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지역교회는 어떤 사도들, 어떤 대언자들, 어떤 복음전파자들, 어떤 목자들와 교사들의 움직임을 통해 사랑 안에서 자라고 건축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어떤”이라는 사용했다. “어떤”은 하나 이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은 사라졌다. 누가 사도인가?”라고 물었다. 이 재밌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바울이 살아있었을 때에도 사도로 수고하고 있었던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사도들 중에 가장 큰 형제였다. 하지만 이제 어떤 사도들, 선지자들, 복음전파자들, 목자들, 그리고 교사들이 되었고, 여전히 있다. 이 “어떤”이라는 단어는 교회생활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많은 압박에서 벗어나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여러분에게 “당신이 대언자인가?”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이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여러분은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이 교회생활에서 사도로서 기능을 한다면 여러분은 그렇게 말하는 것을 어색해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자신 스스로가 여러분의 품위를 떨어뜨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다스림 안에서 그분께서 배열하신 것을 배열하신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안에서 당신이 이런 사람인지, 저런 사람인지, 누구인지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한편으로 아무도 “나는 사도다.”라고 말할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도 “내가 언제가 사도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일으키셔야 하는 것이 아주 정상적이지만 교회 안에서는 지위가 아니고, 움직임과 기능의 문제임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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