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돌봄은 부담을 따른 것이 되지 말아야 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내적부분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내적부분에서 빌립보 성도들을 갈망한 방법은 우리에게도 같은 패턴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우리가 섬기는 성도들이 변화되기를 바라지만 그들이 변화되지 않아 좌절한다. 그들을 위한 우리의 관점은 옳을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을 옳지 못하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내적부분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큰 비결을 배웠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 없이 영적인 일을 행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돌봄에서 특별하다. 성도들이 섬김을 받는 것과 다르게 섬기려고 할 때 우리는 정말 부담을 갖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위한 아주 많은 체험이 있다. 또 우리는 우리의 표준에 그들이 이르게 하려고 한다. 우리가 옳을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틀린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주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어떤 것이 잘못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내적부분에 왔다면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성도들을 위해 깊은 긍휼과 동정을 찾았을 것이다. 우리가 성도들을 위해 주님의 돌보심을 훈련할 수 있는 것은 이 긍휼과 동정에만 있다.
주님의 내적부분은 사랑, 긍휼, 온유, 동정으로 채워져 있다. 그분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넓으신 분이시다. 우리는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하든지 아니면 그만두든지 해라!”는 식의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절대 섬기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데 긍휼과 온유가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내적부분을 겪지 않은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우리에게 “나는 너무 메말라 보여. 주님께서는 내게 풍성하고 참되신 분이 아니신가봐.”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당신은 오늘 아침에 성경을 읽고, 기도 했나요? 하지 않았죠? 당신이 메마른 것에 놀랄 일이 아니예요. 당신이 풍성치 않은 건 당신 잘못이예요.”라고 말하는가? 그렇다 그가 오늘 아침에 주님과 시간을 가졌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가 영적으로 메말라 있다면 그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우리의 반응은 주님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가? 그가 살아있는 것이 우리의 갈망이지만 우리의 태도는 너무 잘못된 것이다. 이런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내적부분을 만지지 못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던 우리를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성경은 사랑하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깊은 사랑, 긍휼, 동정을 전달한다. 성경은 깊은 사랑, 긍휼, 그리고 동정이 주 예수님께 온다고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말한다. 그분은 우리를 회복하시고, 용서하시고, 치료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긍휼하심과 동정하심을 가지신 대제사장이시다(히 4:14–6, 7:25).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그분은 공급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키시고, 돌보신다. 주의 마음에는 아주 많은 도타운 사랑이 있다. 우리가 주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고, 그분의 내적부분에 깊이 들어 갈 때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얻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깊어지고, 긍휼을 갖게 되고, 동정을 갖게 된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의 내적부분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돌본 사도바울처럼 되게 하소서.
'빵과 음료 > 복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의 사랑이 풍성케 되기를 ...... (0) | 2016.06.02 |
---|---|
풍성한 지식과 안목을 위한 기도 (0) | 2016.06.02 |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갈망 (0) | 2016.06.01 |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 (0) | 2016.06.01 |
우리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나? (0) | 2016.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