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5장은 생명의 노선의 장이다. 셋이 부활 안에서 아벨을 상징하기 때문에 아벨은 언급되지 않는다. “임명된, 정해진”을 의미하는 셋은 “약함, 영원히 살 수 없는”을 의미하는 에노스를 낳았다. 우리가 약함, 제한, 영원히 살 수 없음을 알 때 우리는 생명의 노선에서 에노스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럴 때 이 약함과 제한에서 우리는 아들을 얻는다. 에노스의 아들은 “게난”이라고 불렀다(창 5:9). 게난은 가이난Cainan이라는 철자를 붙이고 번역할 수 있다. 게난은 가인과 아주 유사하다. 가인은 “얻다”를 의미하고 게난 역시 “얻다”를 의미한다. 생명의 노선에도, 지식의 노선에도 얻는 어떤 것이 있다.
영적인 것들을 얻는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을 얻는 것과 아주 다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쉽게 얻고, 습득한다. 지식 노선의 원칙은 어떤 것을 얻기를 원하고, 자기를 시간과 정력을 쏟으면 곧 얻을 것이라는 논리다. 게다가 그렇게 해서 얻으면 아주 자랑스럽고, 그것에 관해 자신이 있어 할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이로써 우리는 다른 원칙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크게 되거나, 자만심을 갖기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가 약하고, 깨지기 쉽고, 제한적이고, 덧없다는 것을 알기 원하신다. “영원히 살 수 없는” 에노스는 “얻다”의 게난을 낳았다. 우리가 약하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의 노선에 있는 영적인 것을 얻을 것이다. 게난만이 에노스의 약함에서 온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것을 얻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신감을 건축하고 재건축해야 한다. 우리는 격려를 받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생명의 노선에 있는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속한 곳에 앉아야 한다. 이것은 높여지고, 임명되고 정해진 셋의 체험이다. 그런 후 우리는 우리가 부서지기 쉽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에노스에 대한 체험이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보아야 한다. 에노스가 태어났을 때 성경은 사람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창 4:26). 우리가 깨지기 쉽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오, 주 예수님!”하고 부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의 약함과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으로 주님을 찾음으로 우리는 영적인 풍성을 얻을 것이다.
게난은 에노스에게서 온다. 우리가 생명의 노선에서 얻는 풍성은 우리의 약함에서 온다.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영적인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다. 영적인 얻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한 형제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전 이겼습니다.”라고 부르짖을 때 그의 체험을 신뢰하기가 어렵다. 우리 영 안에서 이 이김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 형제가 눈물로 회개한다고 하자.
“주님, 전 너무 가련하고 부족합니다. 전 너무 약하고, 제한적입니다. 전 당신께서 절 사랑하시는 것조차도 모릅니다. 전 당신께서 제게 긍휼을 베푸시는 이유를 모릅니다.”
우리는 이 형제가 자라고 있음을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생명의 노선에서 에노스를 체험하고 있다. 이 형제가 자기의 약함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게난의 체험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절실하게 주님을 추구하고, 주님을 부름으로 그는 생명의 노선에서 영적인 풍성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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