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성장의 세 단계
성막은 두 가리개와 한 휘장이 있다. 첫 번째 가리개는 마당 뜰 입구에 있고, 이는 구원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상징한다. 우리가 친구들과 복음을 나눌 때 우리는 실제로 마당 안으로 들어와 이 가리개를 통과하도록 그들을 초대한다. 그들의 믿는 것은 가리개 안으로 그들의 들어감이다. 이것은 우리의 그리스도인 여정에서 우리 각자가 시작하는 새로 남이다.
두 번째 가리개는 성소 입구에 있고, 이는 하나님의 갈망하는 이들 즉 제사장의 성장을 상징한다. 그들이 이 가리개를 통과하면 그들은 놀라운 그리스도 안에서 금촛대로서 교회들의 증거와 진설병에 참여할 수 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소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레위족속의 봉사자들만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그분에 의해 자격을 얻었지만 많은 사람은 성소에서 섬김을 체험하는 것에서 자격을 스스로 박탈했다. 레위사람으로 태어나야 할 문제였다. 우리에게 있어 선택의 문제다. 우리가 전적으로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섬김의 삶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고, 천연적으로 그분과 섞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은 자동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섬기는 제사장으로 구별된 것이다.
세 번째 입구는 가리개로 불리지 않고, 휘장으로 불린다. 지성소로 대제사장들이 들어갈 때 그 휘장을 통과했다. 지성소는 언약(증거)궤에서 하나님 자신이 대제사장을 만나는 곳이었다. 휘장은 하나님께서 그분 앞에서 지속적으로 살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갈망하심을 상징한다.
첫 번째 가리개 — 생명 안에서의 연합
“뜰 문에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가늘게 꼰 아마 실로 바느질을 해서 만든 이십 큐빗의 현수막이 있을 터인데 그것들의 기둥이 네 개, 그것들의 밑받침이 네 개이며”(출 27:16).
바깥마당 문에 있던 가리개는 네 기둥에 20큐빗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20큐빗을 가리려고 5번째 숨은 기둥에 연결했다. 이것은 그 기둥들을 통해 네 입구를 만들었을 것이다. 나머지 벽을 만드는 문 각 옆에 세 기둥이 더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의미가 있다. 네 입구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는 것을 갈망하심”(딤전 2:4)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숫자 “4”는 하나님의 창조 특히 사람 창조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구원을 위해 사방에서 하나님께로 오는 모든 사람을 갈망하신다. 이 구원은 하나님 자신에 의한 공급이다. 숫자 “3”은 하나님을 대표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께 오는 이들에게 그분의 구원을 확약하심을 가리키는 문 옆의 세 기둥을 말할 수 있다. 이 구원은 안전이요, 실패할 수 없다.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우리를 강탈할 수 없다(요 10:28–29).
이 가리개는 10☓2큐빗이었다. 10은 청색, 자주, 주홍색 실, 그리고 고운 아마실의 커튼을 보여주는 완전함을 의미한다. 길쌈하는 이의 모든 일은 완전한 구세주를 묘사한다. 하지만 이 가리개는 2를 곱했다. 이것은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성육신, 인생을 사심, 죽음, 그리고 부활의 과정을 거침으로 구세주로서 그분의 완전을 의미한다.
오늘날 복음 전파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 구원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와 같은 복음 전파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그분의 체험을 나눈다. 그들은 십자가의 원칙 아래에서 외로운 인생을 살고, 그분의 부활 생명을 누린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해 길쌈을 짜시는 분이시고, 자수를 놓는 분이시라면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이 기꺼이 구원받도록 길이 되시려고 길쌈을 짜신다. 우리는 구세주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목소리로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 우리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분의 구원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할 때 그들은 그분을 영접하고, 법리적 구속을 누리는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두 번째 가리개 — 본질 안에서의 섞임
“또 너는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가늘게 꼰 아마 실로 바느질을 해서 장막 문에 달 현수막을 만들고 시팀나무로 그 현수막을 달 기둥 다섯 개를 만들어 그것들을 금으로 입히며 그것들의 갈고리들도 금으로 만들고 또 그 기둥들에 쓰기 위해 밑받침 다섯 개를 놋으로 부어 만들지니라.”(출 26:36-37).
두 번째 가리개는 첫 번째 가리개와 전혀 다르다. 원칙적으로 가리개의 재료는 같다. 하지만 두 번째 가리개는 바깥마당 가리개의 네 기둥과 대조적으로 아카시아(시팀)나무 기둥 다섯 개가 있다.
바깥마당 가리개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상징한다. 아무리 복음이 전파되었어도 그리스도는 숨겨진 다섯 번째 기둥이 필요하다. 다섯 번째 기둥은 교회의 증거(간증)나 구원 안으로 사람들을 데려오는 그리스도인이다.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말했다.
“그런즉 그들이 자기들이 믿지 아니한 분을 어찌 부르리요? 자기들이 듣지 못한 분을 어찌 믿으리요? 선포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그리스도는 문이시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는 그분께서 사람들을 초대하도록 쓰시는 다섯 번째 기둥이 된다.
바깥마당의 가리개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일하도록 숨기신 이를 더하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의의 구속을 누리려고 바깥마당 안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성소의 가리개는 아무것도 숨겨지지 않은 다섯 기둥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만이 성소로 대표된 유기적 구원을 이루실 것을 보여준다. 이 구원은 생명 안에서 우리가 성장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유일하신 사역이다. 떡 상으로 대표된 그리스도와 금등대로 대표된 교회 생활을 통해 이뤄졌다. 그리스도만이 풍성한 유기적 구원이 되도록 우리 안으로 그분 자신을 불어 놓으실 수 있다.
두 번째 가리개의 다섯 기둥은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을 대표하는 금으로 덮여있었기에 여기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교회 생활은 단지 사회적일 수 없다. 우리는 금이 아닌 어떠한 것도 교회 생활 안으로 가져오지 말아야 한다. 교회 생활은 신성한 요소로만 채워져야 한다.
어떤 때 우리의 찬양이 기쁘고, 즐겁고, 어떤 때는 은혜롭고, 감동이 있고, 진지해진다. 전자는 우리를 소리를 높이고, 웃음을 갖게 하고, 후자는 우리를 눈물 흘리게 한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찬양하든 문제가 없다. 가끔 메시지 전달하는 형제가 정말 카리스마적이지만 듣는 이들이 단지 영적인 오락을 누리고, 하나님께로 오지 않는다면 그 메시지는 “시끄러운 징(공)이요, 쨍그랑거리는 꽹과리(심벌즈)”(고전 13:1)일 뿐이다. 그것은 종교적인 것이 되거나 비종교적인 것이 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비종교적인 것이 되려고 하지만 하나님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각 기둥은 금 뚜껑을 꼭대기에 씌웠다(출 36:38). 이것은 모든 증거가 신성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올 때 그들은 그들이 보는 것을 의식해야 하고, 하나님을 느껴야 한다. 각자는 “자기 마음의 은밀한 것들이 이렇게 드러나게 되므로 그가 얼굴을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또 진실로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 고 느껴야 한다(고전 14:25).
다섯 기둥 모두 금 갈고리와 막대기(빗장)이 있다. 이것은 유기적 구원 안에서 섬기고 성장하기를 갈망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과 연합해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를 추구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썼다.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름으로 주님과 연합한 이들과 함께 부정적인 것을 피하고 긍정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 생활이 얼마나 멋진가!
우리가 성소를 대표하는 유기적 구원을 누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순수한 갈망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를 유일한 목표로 세우고, 그리스도를 얻고, 교회 생활을 다스리시는 성령을 살아내야 한다. 물론 너무나 자주 우리가 실패하지만, 우리의 목표와 목적이 옳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첫사랑 그리스도께 빠르게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배운다.
두 번째 가리개의 다섯 기둥은 놋 밑받침 다섯이 있다. 물론 놋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기 때문에 바깥마당에 있는 번제단은 놋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여기의 놋 밑받침은 우리가 아무리 영적이어도 우리의 성장과 건축이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사는 것이 필요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바울은 기록했다.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 너희 가운데 있는 각 사람에게 내가 말하노니 각 사람은 마땅히 생각할 것보다 더 높이 자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나누어 주신대로 맑은 정신으로 생각하라.”(롬 12:3).
바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높여 생각하기 너무 쉽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다. 우리가 특히 잘할 때 놋으로 세워진다는 것을 잊기 쉽다. 우리가 구원으로 몇 명을 인도하고, 우리의 영광스러운 증거로 온 교회가 들썩거린다면 우리 발바닥까지도 금이요, 천사들도 우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후 하나님은 다른 형제들을 통해 우기 자신이 그렇게 높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우리를 상기시키신다. 우리는 여전히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들일 뿐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인 놋에 세워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역시 우리의 구원이다.
휘장—인격 안에서의 합병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람들에게 통과하기 원하시는 입구가 하나 더 있다. 우리가 지성소를 체험하도록 데려가시는 휘장이다. 구약성경에서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씩 이 휘장을 통과할 자격이 있었다. 여기서 대제사장은 하나님 그분 자신 앞에 서서 그분의 신성한 영광의 빛 비춤으로만 깨달았다. 하나님의 빛은 대제사장의 완전한 인격이 하나님과 하나 될 때까지 그에게 주입하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죽음 때부터 대제사장의 체험은 처음 두 단계를 통과해 기꺼이 자라고, 성숙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열렸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졌다고 우리에게 말한다(막 15:38). 이것은 지성소 앞을 차단했던 휘장이었다. 유대인들은 육체적인 휘장으로 수리했을 수도 있었지만, 영적인 휘장은 여전히 열려 있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절대 다시 닫히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 모두 앞으로 나아오기를 격려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의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 우리 마음이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우리가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 10:19-20, 22)
주님을 찬양하자! 우리 모두 그 앞으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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