하고 사냥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린치버그 신학교 수업에 나갔고 읽는 법을 배웠다. 후에 그는 담배공장 노동자로 취업을 했다.
하지만 오타는 점점 우울해졌고, 적대적이고, 비이성적이고, 고독하게 되었다. 그가 고향으로 가고 싶다고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그의 눈가에는 어느 덧 눈물이 흘렀다. 1916년 3월 20일에 고향 땅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맺은 오타는 자기 가슴에 권총을 당겼고, 그의 마음을 관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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