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서리 널판
“너는 서쪽을 향한 성막의 면들에 쓰기 위해 널빤지 여섯 개를 만들고 두 면에 있는 성막의 모서리들에 쓰기 위해 널빤지 두 개를 만들어서 그것들을 밑에서 함께 연결하고 그것의 머리 위에서 한 고리에 함께 연결하여 그것들 두 개를 다 그와 같이 만들고 그것들이 두 모서리가 되게 할지니라.”(출 26:22–24)
성막 뒤쪽의 두 모서리 널판은 특별했다. 그 널판들은 다른 모든 널판과 다른 어떤 방법으로 만들어졌고, 모든 구조물을 잡아매는 데 아주 필수적이었다. 그 널판이 없이 각 벽은 완성될 수 있었지만, 서로를 연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강한 바람이 쉽게 모든 것을 날려버렸을 것이다.
뒤쪽 대부분에 만들어진 6개의 기본 널판은 각각 1.5큐빗의 넓이였다. 그러므로 그것들 모두 9큐빗으로 만들어졌을 뿐이다. 성막 후면이 10큐빗 넓이였기 때문에 미치지 못하는 큐빗은 두 모서리 널판 사이에 틈이 있게 되었고, 각 틈을 메우기 위해 0.5큐빗 넓이로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다른 널판들과 똑같이 10큐빗 높이였다. 우리가 이처럼 높고, 넓은 널판이 약할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우리에 이런 널판이 왠지 힘을 두 배로 더해 주었다고 말한다. 만은 학자가 어떻게 이 두 배의 힘을 갖게 되고, 또 그 널판이 어떤 모습인지에 골똘하게 생각했지만, 우리의 관심은 영적인 의미를 더 가져야 한다.
이 두 모서리 널판은 하나님에 의해 교회 건물에서 사용하신 모퉁잇돌과 비슷하다. 이 모퉁잇돌은 유일하신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한 건물 안으로 유대인들과 이방 믿는 이들의 두 벽을 연결하신다(엡 2:20). 하지만 성막에서 사용된 모서리 널판은 단순한 그리스도가 아니다. 모서리 널판은 두 배의 힘이 더해졌다. 이 두 배의 힘은 모서리 널판이 신성과 인성이 합해진 것을 가리킨다. 모서리 널판은 하나님과 사람의 결합이다. 성경은 “그것들을 밑에서 함께 연결하고 그것의 머리 위에서 한 고리에 함께 연결하여 그것들 두 개를 다 그와 같이 만들고 그것들이 두 모서리가 되게 할지니라.”(출 26:24)고 말한다. “함께 연결했다”는 단어는 모서리 널판이 실제로 두 널판이고,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결합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축복을 포함함
모든 교회는 모서리 널판을 가져야 한다. 모서리 널판은 빈번히 교회와 교회의 증거를 위한 형제들과 자매들의 책임이다. 형제들과 자매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위해 생명 안에서 자라고, 진리를 알고,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일어선다.
이 널판 없으면 모서리에 간격이 있다. 이 널판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가져오시는 은혜가 유지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날려버린다. “모서리 널판”인 형제들과 자매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준비하신 축복을 얻는 방법과 이 날려버리는 것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 안다. 그들이 느끼는 것을 특별하게 말하는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그들은 성도들 가운데 실제를 이루기 위해 그 말에 협력하는 방법을 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시는 것을 그들이 본다면 그들은 순간을 포착해 성도들을 동원하는 방법을 안다. 이와 같은 모서리 널판이 없다면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것처럼 아무도 하나님의 축복을 의식하지 못할 것이고, 더군다나 그것을 멋지게 활용도 못 할 것이다. 모서리 널판이 있는 교회는 축복받은 교회다.
또한, 모서리 널판은 마침내 고통과 혼란에서 교회를 보호한다. 모서리 널판 때문에 벽은 연결되었고, 교회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일어설 수 있다. 교회사는 핍박 가운데서 성도들을 강하게 격려하는 형제들과 자매들, 즉 모서리 널판의 예로 가득하다. 그들은 집이 비가 오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 바위 위에 세운 것을 확신하는 이들이다(마 7:25).
연결되고 연합됨
다비번역성경은 이 모서리 널판을 설명하기 위해 두 단어 “연결했고, 연합했다”를 사용한다(출 26:23–24).
Two boards shalt thou make for the corners of the tabernacle at the rear; and they shall be joined beneath, and together shall be united at the top thereof to one ring: thus shall it be for them both; they shall be for the two corners.
다비에 따라 두 널판은 중앙에 있는 금 고리로 바닥에 연결해서 꼭대기에 이었다. 금 고리는 이 널판이 금칠을 한 막대기로 다른 뒤의 널판에 붙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구약성경 성막에 있는 것과 같은 그림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그것을 오늘날 교회에서 모서리 널판이라고 적용할 때 그것은 심오한 것이다.
모든 주의 종은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살아간다. 주님과 연결되는 것은 삶 속에서 주님과 단단하고, 갈라놓을 수 없도록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것으로 아주 풍성한 모서리 널판, 형제들과 자매들을 만든다. 연합한 것은 실행 가운데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이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모는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시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과 일치하는 행동을 하는지를 정확하게 안다. 연결되는 것은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요, 연합하는 것은 겉에서 행하는 것이다. 둘 다 주님께 엄격(단단히)하게 묶였다.
모든 사람은 겉과 속이 있다. 우리의 속은 우리가 그 속을 항상 감시하고 보호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알기 어렵다. 몇 년 동안 결혼생활을 한 후에도 부부가 서로의 속마음을 정말 알고 있는지 말하기란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서로 “연결된” 이 모서리 널판인 형제들과 자매들은 주님께서 그들의 속마음을 아는 것처럼 주님 속마음을 안다. 사실상 그들과 주님은 이 속생명 안에서 하나다. 반면에, 우리의 겉은 모든 사람에게 모일 수 있고,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지를 쉽게 알려진다. 서로 “연합된” 모서리 널판인 형제들, 자매들은 주님과 일치하는 것을 행한다. 주님께서 하는 것을 그들이 행한다.
우리 누군가가 내적으로 주님께 연결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서 특정한 방법으로 우리를 이끄셨다고 말한다면 누군가는 그 말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우리가 겉으로 행하는 무엇이든 주의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일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 15:5)
그분께서 거하심 없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우리가 속사람이 주님께 연결되지 못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도들에게 적절한 지시를 하고, 겉으로 행동을 하도록 할 수 있을까? 속으로 주님께 연결되는 이유는 아주 본질적인 것이다(고전 6:17).
중앙에 있는 고리는 꼭대기와 바닥에 있는 모서리 널판을 나눈다. 하지만 그것은 꼭대기와 바닥 널판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 꼭대기와 바닥은 같은 널판 일부분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겉에서 속을 나눌 수 없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숨겨진 것이지만 우리 겉에 있는 것과 일치하고 보일 수 있다. 우리는 한 인격이다. 바울은 기록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리라.”(골 3:4)
분명하게 바울은 주의 재림에 대해 기록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이 나타나실 때 그분과 함께 영광 안으로 모서리 널판이 나타날 것을 말했다. 모서리 널판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성도들과 교회에 영향을 주는 모든 지시와 행동 가운데 있는 그들의 생활이시라는 것을 드러낸다.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사역을 갖기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풍성한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사역을 진지하게 계발하는 데 이 사역은 어떤 이가 통제하기 어려울 수 있는 축복이다. 모서리 널판은 하나님의 증거를 건축하기 위한 것이요, 성도의 완전함을 위한 것이지만 사역을 가진 이들이 그들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쉽다. 그들의 사역은 선하고, 풍성한 것이고 성도들로 필요했던 것이지만, 너무 많이 일으켜진다면 그 사역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중심(포커스)가 될 수 있다. 모서리 널판이 복수라는 것이 아주 좋다. 모서리 널판은 적어도 2를 의미한다. 사역은 단독으로는 있을 수 없다. 사역은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모든 사역과 함께 있어야 한다.
두 모서리 널판들은 각각 0.5 넓이였고, 아무리 선하고, 영적이고, 풍성한 사역이더라도 모서리 널판인 형제들과 자매들이 교회, 그리스도의 인도, 성도들을 대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다른 널판은 1.5큐빗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0.5큐빗일 뿐이다. 모서리 널판인 형제들과 자매들은 성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들이라는 것을 느껴야 한다(엡 3:8).
젊은 성도들을 돌보기
아가서 8장에 주님과 그분의 사랑하는 이의 달콤한 대화가 있다. 그 주의 사랑하는 이는 주님과 합병되고, 그분께 순종하고, 주님에 의해 성숙하고, 그리고 주님을 체험한 믿는 이다. 아가서 8:8절에는 한 질문이 있다.
“우리에게 작은 누이가 있는데 그녀에게는 젖가슴이 없도다. 우리 누이가 청혼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할까?”
하나님은 작은 누이에게 관심을 두셨고, 아직 삶이 성숙하지 못한 믿는 이는 연약하고 어리다. 아가서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한 추구자와 성숙한 이는 성막에서 틀림없이 모서리 널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성숙한 이의 관심은 어떤 종류의 널판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영적인 사람이 될까, 어떻게 자신의 사역을 해낼까, 어떻게 주님을 증거할까에 있지 않다. 오히려 성숙한 이는 어떻게 주님을 위하고, 어린 성도들, 약한 성도들을 먹이고, 양육하고, 돌보는 일에 관심이 있다. 이것이 성숙한 이가 주님께 답하는 이유이다.
“나는 성벽이요, 내 젖가슴은 망대들 같으니 그런즉 내가 그분의 눈에 은총을 입은 자 같구나.”(아 8:10)
젊은이들의 성장이 모서리 널판의 감싸줌, 보호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여기에 성령의 사역으로 산출된 금등대의 증거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하고 신성한 생명의 공급이 있다. 하지만 어리고 약한 이들은 모서리 널판의 보호를 감사하지 않고, 이런 보호에 머무는 방법을 모를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떠나게 할 의도를 가진 사탄의 모든 유혹에 직면할 수 있다. 아가서에서 그 때에 사랑이 넘치는 그리스도는 이 어린 성도를 보러 오시고, 그들을 돌보고, 그들을 얻으신다.
성막이 건축되고, 합당하게 세워지기 위해 이 두 모서리 널판이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숫자 2는 증거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모서리 널판인 형제들과 자매들이 둘보다 더 많을 수 있다. 그들은 기둥으로서 함께 세워지고, 안정감을 주고, 교회를 축복한다. 우리는 모두 모서리 널판이 되기를 열망해야 한다. 그래서 내적으로, 외적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이들은 그분께서 하시는 것처럼 성도들을 돌보고, 교회를 돌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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