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은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창 15:9~10).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그 새들을 아브라함이 쫓았습니다(창 15:11). 이것은 사탄이 우리의 희생을 공격할 것이고, 우리는 믿음으로 사탄을 쫓아내야 함을 상징합니다(약 4:7, 엡 6:16).
창세기 15:17절은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고 말합니다. 우리 삶의 체험에서 우리가 연기 나는 용광로와 불타는 횃불을 지날 수 없습니다.
연기 나는 용광로는 어둠과 어려움을 상징했습니다. 신명기 4:20절은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이집트의 “쇠풀무”에서 노예로서 보내는 오랫동안 어둡고,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불타는 횃불은 빛과 영광을 대표합니다. 연기 나는 용광로와 어둠과 어려움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우리의 체험에서 우리는 용광로와 횃불이 있습니다. 우리가 저녁과 아침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도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 여자들은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후 사울은 다윗을 전쟁터에서 병사들을 이끌도록 했으며, 사울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지 모릅니다. 그 당시 그가 불타는 횃불을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높은 영 안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불타는 횃불체험이 급속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질투하게 되었고,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수년 동안 숨어서 보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연기 나는 체험이었습니다.
우리 체험도 같은 것입니다. 때로는 일들이 부드럽게 갑니다. 우리의 의기가 충전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다른 때에 우리는 힘겹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엔 우리가 밤중에도 평화로이 휴식을 취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횃불과 용광로에 대한 체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감이 넘칠 때 우리는 연기 나는 용광로에 대해 준비되어야 합니다. 일들이 어려울 때 우리는 마음을 잃지 말고, 불타는 횃불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연기 나는 용광로와 불타는 횃불의 순환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타는 횃불에 너무 감격하거나 연기 나는 용광로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크든 작든 우리는 즉시 횃불이나 풀무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용광로는 횃불을 위한 것이고, 횃불은 용광로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평화롭고, 주님의 임재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면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특별하게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체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어려움과 역경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6)고 하신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계 3:15~16)라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차든지 덥던지 분명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뜨겁다면 우리는 주님에 대한 느낌과 열심히 가득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합니다. 우리가 차갑다면 우리는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미지근하다면 우리는 종교적이고,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성장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다루시는 주님에 위한 용광로와 횃불을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쓰임 받는 그릇으로 만들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교회생활에서 성장하고, 또 새로운 사람들이 오고 있다면 거기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교회생활은 우리가 용광로와 횃불에 대한 많은 체험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생활이 단지 모이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미지근하게 되고, 끝나게 됩니다.
용광로와 횃불에 대한 체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전진하게 합니다. 위 아래로 움직이는 모양은 사실상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적으로 용광로와 횃불에 대한 체험을 한다면 주님의 손에 쓰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기 나는 용광로의 어려움을 통과하고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훈련하시는 손을 인정해야 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 12:11). 우리가 우리를 훈련하시는 주님의 손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절대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횃불과 마찬가지로 용광로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축복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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