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복음칼럼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

Hernhut 2016. 6. 1. 10:18


 

심정이라고 표현해 놓았지만 이 단어는 도타운 사랑, 동정, 애정, 긍휼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우리말에 더 좋을 듯싶다. 헬라어 스플랑크논splagchnon은 동정의 느낌을 가장 강하게 나타내는 단어요, 느끼는 위치 즉 내면을 나타내는 단어다. “스플랑크논splagchnon는 또 내적인 애정, 깊은 자비, 동정 등을 의미한다.

주님은 우리를 내적인 애정으로 사랑하신다. 이것은 깊은 긍휼을 포함하는 사랑이다. 주님께서 긍휼하심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는 아마 불로 심판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긍휼하시고, 동정이 있으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난 너를 이해한다. 난 네가 겪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

주님은 죄가 없으셨고, 육체를 따라 세상을 사랑하시고 사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완전히 이해하실 수 있으셨다는 것에 궁금해 한다. 하지만 주님은 그분께서 긍휼과 동정이 가득하시기 때문에 이해하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분께 올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르기 원하지만 우리가 자격이 없음과 부끄럼을 느끼기 때문에 엄두도 못 낼 때 주님은 깊고도 깊은 긍휼과 동정을 가지시고 계신다. 그분의 내적부분은 애정, 도타운 사랑으로 채워져 있다. 그분은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을 사랑하시고 아시고 계신다. 그분은 긍휼은 우리의 필요를 따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항상 은혜를 위해 그분께 올 수 있다.

빌립보 성도들과 바울의 관계는 천연적인 애정이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가장 깊숙한 존재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은 성도들을 향한 가장 깊은 것이었다. 우리가 천연적인 애정을 따라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사랑은 그들이나 그들이 행한 것에 영향을 받는다.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스런 돌봄은 주님의 깊은 내적부분을 따른 것이어야 한다.

바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내적부분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갈망하신 그 갈망으로 빌립보 성도들을 갈망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천연적인 애정으로 절대 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주님 안에서 거하기를 추구하고, 주님의 깊고 깊은 부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