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널판
성막 널판은 우리를 대표한다. 영적으로 말하면 성막 널판은 우리 각자가 널판이다.
성막에서 사용된 널판의 총수는 48개였다. 20개의 널판은 남쪽에, 또 20개의 널판은 북쪽에, 6개는 서쪽에, 그리고 특별한 양면 구석에 2개를 배치했다(출 26:18-23).
각 널판은 높이가 모두 10큐빗이었지만, 구석 널판 2개의 넓이는 1.5큐빗이었다(출 26:16). 그러므로 성막은 길이가 30(20 x 1.5)큐빗이었다. 6개의 뒤 널판은 9(6 x 1.5)큐빗이 될 것이고, 구석 2개의 널판은 10큐빗이 되도록 뒤에 1큐빗을 더했다.
뒤 널판은 중요하다. 뒤 널판이 없는 성막은 터널과 같이 될 것이고, 물건들이 곧바로 통과할 수 있었다. 많은 교회가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내시든 그것들을 곧바로 통과시킨다. 모든 사람이 사역을 진짜로 즐기고, 교회가 집회를 열고, 지역 모임을 열지만, 집회가 끝날 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매년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는다. 교회는 남쪽과 북쪽에 아름다운 널판을 가지고 있지만, 뒤 6개의 널판과 구석 2개의 널판을 놓치고 있다.
10큐빗의 높이
이 그림에서 우리 각자는 높이가 10큐빗인 널판이다(출 26:16). 이 10큐빗은 우리가 모두 생명 안에서 같은 성장과 심지어 같은 체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성장과 분발시키는 것을 방해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이 10큐빗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완전한 책임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성막에 있는 널판이라고 하는 한 그분은 우리의 영적 발전과 그분 앞에 우리의 일어섬에 대해 완전하고, 완벽한 책임이시다. 우리 각자는 다르게 발전할 수 있지만, 하나님에게까지 발전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책임이시기에 우리와 그분의 사역을 하실 그분을 신뢰한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10큐빗에 도달하도록 보장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에게까지 자랄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더 빠르게 자라기 위해 자신이 돌파하려고 한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크지 못할 때 자기가 더 큰 것을 보려고 의자 위에서 일어서는 아이와 같다. 우리가 10큐빗이 되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잊는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그것을 떠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라게 하는 만큼 영적인 높이로 자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에게는 이것이 큰 도전이다.
하나님은 똑같은 높이로 모든 관목을 다듬는 정원사가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똑같이 만드시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기록했다.
“그런즉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우리가 다른 선물들을 가지고 있으니 대언이면 우리가 믿음의 분량대로 대언하고,”(롬 12:6)
우리는 성숙의 다른 은사, 다른 훈련, 다른 수준으로 인하여 은혜의 다른 분량이 주어졌다. 모든 사람이 모임에서 같은 방식을 말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없다. 어떤 형제는 말하는 것에 대해 더 큰 몫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은 다른 곳에서 그들의 몫을 찾는다. 우리가 다 같지는 않지만,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10큐빗까지 자라도록 주신 은혜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런 관점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형제와 자매를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우리가 10큐빗에 도달할 수 있고, 교회에 축복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소중하다. 우리의 가장 큰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어떤 까닭인지 우리가 덜 성장한다는 것이다. 우리 중 아무도 우리의 몫을 훈련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찾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가 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장하지 않을 것이고, 교회는 괴로워 할 것이다. 절대 중단하고, 포기하지 말라. 주님께 간청하라.
“주님, 제가 덜 자라지 말게 하소서.”
내가 몇백 명의 믿는 이들의 집회에 갔을 때 나는 놀랐다. 나는 생명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나는 옆에 있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메시지를 전달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악수를 하게 하고, 이름을 묻고, 형제요, 자매로 부르도록 요청했다. 그들은 다시 나에게도 요청했고, 나는 “아멘”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나누었다. 나는 그들에게 “아멘”이 “예”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동사로는 “확실하다”, 명사로는 “진리”, 부사로는 “참으로”, 끝맺는 말로는 “확실히 그렇게 될 지이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의 뜻이다.
“내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정말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면 여러분은 더 큰 소리로 ‘아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온 집회를 아멘으로 끝을 맺었다. 내가 또다시 갈 기회가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있다면 읽고 있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분의 말씀은 성령이요, 생명입니다. 조금 소리를 내어 성경을 읽고, 말씀을 누리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함께 했었지만 만이 알지 못한다. 그들 중 아무도 그들의 10큐빗에 도달한 사람이 없었다. 하나님은 영적 거인을 따르지 않으시고, 우리 각자가 완전한 잠재력에 도달하기를 원하신다.
아카시아나무는 금으로 덮였다.
성막 널판은 강하고 단단한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어졌고, 사막 폭풍에도 굳게 견딜 수 있었다(출 26:15). 나무는 인성을 대표하고, 그리스도의 인성만이 이런 널판이 될 자격이 있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달하는 사람으로서 이 땅을 걸으셨을 때 모든 폭풍이 그분을 반대했지만, 그분은 항상 강하게 견디셨다. 하나님의 증거는 절대 위험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늘날과도 같다. 그리스도의 완벽한 인성을 가진 구세주로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복된 이들만이 이런 널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인성을 가진 이런 널판이라 하더라도 신성을 대표하는 금으로 덮여야 한다(출 26:29).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외의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다가 삶을 낭비해 그들이 목표했던 10큐빗에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역, 봉사, 성도들에 대해 사랑과 긍휼을 보임으로 그들의 여러 달란트를 개발한다. 이 모든 것은 교회에 필요한 축복이다. 하지만 그들이 금으로 덮여 있지 않다면 오만이 시작할 것이고, 그들을 망칠 것이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우리와 우리의 은사에 관심을 끌게 한다면 금의 심각한 부족임이 틀림없다. 교회는 어떤 특정한 누구의 사역이 드러나는 교회가 될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돼야 한다. 교회는 우리의 은사를 전람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전람하는 것이다. 오, 우리가 금의 덮개가 얼마나 필요한지!
1.5큐빗 넓이
모든 널판은 1.5큐빗 넓이였다(출 26:16). 1.5큐빗은 3큐빗이 되는 두 널판이 합쳐질 때까지 홀수처럼 보인다. 성경에서 숫자 3은 트라이윤 하나님을 대표한다. 이것은 한 널판만으로 하나님을 절대 만족케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가 완전한 3큐빗이 될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 건축될 또 다른 널판이 필요하다.
우리가 최대한으로 그리스도의 것 모든 것과 주님과 교회와 그리고 성경을 사랑할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 만족케 하는 교회가 될 수 없다. 영적으로 성숙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주님은 언젠가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또 사도 바울 역시 교회에 편지했다.
“내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7)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이것이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유다. 우리는 우리로서는 불완전하다. 우리 각자가 또 다른 1.5큐빗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주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멋진 영웅이 되길 원한다. 우리는 젊은이의 캠프에서 활동하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성도들을 방문하고, 소그룹의 리더가 되고, 찬양을 지휘하고, 사람들을 이끌고, 성경을 가르치기를 원한다. 하지만 성막의 널판은 우리가 우리의 너비를 알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1.5큐빗의 너비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할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가 우리의 너비가 얼마인지를 배운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명을 보호받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부담을 나눌 수 있는 이들을 찾고 그들과 교제하려고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두 촉과 은 밑받침 40개
주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한 널빤지에 촉 두 개를 내되 서로 맞닿도록 가지런히 내고 성막의 모든 널빤지를 위해 그와 같이 만들지니라. 너는 성막에 쓰기 위해 널빤지들을 만들되 남쪽을 향한 남쪽 면에 널빤지 스무 개를 만들고 그 스무 개의 널빤지 밑에 은으로 밑받침 마흔 개를 만들지니 곧 이 널빤지 밑에도 그것의 두 촉을 위해 밑받침 두 개를 만들고 저 널빤지 밑에도 그것의 두 촉을 위해 밑받침 두 개를 만들지니라.”(출 26:17-19)
똑같다고는 말하기가 어렵지만 각 널판은 두 촉, 갈고리, 두 은 밑받침, 그리고 각 널판에 각각 한 촉이 있다. 우리는 널판이 촉과 밑받침을 함께 연결해야 성막이 더 강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다. 우리 각자가 완전한 3큐빗을 만드는 데 또 다른 널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성경은 또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오직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입증할지니라. 그리하면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만 기쁨을 누리리니 이는 각 사람이 자기 짐을 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갈 6:4-5)
우리는 우리 각자가 우리의 생활과 사역과 관련해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다행히 우리는 우리의 성공을 가로막지 않는다. 이런 경우가 있었다면 우리는 모두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의 일어섬은 두 은 밑받침에 달려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과 구원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믿은 그 날 구속의 밑받침으로 한 발 내디뎠다. 그리고 다른 한 발은 우리가 그분의 계속되는 구원을 체험함으로 날마다 구원의 밑받침으로 내디딘다. 이 구원은 우리가 계속 그분의 생명으로 구원받아오기 때문에 아주 유기적이다(롬 5:10).
가끔 우리가 무서운 일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영원한 구속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충분히 자라지 못하고 있다고 알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유기적 구원으로 그분을 찬양할 수 있다. 우리가 엉망일 때 우리는 스스로 그분의 구원 안에 있는 그분 앞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증거를 위해 설 때 우리는 우리 각자가 1.5큐빗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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