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휴거 이후

그분을 만나러 나가라 - 모든 외출, 준비된 외출 또는 준비되지 않은 외출(4)

Hernhut 2025. 2. 12. 00:11

가서 너희 자신을 위해 사라

 

5명의 어리석은 처녀는 등불이 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5명의 슬기로운 처녀에게 기름을 더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기름을 더 얻을 수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슬기로운 처녀로부터 그러지 말고... 오히려 파는 자에게 가서 너희 자신을 위해 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마태복음 25:9). 그들은 공급처로 가야 했고, 스스로 가야 했습니다.

5명의 어리석은 처녀는 5명의 슬기로운 처녀가 기름을 더 얻은 것과 같은 장소와 방식으로 기름을 더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기름을 대가를 받고 제공하는 교환자가 있었고, 대가는 추출되었고 기름은 개인적으로 분배되었습니다.

각자는 교환자에게 직접 가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기름은 구매자의 개인 용기에 분배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그리스도인의 생각으로, 개인적으로 공급처로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완벽하게 일치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가지고 계신 것을 개인적으로 사용해야 하며, 그것은 적절한 출처, 즉 주님 자신으로부터 사용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과 관련하여 구매한다는 생각은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치러야 할 대가가 있으며, 기름으로 흙 그릇을 채우려고 주님께 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돈이 아닙니다. 그 대가는 주님과 함께 그분의 말씀 속에서 보낸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성령 충만을 이루기 위해 제시된 수단은 로마서 12:2에서 변형, 즉 변태를 이루기 위해 제시된 수단과 같습니다. 성령 충만과 변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동시에 발생하며, 둘은 너무나 분리할 수 없이 관련되어 있어서 서로 분리되어 일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성령 충만과 변태는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인간의 영에 심어진 말씀[그의 새로운 본성과 양립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받으면서 점진적으로 함께 발생합니다. 그러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이 말씀을 취하여 점진적으로 그 사람의 삶에서 일하시어 성령 충만, 변형,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의 혼의 구원을 가져오십니다(로마서 12:2; 고린도후서 3:10; 에베소서 5:18-20; 골로새서 3:10, 16, 17; 야고보서 1:21).

주님께서는 성령 충만에 필요한 대가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치를 수 있도록 그 문제를 확립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대가는 다소 비쌉니다.

그것은 완전히 분석하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것을 포함합니다(마태복음 16:24-27).

이것이 오늘날 세상에서 교파가 라오디게아 상태에 있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이런 종류의 대가를 기꺼이 치르려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습니다.

대가는 비싸지만, 지금까지의 최종 결과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생한 대가를 상쇄합니다.

대가를 치르는 것은 성령 충만을 가져오고,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고,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어느 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될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태복음 25:21, 23; 누가복음 19:17, 19).

하지만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도 꽤 비쌉니다.

그런 결과는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고,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얻지 못하고, 어느 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될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태복음 25:26; 누가복음 19:22).

그리스도인은 히브리서 12:2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와 관련된 고난을 앞으로 일어날 고난과 관련하여 보신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 문제를 보아야 합니다.

『…기쁨을 위하여십자가를 참으시고 수치를 업신여기셨으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기쁨을 위하여라는 단어는 헬라어 안티anti의 번역어로, 한 가지를 다른 것과 대조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쁨수치와 대조되었습니다.

그는 갈보리와 관련된 수치스러운 수치를 앞으로 일어날 기쁨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수치스러운 수치는 사소한 것이 아니었지만, 기쁨은 훨씬 더 컸기 때문에 비교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는 전자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만 여기셨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놓인 기쁨은 그분이 갈보리에서 구속받은 자들 가운데서 택해진 공동 상속자들과 함께 땅을 다스리고 통치할 다가올 날과 관련이 있었습니다(히브리서 1:9).

다가올 날의 사건들은 오늘날의 사건들보다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침뱉음을 당하고, 매 맞고, 조롱하는 왕처럼 차려입는 것을 비교적 사소한 일로 여기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갈보리로 가서 인간의 구속을 위해 값을 치르셨고, 심지어 그의 박해와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자들조차도 언젠가는 그 앞에 놓인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가능한 모든 부름 중에서 가장 높은 부름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매우 어리석은 사람(모로스moros[멍청이], 열 처녀의 비유의 틀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만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고려하여 자신을 적절히 준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적절하게 준비된 그리스도인은 위에서 오는 적과의 전투에서 모든 전선에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은 전투에서 여기 아래에 있는 사람들(항상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사용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다 박해를 받을 것이요(디모데후서 3:12).

전투가 격화되면서 박해는 물론 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다른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에 비추어 볼 때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일로 여겨져야 합니다(고린도전서 2: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