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교회

주의 만찬

Hernhut 2013. 4. 16. 15:30

 

 

 

합당한 시간과 주의 만찬의 빈도수

언제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만찬에서 예수의 죽으심을 기억해야 할까요? 우리는 주의 날이나 일곱 번째 날에 만찬을 해야 하나요? 교파들은 누룩 없는 빵, 포도주를 가지고 매주, 매달, 혹은 분기별, 1년에 한 번씩 실행할지 모릅니다. 이 연구는 시간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주의 상에 참여하는 빈도수에 대한 가르침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서론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위한 합당한 시간과 빈도수는 어떻게 됩니까? 어떤 종교적인 무리들은 주의 날을 믿기 때문에 주일(일요일)에 만찬을 갖고, 다른 어떤 무리들은 일주일의 마지막 날에 주의 만찬을 가졌기 때문에 안식일에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다른 이들은 매달, 분기별, 연도별, 혹은 특별한 거룩한 날이나 그들이 좋다고 느낄 때 언제든지 갖습니다. 또 어떤 무리들은 주중에 만찬을 갖습니다.

여기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성경적 대답을 갖게 될 것입니다.

 

(1) 얼마나 자주, 언제 우리가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를 가져야 합니까?

(2) 주의 만찬에 대한 시간과 빈도수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I. 배경소개

 

A. 성경의 권위에 대한 원리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것에 대해 성경적인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그것을 가르침 받은 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섬김을 실행하는 데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실행을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마치 그분께서 말씀하시고 그것을 바꾸시지 않으시는 것을 기꺼이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며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니라.”(15:9)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배가 사람의 교리에 바탕에 둔 것이라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영역에서 이 말씀이 적용됨을 명심하십시오. 예를 들어 요즘 기독교회들마다 유행처럼 번지는 여성 목사, 장로를 세우고, 함부로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 분파하고 분당하는 것들, 세습하는 것, 교회 건물에 목숨 거는 것, 맘몬주의, 정치참여, 목사들의 맹목적 권위발휘, 성직자와 성도들을 경계를 긋는 것, 목사들의 성 추태, 등은 한국교회 중심을 파고드는 암적 존재이며, 악의 축입니다. 글을 쓰면서도 다른 곳으로 흘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기독교에서 사라져야하는 분명한 사탄의 누룩이요, 전략이요, 궤술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도 싫어하거나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거나 더 적극적으로 비난내지는 이단으로 몰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예방접종을 받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한 것 같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가 받아들인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1:8~9)

나는 이 메시지를 쓰면서 주님께 나아갑니다. 진정한 진리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파나 교단에서 실행하는 것이 진리에 맞지 않더라도 그대로 그것을 인정하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들과의 교제가 끊어지면 자신이 도태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들의 시류에 편승되어 갑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비춰보면 이것은 편승해 가는 자들이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가르침을 받은 복음보다 다른 어떤 것들을 가르친다면 이미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며 그리스도의 교리<역자: 복음>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없고 그리스도의 교리<역자: 복음>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아버지][아들]이 둘 다 있느니라.”(요이 1:9)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에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가지지 못한 것이요, 하나님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깁니까? 나는 후배들이 목사를 하기 위해 신학대학에 간다고 했을 때 형제, 자네가 신학을 한다고 하면 말리지 않네. 하지만 복음 이외의 것을 가르치지도 또 그들에게 끌려가지는 말게나. 그리고 만일 자네가 교회나 하나님의 사역을 놓았을 때에는 목사로서 살지 않는 것이기에 망설임도 없이 목사직을 내려놓고 성도로서 섬기기를 기뻐하시게.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이라네.’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의 목사들이 성도로서 주를 섬기기를 두려워합니다. 권위를 갖기 좋아하고 너무 가르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적 권위는 직책이나 직분이 아니라 성경을 따르고 성경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완전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기 원하시는 모든 것으로 완벽하게 안내 합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분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자기가 들을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16:13)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해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도다.”(벧후 1:3)

우리는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 실행에 있어서 다른 복음으로 실행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들을 실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실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특별히 금지하도록 하는 구절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행하도록 말씀하실 때 마치 그분께서 다른 것을 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그렇다할지라도 우리가 어떤 다른 것을 실행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그분께서 한 가지 것을 실행하도록 말씀하시고 우리는 다른 것을 행하고 인간의 교리를 따르고 성경에 없고 사도들이 가르치지 않은 다른 복음을 따른다면 우리의 경배는 헛된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자입니다.

 

왜 우리는 주님의 상에 우유와 양고기나 소고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누룩 없는 빵(효모로 부풀리지 않은 빵)과 포도나무의 열매의 즙(발효된 포도주)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침례를 줄 때 물을 붇거나 뿌리지 말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침례 가운데 매장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어린 아이들의 침례를 하지 않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침례를 받기 이전에 복음을 이해하고 믿고 회개하고 또 고백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과 다른 많은 실행들은 비록 그것들을 분명하게 금지하는 구절들이 없다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들이 성경적인 권위가 아니기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성경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의 만찬을 어느 날에 가져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찾지만 우리가 다른 날에 주의 만찬을 실행한다면 우리는 인간적인 권세로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원칙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권세를 따르는 원칙은 이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다른 주제들의 본질입니다. 명령하지도 직접적인 말씀도 하지 않지만 예들과 필요한 추론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 거하는 우리는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말하는 것을 따를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을 본과 이유로 가르친 것은 다른 때입니다.

참으로 너희가 심지어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나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가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 2:21)

예수님은 본을 남기셨습니다. 그 본은 우리가 그분의 발걸음을 따라야 하는 예입니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에서 벗어나 있지만 오늘날 많은 교파들의 전통, 교리, 틀에 박힌 생각에서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가려고 하는 길을 자신들의 방법으로 정죄하는 것을 볼 때 많은 슬픔이 밀려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따르는 자가 되고 또 너희가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 같이 그렇게 걷는 자들을 주목하라.”(3:17)

너희는 내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들을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4:9)

바울은 본보기처럼 따르도록 한 예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들은 것들 뿐만 아니라 바울 안에서 볼 수 있었던 것들을 행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 교파의 교리를 가르친다면 온전하고 합당한 교회는 아무리 벽에 부딪치더라도 그리스도와 성경의 이름으로 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유대 성전에서 제물을 사고팔고 돈 바꾸는 일을 할 때 상을 엎으신 일에서 우리를 경고 하셨습니다(21:12~17). 우리가 오늘날 삶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 11:1)

바울이 그리스도를 따랐던 것처럼 바울을 따르십시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니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느니라.”(5:14)

성경으로부터 배운 모든 공과들은 단순하고 상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연구를 함으로서 우리의 감각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합당한 결론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교파와 그 교리, 사람들의 가르침을 통해 교회가 건축되어 간다면 아직도 그들이 하나님을 갖지 않은 자들이요, 단지 모양만이 거룩한 생활을 하는 기만적 행위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아무리 신학박사, 신학교수, 성경해석가라도 말입니다.

 

이제 그들이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지나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으므로 바울이 자기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 세 안식일에 성경 기록들을 인용하여 그들과 토론하며 설명하고 주장하여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났어야 한다 하고 또한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 하니”(17:1~3)

바울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을 성경에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을 분발시키지만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성경구절에서 행해진 것입니다(22:23~32, 7:11~25, 19:3~9). 그리하여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비록 그 자체의 결론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을지라도 말한 것으로부터 반드시 뒤따르는 것을 본보기와 이유로 계시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한 어떤 구절을 연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또한 대한 다른 구절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진실로 모세가 조상들에게 이르되, []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너희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그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너희는 모든 일에서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그 대언자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는 모든 혼은 백성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리라, 하였고”(3:22~23)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모든 것들을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예수와 그분의 말씀 곧 성경외의 것이 교회나 믿음의 가정에 들어온다면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에 마귀가 그분을 데리고 거룩한 도시로 올라가 성전 꼭대기에 그분을 세우고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관한 책무를 주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또 기록된바, 너는 []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4:4~7)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육체적인 음식을 소홀히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양식으로 사는 영적인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마귀가 어떤 구절을 인용했을 때 예수님은 마귀가 먼저 인용한 구절을 남용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또 다른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면에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실행하는 그분의 백성들을 받아들였다고 보여주는 구절을 안 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여 실행하는 그들을 받아드리셨다는 것을 또 다른 구절에서 알게 됩니다. 우리는 다 이룬 방식이 문제를 이룬 것이 아니라고 결론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제를 갖고, 덧붙이고, 또 어떤 것을 실행하기 위해 계시된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음을 아는 모든 지식을 취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따라야 하는 유형입니다.

B. 성경적인 기념일과 잔치에 관한 관점

주님의 만찬은 기념적인 잔치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죽으심에 참여합니다(26:26~75, 고전 11:23~34).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의 기념과 잔치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것들은 오늘날까지 유효하지 않습니다(10:9~10, 3:23~24, 5:1~4, 2:14~16). 하지만 구약성경의 기록은 어떤 유용한 공과들로 우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15:4, 고전 10:1~12).

 

하나님은 언제든지 자신께 경배 가운데 특별한 기념이나 잔치를 하도록 허락하셨고 그분은 항상 언제 얼마나 자주 그것을 행할지를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념적인 잔치를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분한 가치가 있었고 또 그것을 실행할 때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분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에 대해 어떤 예외가 없습니다.

 

유월절- 출애굽기 12:6, 14, 24~51절에서

매년 첫 달 14일에 행하도록 말씀되었습니다.

나팔절- 레위기 23:24절에서 매년 71일에 행하도록 명령되었습니다.

속죄제- 레위기 23:27절에서 매년 710일에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장막절- 레위기 23:39~44절에서 매년 715일에 행하고돌 하셨습니다.

안식일- 출애굽기 20:8~11절에서 매주 일곱째 날에 거행하게 하셨습니다.

주의 만찬- 사도행전 20:7절에서 매주 첫날에 행했습니다.

 

하지만 주의 만찬을 제외하고 모든 기념일이나 잔칫날은 율법에 의한 것이요, 또 옛 언약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새 언약의 시대가 2,000년 전에 일어났기에 새 언약의 기념과 잔칫날을 실행해야 한다는 엄연한 근거가 있습니다. 어떤 무리들은 안식일을 한 주의 마지막 날에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새 언약의 사람들이라면 주의 만찬을 포함해 주의 날을 주일 곧 한 주의 첫날에 실행하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먹고 마시기 위해 특별한 시간과 특정한 빈도수를 갖지 않고 실행한다면 하나님의 정해진 기념일이나 잔칫날 중의 유일한 것을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새 언약에서의 주의 날과 주의 만찬을 누리는 것은 역사가운데 있는 가장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왜 기념하도록 하고 그것을 실행하도록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할까요? 왜 때에 관해 기준선을 남기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우리는 우리가 주의 만찬을 가질 때 우리에게 말하는 신약성경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념일을 준수할 날을 말씀하실 때 얼마나 자주 실행해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의 본을 이미 기록한 것을 보십시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단순하게 그것을 실행하도록 말씀하시지만 백성들은 그것을 얼마나 자주 실행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들은 지정된 날을 시작부터 끝까지 그것을 수행했습니다.

 

잔칫날이나 기념일이 모년모월모시에 시작되었더라면 사람들은 매년 그 시간이 될 때마다 수행했을 것입니다. 또 모월모일에 실행되도록 말했더라면 모월모일이 시작될 때마다 준수되었을 것이요, 그리하여 한 달에 한 번씩 실행해야 했을 것입니다.

“[]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일하는 엿새 동안에는 동쪽을 바라보는 안뜰의 문을 닫되 안식일에는 그것을 열며 월삭인 날에도 열지니라.”(46:1)

월삭인 날에는 그것이 흠 없는 어린 수소 한 마리와 어린양 여섯 마리와 숫양 한 마리가 될 것이며 그것들은 흠이 없을지니라. 또 그는 음식 헌물로 수소 한 마리에 밀가루 일 에바, 숫양 한 마리에 일 에바를 예비하며 어린양들에 대하여는 자기 손이 할 수 있는 만큼으로 예비하고 일 에바에는 기름 일 힌을 드릴지니라.”(46:6~7)

한 주 모일에 시작하는 것이었더라면 한 주에 한 번씩 모시에 실행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수할 어떤 날을 정하셨을 때 빈도수도 안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그 날이 시작된 때부터 내내 실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추론이 필요한 것이요 추론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날이 아니라 다른 날에 기념일과 잔칫날이 준수되었더라면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까요? 백성들이 정해진 날에 도착하여 그것을 준수할 수 있지만 그 준수한 것이 무효가 되었더라면 그분께서 기뻐하셨을까요?

 

II. 사도행전 20:7절의 연구

이 구절은 신약교회가 주의 만찬을 순종했을 때에 관한 대부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A. 문맥적 연구

사도행전 20:1~6

누룩 없는 빵 곧 효모로 부풀리지 않은 빵의 날(무교절) 후에 바울과 그의 여행의 벗들은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에 있는 빌립보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빌립보에서 드로아까지 5일 동안 갔고 거기서 7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사도행전 20:7

제자들은 빵을 떼려고 주()의 첫날에 함께 와서 모였습니다. 그 때에 바울은 다음 날 아침에 거기서 떠날 계획이었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고, 한밤중까지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1982년 이전 우리나라에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는 교회마다 철야나 리트릿집회를 가졌습니다만 요즘은 이런 모임이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기서 빵을 떼는 것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 26:26, 마가복음 14:22, 누가복음 22:19, 사도행전 2:42, 고린도전서 10:16, 11:23~24절에서 행해진 것처럼 주의 만찬과 관련지어야 합니다. 어떤 문맥에서의 이 문장은 일반적인 식사(2:46)와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꼭 여기서는 그 경우를 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명백하게 이 문맥은 교회 집회와 관련이 있고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1:17~22, 34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집회에서 일반적인 식사 곧 요즘 말하는 애찬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빵을 떼는 것이 일반적인 식사였다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위반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친다면 바울은 아마도 이중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사도행전 20:8~16

바울의 긴 설교를 하는 동안 유두고형제는 잠이 들었고, 창문 밖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를 죽음으로부터 일으켰습니다. 계획대로 바울은 새벽에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다시 올라가 빵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이처럼 떠나니라.”(20:11)

그의 의도는 먼저 배를 타고 가서 땅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일찍 항해해서 간 것은 그들이 오순절(펜티코스트) 날에 예루살렘에 가려고 서두른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50일 간 이 여행을 하기 위해 그들을 떠났습니다.

너희는 너희를 위해 그 안식일 다음 날 곧 너희가 요제 헌물의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을 채우고 일곱 번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오십 일을 세어서 새 음식 헌물을 {}께 드릴지니라.”(23:15~16)

 

B. 구절에서의 결론

주의 만찬을 위한 날은 그 주()의 첫째 날입니다. 우리는 이 행함이 실행되어야 할 때를 우리에게 말씀하실 하나님을 기대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심으로도 본으로도 가르치신다는 것을 압니다. 사도행전 20:7절의 본은 주의 만찬에 대한 날이 곧 주()의 첫날 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언어의 본질은 주의 만찬을 위한 빈도수가 매주(每週)의 첫날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실 때 구약성경의 의식에서처럼 그 날이 올 때마다 실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을 관심하는 날은 매주(每週) 첫 날입니다. 매주(每週)마다 첫날에 떡을 떼기 위해 제자들이 함께 모여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 그분의 제자들, 그분의 사도들, 초대교회들,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울과 이방교회들도 안식일에도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안식일 다음 날에도 모여서 떡을 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만찬의 날은 안식일과 유사성이 있습니다(20:8~10, 20:7).

 

마치 출애굽기20:8~10절이 거룩하게 매주 7일을 지키도록 기억하는 의미처럼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0:7절도 빵을 떼려고 매주 첫째 날에 함께 와야 합니다. 사람들이 일 년에 1, 한 달에 1번 아니면 주중에 주의 만찬을 갖기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성경적인 권세가 그들이 주의 만찬을 일 년에 한번, 한 달에 한번, 주중에 한번 할 수 있다고 제안한 것입니까? 우리가 성경적인 본을 존중하고, 복음 가운데 우리의 실행들을 권한을 부여받은 것을 알아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교제하는 가운데서 우유를 마시는 것, 양고기를 먹는 것, 아이들에게 침례를 줄 수 있는 것보다 다른 시간에 더 주의 만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나는 여기서 주의 만찬과 주일을 지키는 것이 매주 첫날에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C. 사도행전 20:7절은 특이한 것, 극히 예외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본보기의 어떤 측면에서는 예외적인 것들이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도행전 20장에 있는 것처럼 신약성경의 본에 순종한다면 무리들이 가끔 복음전파자가 밤중에까지 복음을 전해야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졸아야하고 또 창문으로 떨어지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하고 묻습니다. 하지만 본보기 그 자체의 문맥은 특이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합니다. 보통은 예외적이거나 드로아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필요하지 않았다면 분명 그것들은 우리에게 실행하도록 요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주일 중 첫날에 있는 주의 만찬이 특별한 것이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만찬을 갖기 위해 첫날에 제자들이 모이는 것이 특수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들처럼 어쩌면 이것 역시 평범한 실행이 아니어서 우리가 그 실행하는 것을 모방하지 말아야 한다고 할지 모릅니다. 사도가 방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날 모였습니까?

 

문맥가운데 드물게 교회가 한주 첫날에 모이는 것이라고 한 것이 무엇입니까? 반대로 분명하게도 문맥에서 빈번하게 매주 모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 20:7절에서 사도가 방문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라 빵을 떼려고모였다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교회가 주의 만찬을 가지려고 모였던 대표적인 시간이요, 바울이 가르칠 기회로 그들의 모임을 사용했던 것을 암시합니다.

 

바울이 그 마을에 왔을 때 교회가 모일 때까지 7일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고, 매우 바빠서 밤새도록 깨어 있다가 다음 날 아침에 떠나야 했었습니다. 그의 배는 이미 떠났고, 그 배를 따라잡기 위해 육로로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20:8~16). 교회가 1년에 한번, 한 달에 한 번씩 주의 만찬을 가지려고 모이는 것이었다면 그 모임을 소집하기 위해 오랫동안 그렇게 기다린 이유랍니까? 이렇게 말함으로 어떤 이들은 그 때가 정확하게 바로 그날이었겠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7절의 문맥을 보면 매주 빵을 떼기 위해 교회 형제들이 정기적으로 모인 것을 분명 알 수 있습니다. 드로아교회는 바울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사전에 예고되었습니다.

 

바울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가 그와 같이 서둘렀다는 것을 아는 교회가 왜 모이기에 가능한 마지막 날까지 기다렸겠습니까? 또 배 대신에 육지로 가려고 했을까요? 2~3일 일찍 모임을 소집하지 않았을까요? 확실히 일주일 중 첫째 날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오늘날에 설교를 하고 가르치는 일이 주된 교회의 사역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1세기의 교회사역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그건 사실인 듯합니다. 문맥적으로 봐서 주의 날의 1차적인 교회사역은 빵을 떼는 집회요, 2차적인 사역이 가르치고 또 메시지 전달사역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사역이 좀 바뀌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형제들이 만나는 때를 왜 한주의 첫날로 언급하여 설명했을까요? 왜 그들이 도착한 후에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를 우리에게 말하려고 애를 썼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모임을 언급하는 다른 많은 구절들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소집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임이 무슨 날에 모이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일주일의 유일한 날이 그리스도인의 경배에 관해 특별하게 말하기 위해 지정된 날이 안식 후 첫날 곧 주의 날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날에도 모였습니다. 하지만 특별하게 말한 유일한 날이요, 그들이 주의 만찬을 가졌던 유일한 날인데 그날이 한주의 첫날입니다. 그날이 중요한 날이 아니라면 왜 그날을 언급하고 다른 날을 전혀 말하지 않았을까요?

 

이 구절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빵을 떼기 위해 제자들이 함께 한주의 첫날에 모였습니다. 한동안 나는 주일날에 주의 만찬을 하지 않는 교회에 나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교회서 실행하지 않는 사역을 실행했습니다. 주일날에 그것도 아침에 몇 시간이고 복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갔을 때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사역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목적을 위해 교회가 그 날에 모이는 것이 예외적이었다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분명하게 밝혀두고 있습니다. 한주의 첫날이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교회는 그날에 모였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모이는 날과 구별하여 특별하게 모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에서 이것에 대한 분명한 것을 더 볼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이 본보기를 존중한다면 우리는 한주의 첫날에 서로 빵을 떼려고 함께 모일 것입니다.

 

III. 다른 구절에서의 가르침

사도행전 20:7절은 우리가 한주의 첫날에 주의 만찬을 가져야 함을 믿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이 주제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을 취해야 하는 것을 상기해 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 20:8~9절에 있는 것처럼 위층에 있는 방에서 왜 우리가 주의 만찬을 갖지 않는가를 묻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다른 구절을 연구할 때 우리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마당 곧 솔로몬의 행각(行閣), 솔로몬의 주랑(柱廊)에서도 모였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한주간의 첫날보다 다른 날에 주의 만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까? 성경적인 구절과 같은 사도행전 20:7절 외의 구절을 찾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곳에서 본 다른 가르침이 그러한 결론을 강하게 주장합니까?

 

A. 주님의 만찬과 여러 모임에 관한 가르침

그들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 안에 머물고 빵을 떼며 기도하더라.”(2:42)

개심한 초기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 기도에 더하여 빵을 떼기를 끊임없고 변함없이 계속 실행했습니다.” 이 구절에 있는 다른 항목들은 경배(예배)에 대한 실행이라고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킵니다. 이 구절에서 빵을 떼는 것이 일반적인 식사가 아니고 예배에 대한 실행이요, 주의 만찬이라는 것이 고린도전서 11장과 조화를 이뤄서 우리는 결론짓습니다. “끊임없고, 쉼 없이 늘 실행하는 것은 제자들이 얼마나 자주 주의 만찬을 갖는 가를 정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의 만찬이 얼마나 정기적인 일이었고 흔히 그들 가운데서 실행되었는지, 그들이 얼마나 주의 만찬에 헌신적이고 전념을 다했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드문 일도 아니지만 되는대로 실행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25)

교회는 규칙적인 모임을 가졌고 지체들은 놓치지 않기를 기대했습니다. 이 구절은 주의 만찬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얼마나 자주 집회를 가져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규칙적인 모임에 대한 생각을 강화하는 것이요, 보강하자는 말입니다. 여기서 지체들이 보여주는 것은 모임에 대한 헌신과 열정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교회가 모일 때 지체들은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모임 안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와 갈등이 있을 때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겨 가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갈등이 심화되어도 여전히 그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가르침은 그곳이 아니면 나는 죽은 것이다.’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그 교회를 나가야 합니다.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는 지체들 때문에 교파가 갈라지고 더 나아가 이단이라는 무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밝히 말하는 이 일로는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노니 그것은 곧 너희가 함께 모이는 일이 더 좋은 일이 되지 못하고 더 나쁜 일이 된다는 것이라. 무엇보다 먼저 너희가 교회에 함께 모일 때에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을 내가 듣고 어느 정도 그것을 믿노니 인정받는 자들이 너희 가운데서 밝히 드러나려면 너희 가운데 반드시 이단 파당도 있어야 하느니라.”(고전 11:17~19)

이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런 일들은 참으로 교회 안에서 없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왜 분쟁이 있고 여기저기로 갈등을 피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을까요?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배후에 사탄의 간섭이요, 사탄이 간섭하는 것은 사람들의 탐욕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르지요. 예수님은 주님의 상에서 그분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그분의 모든 사람들을 원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도 전해 준 것은 []께 받은 것이니 곧 []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신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그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셨느니라.”(고전 11:23~26)

이것은 선택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만찬 가운데 참여하는 것에 전념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주의 만찬은 교회가 모일 때 먹어야만 합니다(고전 11:20, 33). 주의 만찬은 바울이 그들의 모임에서 가지려는 교회를 꾸짖는 일반적인 식사와 대조적입니다. 교회는 집에서 일반적인 식사를 해야 합니다(고전 11:22, 34).

 

그렇지만 이 구절에서 무슨 날, 얼마나 자주 실행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는 실행할 때마다라고 간단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묘사된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할 때마다라는 표현은 언제나, 모든 시간에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성경책들을 참고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NIV, NEB, Wms, Knox, Gdspd을 연구해 보십시오. 이것은 한 가지가 일어나고 다른 것이 일어날 때마다를 의미하는 관계부사입니다. 그 표현 자체가 얼마나 자주 주의 만찬을 가져야 하는지를 여러분에게 충분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봉급을 받는 만큼 여러분의 카드에서 소득세를 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지시한 바와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주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자기 곁에 모아 두어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 16:1~2)

고린도교회는 한주의 첫날에 모이는 것을 계속하도록 명령된 것이 문맥의 흐름상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아케아 마케도니아교회들도 같이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각주(各週)의 첫날에 있어야 할 모임을 입증합니다. 이 구절은 집에서 혼자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흔한 모임을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사람들을 데려왔을 때 함께 모여야 했을 것이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가 말했던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한주간의 첫날 하루만 모이는 것은 아니고 교회가 시작됨으로 이 모임이 생겨났지만 각 주 첫날에 계속해서 실행됨으로써 지금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NASB, NIV, RSV, NEB, ).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 대부분이 이것을 실행하고 있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본래 교회 사역의 우선순위가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늘날과 같이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은 다른 복음에 속한 것입니다. 아무리 복음을 전달한다고 할지라도 다른 방향으로만 갈 뿐입니다. 주님의 날에 주된 집회가 바로 주의 만찬입니다. 말씀전달은 그 다음입니다. 이 우선순위가 회복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해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전하거나 들어서 은혜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정작 실행해야 할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가는 이유도 말씀을 듣고 전하러 가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다른 날은 말씀을 들으러 가거나 전하러 가야 하지만 주님의 날 한 주간의 첫날은 집회에 참여하는 목적이 바로 주님의 상에 참여하고 주의 만찬을 먹으러 가는 날이어야 합니다. 그 후에야 말씀을 전하고 듣는 집회가 진행되는 것이 옳습니다.

.

그 구절은 사도행전 20:7절이 주의 만찬에 관해 말하는 것을 재정(헌금)을 모으는 것에 관한 것과 같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주의 만찬을 실행하는 것, 선교비를 모으는 것) 다 한 주의 첫날에 실행되었습니다. 교파들은 흔히 주의 만찬을 성만찬(holy supper)이라는 명목으로 분기에 한번이나 일 년에 한번 그리고 기념일에 갖습니다. 하지만 재정을 모으는 데는 매 시간에 갖고 있습니다. 성경은 둘 다 같은 것이요, 같은 주의 날에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20:7절과 고린도전서 16:1~2절 사이에 연관성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궁핍한 성도들에게 보내려고 한 주의 첫날에 재정을 모으도록 교회들에게 지시했습니다. 나중에 그와 다른 사람들은 그 도시들을 찾아갔고 예루살렘에게 줄 재정을 모았습니다(고전 16:1-4, 고후 8~9, 15:25~27, 24:17). 사람들이 사도행전 20장에서 하고 있었던 여행입니다. 여행하고 있던 그들은 한 주의 첫날에 드로아에 있는 교회에서 주의 만찬을 가지려고 그 곳에 머물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드로아에 있는 교회는 한 주의 첫날에 모였다는 것이 드물지 않거나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합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해야 할까요? 물론 그들은 주 첫날에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6장에서 이미 밝혔던 것처럼 그것을 명하셨습니다. 바울이 여행하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모이라고 인정하셨던 그 날에 드로아에 있는 교회와 함께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20:7절의 예는 그들이 재정을 모으기 위해 모인 날이 주의 만찬을 하기 위해 모였던 날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만찬과 여러 모임의 가르침에 대한 결론

제자들은 주님의 만찬과 그들의 모임에 출석에 대해 변함이 없었고 굳건했습니다. 그들은 드로아 교회에서 주의 만찬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한 주의 첫날에 모임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0:7절은 제자들은 빵 떼는 것을 한 주 첫날에 함께 모이는 것을 더하고 있습니다. 교회들은 첫날에 모이는 것을 포함해 규칙적으로 집회를 했습니다. 그들이 주 첫날에 집회할 때 그들은 주의 만찬을 갖고 물질적 재정을 모았습니다. 그 본이 명백해짐으로서 정착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구절을 연구하므로 사도행전 20:7절이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주의 만찬이 다른 날에 있었다는 말할 만한 구절이 없습니다. 대신 그 본은 사도행전 20:7절의 실행이 교회의 실행에 대한 전반적인 그림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B. 한 주의 첫날에 대한 중요성

다른 구절들이 한 주의 첫날 어떤 특별한 중요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입증합니까? 왜 하나님께서 주의 만찬과 헌금을 모으기 위해 첫날에 집회를 하는 교회를 원하시는지를 설명하는데 어떤 것이 있습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주의 첫날에 일찍 일어나신 뒤에 전에 친히 몸속에서 일곱 마귀를 내쫓아 주신 마리아 막달라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시니라.”(16:9)

예수님은 주의 첫날에 일어나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세상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여러 방면에 나타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위대한 것이었지만 부활이 아니었더라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어떤 의미도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큰 슬픔과 비통으로 제자들을 떠나게 했습니다. 부활은 궁극적으로 승리였고, 기쁨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죽으신 요일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밝히는 구절은 없지만 4복음서 모두 예수님께서 주의 첫날에 일어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4복음서 모두 반복적으로 그것을 말합니다. 그 요일에 대해 어떤 중요성이 없다면 왜 첫날에 대해 강조할까요(24:1, 4, 21, 16:2, 26:1~7, 24:1~9, 20:1~10).

 

그 뒤 같은 날 곧 주의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한가운데 서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라.”(20:19)

예수님은 한 주의 첫날 저녁 무렵 쯤 맨 먼저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나타나심은 자신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입증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에 또한 중요합니다(고전 15:1~8).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1:4)

한 주의 첫날에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몇 번에 걸쳐 나타나셨습니다(16:2, 9, 26:1, 8~10, 24:1, 19~21, 20:1, 11~19). 이 나타나심 중 한번은 제자들이 집회하고 있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 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한 주의 첫날에 집회를 했습니다. 예수님 그분 자신이 그 집회에 가시려고 선택하셨습니다(24:33~40)

 

여드레가 지나서 그분의 제자들이 다시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더라. 그때에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한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20:26)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두 번째 날도 한 주의 첫날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제자들이 함께 모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부활 하시고 처음으로 나타나신 후 8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날을 세는 방법은 한 주의 첫날 다음부터 세는 것이 맞습니다(23:39).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제자들은 모였고 그 다음 한 주의 첫날에도 다시 모였습니다. 두 상황 모두 예수님께서 자신의 임재하심으로 제자들의 집회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이 어찌 예사롭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교회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음으로 주의 만찬을 말하는 구절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임이 한 주의 첫날에 있었던 사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왜 모임을 가졌던 날을 그렇게 분명하게 말을 할까요?

 

오순절 날이 충만히 임하였을 때에 그들이 다 한마음이 되어 한 곳에 있더라.”(2:1)

오순절 날 역시 한 주의 첫날이었습니다(23:15~16). 사도들은 성령이 임할 것이라는 어떤 생각을 하기 전부터 이 날에 함께 이미 모여 있었습니다(1:1~11). 성령은 그들의 모임에 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집회를 가졌고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3,000명이 그날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한 주의 첫날에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2:47).

1) 성령님이 임했습니다.

2)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되었습니다.

3) 초기의 사람들은 개심하였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4)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 주의 첫날에 제자들이 함께 집회를 가졌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이때로부터 주의 만찬 등 여러 가지의 실행들을 그들은 계속해서 실행해 왔습니다(2:42).

 

사도행전 20:7절에서 제자들은 빵을 떼기 위해 한 주의 첫날에 함께 모였습니다. 여기서 주의 만찬이 한 주의 첫날에 실행하는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유일한 시간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 주의 첫날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구절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한 주의 첫날에 모이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구절도 아닙니다.

 

이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지시한 바와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주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자기 곁에 모아 두어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 16:1~2)

교회들은 매주의 첫날에 재정을 모았습니다. 한 주의 첫날에 관한 것과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관한 다른 구절 모두 이것을 인정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에 모여야 하고 재정적 헌금을 모으는 것이 맞습니다.

한 주의 첫날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결론

한 주의 첫날에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대단한 중요성을 보겠습니다. 초기교회사 가운데서 가장 큰 수많은 사건들이 그날에 일어났습니다. 그날에 일어났던 사건들 중 4번은 그날에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포함되었고 다섯 번째는 명학하게 모임이었음을 입증합니다. 여기서 2번은 예수님께서 그 모임에 임재하셨고 다른 때에는 성령께서 임재하셨습니다. 한 주의 첫날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특별한 중요성이 있다는 것을 어떤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요? 한 주의 다른 어떤 요일을 분명하게 부르거나 아니면 구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 뿐만 아니라 온전하고 성경을 바르게 읽어본 많은 그리스도인 즉 성경학자들이라면 이날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과 모임들 그리고 경배의 행동은 한 주의 첫날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주의 다른 어떤 날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이름이 명명된 것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한 주의 둘째 날, 한 주의 셋째 날 .... 등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날은 있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의 모임에서만 관계가 있고,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나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히 중요한 사건에서는 결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중요한 사건이 다른 날 일어났었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그날에 어떤 중요한 애착을 갖지 않습니다. 한 주의 어떤 날이 주의 날 이외에 명명되지 않았습니다. 왜 모두 그것에 관해 특별하고 중요한 것이 있지 않는 한 첫날을 강조할까요?

 

다른 구절을 연구하는 우리는 사도행전 20:7절 외에 선택적이거나 아니면 우연한 기회라도 한 주의 첫날 주의 만찬을 갖는 것을 가리키는 어떠한 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한 주의 다른 요일에 그것을 갖도록 하는 어떠한 권리가 주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성경구절을 연구하면서 한 주의 첫날에 대한 중요성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성경구절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한 주의 첫날 빵 떼는 제자들을 보고 놀라지 않습니다. 반면 다른 요일에 그것을 한다거나 했다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에 더 놀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특별하게 중요한 유일한 날은 주님의 날이요, 우리가 주의 만찬에 참여하게 된 날이 주님의 날 곧 한 주의 첫날입니다.

 

결론

이 메시지에서 우리가 공부한 것을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1)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 모든 것을 성경적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닌 것을 분명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권위는 명령과 마찬가지로 본들과 어쩔 수 없는 추론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3) 하나님은 자신의 특별한 기념과 축제들을 지키도록 하는 시간과 빈도를 항상 게시하십니다.

4) 제자들은 함께 모이는 것과 주의 만찬을 정기적으로 또 부지런히 실행했었습니다.

5) 주의 만찬은 교회가 모였을 때 먹었습니다.

6) 신약성경에 있는 많은 주된 사건들은 한주 첫날에 일어났습니다.

7) 몇몇 구절들은 한주 첫날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것을 언급합니다.

8) 그리스도인들은 한주 첫날에 정기적으로 드리는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9) 제자들은 빵을 떼러 한주 첫날에 함께 왔습니다.

10) 신약성경은 안식일을 포함해 한주의 어떤 다른 날에 중요성을 주지 않았고, 주의 만찬이 어떤 다른 날에 먹었다고 가리키는 구절이 없습니다.

 

성경적 권위는 매주 주의 날에 주의 만찬을 가질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매달 한번, 어떤 특별한 날, 여호와의 증인처럼 유월절이라는 날에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좋아 보이지만 주의 만찬의 본질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만찬이 아닙니다. 다른 날에 주의 만찬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 없이 실행하는 움직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날에 주의 만찬을 하는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컨퍼런스 > 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모임에 참여하는 것  (0) 2013.04.17
교회헌금사역  (0) 2013.04.16
기도의 능력과 사역  (0) 2013.04.16
예수의 교회 이름  (0) 2013.04.14
교회의 유일성  (0) 2013.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