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성도들 가운데 살기 (3)

Hernhut 2023. 8. 28. 00:06

 

 

로마서 12:17, 18

 

로마서 12:17의 시작 부분에서 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코스kakos인데, 이는 성격상 비천하거나 악한 것을 의미하며, 쓸모없는 것, 무능한 것, 나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더 많은 악을 낳거나 일으키는 악인 포네로스ponēros와 대조된다(로마서 12:9). 카코스kakos는 사람, 품질, 감정 또는 행위에 관계없이 해롭거나 파괴적인 것, 또는 도덕적으로 또는 윤리적으로 악한 것을 나타낼 수 있다.

 

로마서 12:18만약에 가능하다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가능한에 사용 된 헬라어 두나토스dunatos강력하거나 유능한을 의미하며 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낸다. ‘가능하다면이라는 문구는 할 수 있다면또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신에게 달려 있는 한이라는 다음 문구는 당신이 할 수 있다면의 의미를 다른 사람들이 허락한다면으로 바꿀 수 있다. , 사람이나 사물을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역할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다.

 

계시와 적용

 

로마서 12:17, 18은 교회 생활에서 화평을 이루고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는 첫 번째 원칙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누군가가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거나 우리에게 무익한 일을 하더라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

 

둘째, 우리는 사람 앞에서 옳은 것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눈에 높은 질을 가진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로마서 12:17에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과 옳은 것을 존중하라는 긍정적인 명령이 있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화목해야 한다(로마서 12:18). 이것은 교회 생활에서 특히 중요한데, 성도들 사이의 평화는 주어진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주님과의 화평은 무조건적이지만(로마서 5:1), 성도들과의 화평은 조건적이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이라는 구절이 바울이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언급하기 전에 나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가 위선 없는 사랑에 대해 말씀했을 때(로마서 12:9), ‘할 수 있다면은 없었다. 그가 악을 싫어하고 선한 것에 집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로마서 12:9) ‘할 수 있다면은 없었다. 그가 서로를 존중하는 것에 대해 말했을 때(로마서 12:10), ‘할 수 있다면이라는 말은 없었다. 바울은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로마서 12:14) ‘할 수 있다면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언급할 때 그는 가능하다면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교회 생활에서 평안을 얻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교회 생활에서 평안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형제 사랑은 교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지만, 유지하고 실천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이기도 하다. 평화도 마찬가지다.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할 만하거든 너희에게 달려 있거든이라고 말한다. 그는 형제들이여, 나는 너희에게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사는 불가능한 일을 주고 있다. 그것이 불가능한 임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연습을 포기하지 마라. 그러나 평화롭게 살려고 하면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너희에게 달려 있는 한이라는 구절은 우리가 이 평화를 모든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는 상호 평화다. 평화는 중요하지만 얻기가 어렵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각자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가능하다면이라는 문구는 대가를 치렀다 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평화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러한 결과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는 교회 생활에서 평화의 가치를 인식하면서 평화를 계속 존중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 그러한 평화를 얻을 수 없을 수도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평안이 올 때까지 다른 성도들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이 구절들이 말하는 것, 즉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비천한 자들과 교제하는 것을 신실하게 실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로마서 12:16).

 

결코 하나님의 유익을 희생하지 않음

 

우리가 성도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유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참다운 평화는 단순히 한쪽 편이나 다른 쪽이 그들의 의견을 희생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합당한 원칙에는 기꺼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포함되지만,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유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교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안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를 위해 서는 것이 평안을 잃는 것을 의미할 때가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최우선 순위로 삼으면 거짓 평화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우리가 평화를 최우선 순위로 삼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해 여러 번 하나님의 유익을 희생하게 될 것이다.

 

바울 자신은 평화를 희생해서라도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일어서는 원칙을 잘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해 주신 계시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평화를 위해서도 그러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는 예루살렘 교회와 합당한 교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반면에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고, 성도를 온전케 하고, 이방인의 교회를 세움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역을 존중했다.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사이에는 마찰이 있었지만, 그는 이방인 교회와 유대 교회 사이의 좋은 교제를 위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야고보 형제여, 어떤 사람들이 나를 귀찮게 하기 때문에 이제부터 나는 당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지 않겠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울은 결코 하나님의 유익을 희생하지 않았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거짓 성도들에 대해 우리가 한 시간도 그들에게 굴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너희와 함께 있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했다(갈라디아서 2:5).

 

바울은 이른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결코 진리를 희생하거나 종교적 권위와 이념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것을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옹호하는 것에 대해 너무나 확고했기 때문에 여러 번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다(고린도후서 11:23).

 

동시에 바울은 분열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의 말은 여전히 할 수 있거든 너희에게 달려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라라는 것이었다. 주님의 은혜와 자비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유익이나 비전을 결코 타협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과 평화를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