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모세

두 가리개와 한 휘장(2)

Hernhut 2018. 4. 23. 23:00

 

세 입구

 

바깥마당에 하나, 성소에 하나, 그리고 지성소에 하나가 있는 세 입구는 교회 생활 속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성장하도록 세 단계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대표한다.

첫 번째 가리개를 통과하도록 첫 번째 단계 안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은 심판적인 구속이다. 회복된 모든 이는 생명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된다.

사도 요한은 기록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그런즉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요일 3:1)

두 번째 가리개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은 유기적 구원이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본성 안에서 하나님과 섞이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두 번째 가리개를 통과하려 하지 않는다. 성소에 들어가려는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제사장이 될 필요가 있고, 그분만을 섬기려고 구별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항상 바깥마당에 있는 바깥에 있을 것이다.

새로 남처럼 우리의 회복은 미성숙으로 시작한 새 생명을 우리에게 주었다. 아기 같은 우리는 성장과 성숙이 필요하다.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 우리는 신성한 본성에 참여한다(벧후 1:4).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장은 우리가 그분과 하나 되는 이유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나고 많은 체험을 통해 우리는 본성 안에서 그분과 섞이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세 번째 단계로 가 휘장을 통과하는 것은 지성소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 체험은 하나님의 인격 안에서 그분과 합병된 그리스도인들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다. 휘장은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과 직접 교제를 하는 지성소에 있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위해 중보하고, 그들을 대신해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듣는 곳에 있었다.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한 부부를 생각한다면 인격 안에서 서로를 중보 한다는 것이 훨씬 쉽게 이해가 된다. 이처럼 부부는 거의 똑같아 보인다. 그들은 서로를 잘 안다. 서로 다른 것을 갈망하는지, 사랑이 식은 행동을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남편이 좋아하는 것,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안다. 남편이 관심 두는 것에 대해 아내도 관심을 둔다. 왜냐면 부부는 그들의 인격 안에서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같은 생명, 같은 본성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인격 안에서 서로를 중보한다. 이와 같은 친밀한 관계에 이르도록 성가신 결혼생활을 여러 해 동안 한다. 그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지성소 안에서 주님과 함께 생명을 누리려고 오랫동안 주님과 고군분투한다.

 

휘장예술적인 솜씨

 

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되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히 짜고 금 갈고리로 네 기둥 위에 드리우되 그 네 기둥을 아카시아(싯팀)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받침 위에 둘지며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휘장 안에 들여 놓으라.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26:31-33).

원칙적으로 휘장은 커튼과 같은 재료로 구성되었다. 다른 것은 휘장 위에 예술적인 솜씨로 수놓아진 그룹(케루빔)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바깥마당을 대표한 심판적인 구속 이상이요, 성소를 대표한 유기적 구원보다 훨씬 이상이다.

 

지성소를 들어가는 것은 능숙한 솜씨를 요구함

 

많은 성경 번역은 이 휘장은 능숙한 일꾼의 일과 같은 어떤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휘장이라는 번역은 다비번역을 따르는 것이 더 낫다.

“And thou shalt make a veil of blue, and purple, and scarlet, and twined byssus; of artistic work shall it be made, with cherubim”.

다비번역은 휘장이 능숙한 솜씨로 만들어졌다고 기록했다. 다비번역은 정확하게 히브리어가 의미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요, 또한 영을 파악하게 한다.

하나님은 이 귀중한 작품을 갈망하신다. 어떤 이가 온 물질적인 우주가 신성한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교회와 교회의 각 지체를 통해 전람된 그분의 작품을 보기 원하신다.

바울은 기록했다.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창조된 자들이니라.”(2:10)

결국, 우리 각자는 우리 온 생애를 되돌아보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 생활은 놀라운 여정이었어. 내가 시작한 곳을 봐. 하나님께서 나를 이끄신 곳을 봐. 정말 그분께서 산출하신 귀중한 작품이야! 하나님께 영광을......!”

 

케루빔사람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사역

 

케루빔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들이요, 심지어 최고위 천사다. 에스겔에 있는 네 생물(살아있는 창조물)은 케루빔이다(10:15, 20). 그들은 하나님 그분을 흠모하고, 하나님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4:8)라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는 말은 하나님만을, 하나님만을, 하나님만을!”을 의미한다.

이 케루빔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수행하려고 움직인다. 그것은 각 생물이 네 얼굴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1:10). 네 얼굴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네 방면을 대표하고, 교회, 그리스도의 몸이 전달해야 할 기본적인 네 약속을 가리킨다.

마태복음은 그리스도가 왕이심 즉 사자로 표현된다.

마가복음은 그리스도가 노예이심 즉 소로 표현된다.

누가복음은 그리스도가 사람이심 즉 사람으로 표현된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 즉 독수리로 표현된다.

살아있는 네 생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흠모하고, 또한 그분의 경륜 안에서 선택된 하나님의 사람들과 합병한다. 그들은 하늘에 속한 것을 보도록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끌고(1:22), 그리스도 그분께로 인도한다(1:26). 그런 다음 그들은 그들의 덮는 날개를 대표한 하나님의 따스함, 다정하심, 그리고 은혜로움 안에서 하나님과의 모든 종류의 교통 안으로 우리를 이끈다.

사람의 얼굴은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 본성, 심지어 그리스도의 인격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형상뿐만 아니라 모양으로 참된 사람을 산출하기 위해 우리에게 사역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사자의 얼굴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을 위해 싸우도록 격려하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리킨다.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6:12)

소의 얼굴은 우리가 알려지지 않고, 때로는 어렵고, 때로는 감시당하고, 목마르고, 굶주리고, 춥고, 벌거벗기고, 집도 없이 유랑하는 수고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섬김을 가리킨다(고전 4:11, 고후 11:26).

독수리 얼굴은 신성하신 그리스도께서 외부에서 가하는 압박과 힘들게 하는 우리 모든 상황 속에서도 독수리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무엇을 통과한다 할지라도, 얼마나 어두운 것을 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늘에 속한 이들이 될 수 있고, 하늘에 속한 곳에서 주님과 함께 설 수도 있으며, 하늘에 속한 관점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 가장 아름다운 솜씨

 

휘장에 있는 첫 번째 그룹은 그리스도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정교한 솜씨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게 하셨고, 갈릴리에서 가난하게 사시게 하셨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 종교적인 사람들(바리새파), 불신앙의 사람들(사두개파), 유대인 정부에게 핍박받게 하셨다. 그분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셨고, 하데스(지옥)로의 여행을 하셨으며, 우주의 왕이 되시려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셨다. 우리가 이러한 모든 그림을 보게 되면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 지혜로우신 하나님, 강하신 하나님, 편재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만이 이와 같은 솜씨를 산출하실 수 있으시다고 말할 것이다. 그 일은 인격을 가지신 예수님을 통해 그분 자신을 산출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또 다른 정교한 솜씨

 

하지만 휘장에는 한 그룹만 있지 않았다. 첫 번째 그룹이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반면 휘장을 묘사할 때 성경은 케루빔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사람 안에 거듭해서 그리스도를 재생산하시기를 갈망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 우리가 죄인들이지만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고, 그 은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까지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일한다.

얼마나 정교한 솜씬지! 타락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로 시공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처럼 짧은 인생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영원을 추구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를 살아낼 뿐만 아니라 그분을 확대할 수 있다. 전체가 얼마나 놀랍고, 경탄스럽고, 아름다운가! 우리가 교회에 대해 풍성함을 가지고 있다면 케루빔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고, 부르짖고, 흠모할 것이다.

 

휘장을 통한 성장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우리는 바깥마당 안 첫 번째 가리개를 통과함으로 의로워졌다. 그런 후 우리는 그리스도와 신성한 교회 생활을 누리는 두 번째 가리개가 있는 성소에 들어감으로 그분을 따르고, 거룩해졌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증거가 되는 우리의 유일한 목표를 가지고 휘장 앞에 세워지는 금 분향소가 된다. 주님을 찬양하라.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

하나님께서 성막 덮개를 벗기셨을 때 그분은 언약궤에서 시작하셨고, 그분의 길을 가셨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자랄 때 우리는 성막 바깥에서 시작해 가리개와 휘장을 통과하러 우리의 길을 가고, 결국 언약궤와 하나가 된다. 얼마나 놀라운 과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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