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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그영(the Spirit)을 강조하는 신약성경에서 악기가 맞지 않다.

Hernhut 2012. 10. 28. 14:32

 

 

 

 

IV. 그영(the Spirit)을 강조하는 신약성경에서 악기가 맞지 않다.

 

찬양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게는 절실한 사역인지 모릅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말로 거칠게 말한다면 사실 악기를 사용해 찬양하는 것은 천박한 노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에 반대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약성경은 그것을 막고 있습니다. 악기를 사용해 노래를 하는 것은 이방세계에서 하는 음악을 쫓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혼합문화의 형태입니다. 신학에서 악기를 다루며 찬양하는 것을 가르치지만 영에서 나오는 음악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한계입니다. 목소리와 말씀으로 노래하는 것은 주님의 영의 흐름을 만지는 것입니다.

 

A. 악기로 하는 찬양은 구약의 외적인 강조에 적합한 것이다.

구약성경은 강조된 육체적인 것, 겉으로 보이는 것을 종교행사와 의식을 포함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이 거룩해보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아주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 꾸짖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가운을 길게 입고 평소에도 성의를 입고 성직자 인양 겉으로 드러내고 다니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경건해보이고 거룩해 보이지만 속에서는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외식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기악도 이와 같았습니다.

 

“이 성막은 단지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육신에 속한 규례들로만 유지되어 개혁(糠革)의 때까지 그들에게 부과된 것이라.”(히 9:10)

 

여기에서는 이 같은 것들을 개혁 때까지 육욕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의 규례들만을 부과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율법은 육체적인 민족, 땅에 속한 왕국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적인 태어남으로 인해 이 민족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약속관계는 육체적인 할례로 육체적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예배는 육체적인 기구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육체적인 성전에서 진행했습니다. 예배는 땅에 속한 아론의 자손들이 육체적인 제사장직분으로 인도하였습니다. 흔히 육체적인 동물 희생을 드리는 것으로 구성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영적인 중요성을 가졌습니다만 그런 것들은 상세한 육체적인 요구와 외형적인 의식을 크게 강조한 것입니다.

 

악기와 춤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의식적인 봉사, 행사적인 봉사에 알맞은 것입니다. 악기가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과 행사에 그것들의 힘을 주게 됩니다. 육체적인 소리, 육체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음악인들의 기계적인 기술에 감동을 강조 하는 것이 악기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악기에 대한 언급을 구약성경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외적인 소리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모든 교회에서도 악기를 사용합니다. 언젠가 웨딩채플에서 어떤 교회가 집회하는 데 가본 적이 있습니다. 피아노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풀륫 등 많은 악기를 들고 연주를 먼저 할 때 외형적으로 멋도 있고, 자매들의 열심히 하는 것을 보고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이미 혼적으로 적셔져서 그 이후의 말씀선포는 누가 어떤 말씀을 전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갈 시간이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다가오셔서 “어제 그 목사가 전한 말이 무엇이었니? 생각나니? 그럼 네가 본 것이 무엇이니?” 그래서 나는 “어젯밤에 본 것은 찬양대에서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자매들과 연주를 듣고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거다. 넌 어젯밤에 혼만을 적셔오더구나. 네가 오늘 그곳에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그런 곳에 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내가 악기가 신약성경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교회들은 악기들을 포함시키는 큰 의식들을 발명합니다. 교회들은 계획적으로 재능을 가진 연주자들을 초대를 하고 또 경의를 표합니다. 교회들은 많은 무리들을 끌어 모으려고 연출을 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교회에 정착하게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꼼수에 불과합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꼼수를 부리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적게 모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만족하실 만한 예배와 교회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참으로 어려운 실행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집회라면 실행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최종결과는 이런 것을 사용하여 예배를 한다면 육욕적인 기쁨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요, 육신적인 아름다움을 위한 사람들의 육체적인 갈망을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그것들을 오용하는 것이 아니고 악기의 본질에 내재하는 것입니다. 나도 팝송도 좋아하고 각종 음악도 좋아합니다. 비틀즈, 케니 로저스 음악도 좋아하고 아바 음악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에는 악기가 필요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들을 사용하는 곳에는 악기가 영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결국 변함없이 악기의 본질에 내재하는 것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 주여! 1세기에는 악기를 사용하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육적인 소리들이 겉으로 나타나는 영향을 위해 단순히 육적인 물체를 사용합니다. 악기들을 사용하는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의 악기는 영적인 가치, 내적인 것 외의 것을 강조합니다. 또 육적인 소리의 바깥 가치를 추구합니다. 그것들의 본질로 교회가 육적이고 바깥에 있는 것을 항상 갖고 강조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악기찬양은 “육욕적인 규례”를 지키는 기간에 잘 어울렸고 지금에 와서는 “개혁의 시대”에는 적절하지 않은 사역입니다.

 

B. 신약성경은 영적인 예배를 강조한다.

신약성경은 특별하게 우리의 예배에서의 영적인 강조를 하는 영적인 약속입니다. 성경에서 영적인 것은 육적인 것과 반대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영원한 생명, 그리고 죄로부터의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복음 특히 예배에 관하여 반복적으로 영적인 강조를 나타내는 것과 육적인 강조를 피하고 버리는 것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신약성경 예배가 어떤 외적인 활동들을 동반할 때 그 강조는 속사람에게 합니다(마 6:1~34, 16:23~27, 골 3:1~2, 요 6:27, 롬 8:5~8, 고후 10:3~4). 특별하게 새 언약을 포함합니다.

 

새 언약은 영적인 법입니다(요 6:63, 27, 68, 엡 6:17, 롬 2:28~29, 7:6).

새 언약은 영적인 거룩한 나라입니다(벧전 2:9).

새 언약은 새로 태어남(거듭남)입니다(요 3:3, 5, 벧전 1:23).

새 언약은 영적인 왕국입니다(요 18:36, 롬 14:17).

새 언약은 영적인 할례입니다(롬 2:28~29).

새 언약은 영적 성전이요, 영적인 집이요, 교회입니다(벧전 2:5, 엡 2L21~22, 고전 3;16).

새 언약은 영적이고 거룩한 제사장직분입니다(벧전 2:5, 9)

영적인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입니다(요 4:23~24, 마 15:8~9, 빌 3:3, 롬 1:9).

이 예배는 입술의 열매 등과 같이 영적인 희생을 포함합니다(벧전 2:5, 히 13:15, 고전 14:15, 엡 6:18).

특별하게 새 언약은 영적인 노래를 포함합니다(고전 14:15, 엡 5:19, 골 3:16).

 

노래하는 것이 영적인 강조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적합한지를 알아보기로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노래하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노래합니다. 서로에게 말을 하고 주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으로(안에서) 멜로디를 만들어 노래합니다(엡 5:19). 우리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은혜로 서로 가르치는 것과 격려, 충고, 권고, 꾸짖는 영적인 노래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노래합니다(골 3:16). 또 우리는 입술의 열매로 드린 찬양의 영적인 희생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노래합니다(벧전 2:5, 히 13:15).

 

사람들은 악기가 산출해 내는 정서 때문에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영적인 것을 느끼도록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악기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것을 느끼도록 하지 못합니다. 그것들이 정서적인 느낌을 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영적인 것들과 같지 않습니다. 정서적 감정은 여러분이 축구를 하거나 스포츠 관람과 영화를 보거나 또 미남을 보고 미녀를 볼 때처럼 온전히 육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정서적 감정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성전에서 영적인 희생을 드리는 영적인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을 육욕적이고 육체적인 오락으로 바꾸는 것을 영적인 예배로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계적인 악기 음악을 예배에 더하여 질 때에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생깁니다.

 

고린도전서 11:17~34절에 있는 직관적인 실례를 생각해 보십시오. 고린도교회는 그들이 애찬 안으로 주님의 만찬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강력하게 꾸짖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오류를 범했습니다.

• 그들은 인정되지 않은 요소와 내용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음식과 다른 종류의 음식으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 그들은 영적인 교훈과 찬송 대신에 육적인 욕구와 식욕을 만족하는 것에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예배 가운데서 음악적인 악기들을 사용할 때도 똑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악기를 사용하는 것은 주님의 만찬에 구운 소양을 더하는 것과 같습니다.

• 구약에서는 인정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양들은 본래 유월절에 먹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것입니다.

•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를 인정받은 것이 아니요, 영적인 것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바울이 일반적인 식사로 주의 만찬으로 돌리는 것을 금한 이유를 우리가 이해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예배에 악기 음악을 더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이유를 똑같이 이해할 것입니다.

 

개요와 결론

신약성경 예배의 요소는 진리(실제), 지각, 그리고 영을 요구합니다(요 4:24, 고전 14:15). 예배에서 노래하는 것은 이 세 가지 요소에 맞지만 악기 음악은 그 요소에 맞지 않습니다.

• 노래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진리 안에서 인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악기는 인정받지 못햇습니다.

• 노래하는 것은 지각을 증가시켰지만 연주하는 것은 지각을 방해했습니다.

• 노래하는 것은 영적인 것을 이해하도록 증가시켰지만 연주하는 것은 영적인 것을 저해시키고 육욕적인 것과 육체적인 오락을 증가시켰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고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To be contin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