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새벽이슬처럼

다른 토양들

Hernhut 2019. 3. 20. 10:33


 

그리스도는 모든 종류의 토양에 선입견 없이 그분 자신을 뿌리시는 종자 뿌리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조그마한 땅뙈기라도 그분을 줄 수 있는 모든 자들에게 뿌리신다. 어떤 토양이 있는 한 그분은 거기에 뿌리실 것이다. 종자를 뿌리는 자는 모든 사람에게 도달한다.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토양의 조건에 달려 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시간, 심지어 같은 시간에도 네 종류의 토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복잡해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기도와 말씀으로 달콤한 시간을 보낸 후 대체로 좋은 토양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부님을 사랑해 우리가 얼마나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기를 갈망하는지를 그분께 쉽게 말한다. 그러면 토양 속에 깊이 숨겨진 작은 자갈을 주님께서 만지신다. 우리는 거기에 그렇게 작은 돌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 작은 돌을 만지시자마자 우리는 방어적이게 되고, 그 작은 자갈은 빠르게 큰 바위로 자란다. 우리는 그분께 모든 걸 드리겠다고 주님께 말했지만 이 바위는 너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을 때 그들은 즉시 자기들의 그물을 버리고서 그분을 따랐다(4:1920). 그분께서 같은 일을 하도록 또 다른 사람을 초대하셨을 때 그는 반응했다.

주님, 먼저 가서 내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도록 허락하소서.(8:21)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초청을 하셨다. 그분의 초청은 제한이 없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좋은 토양이었고, 그들의 일생을 드리는 것이 그들에게 바위가 되지 못했다. 그에 반해서 다른 사람은 그의 상황이 큰 바위가 되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는 베드로와 안드레 같지만 대부분의 시간 우리는 아버지를 매장하기 위해 법적인 권리를 유지하기 원했던 사람과 같다. 주님은 동정심이 없는 분처럼 보였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에게 매장하게 하고 나를 따르라.(8:22)

주님은 그 사람을 자기 길로 가게 하셨다.

주님은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 모든 생명으로 그분을 섬기도록 부르실 수 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우리가 세상의 럭셔리한 것들을 살 수 있도록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우리 마음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주님은 우리가 단순하게 살기 원하신다. 그분은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신다. 갑자기 우리가 이 부름을 들을 때 우리 안에 깊이 숨겨진 작은 바위는 아주 거대해 진다. 모든 것이 잘 자라고 있었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만지셨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없는 한 가지처럼 보이지만 또한 그분께서 원하시는 한 가지처럼 보인다. 이제 바위뿐만 아니라 길가의 빈번함, 가시들 또한 나온다. 그 부분에서는 우리가 거의 주님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는 베드로, 안드레같이 그분을 따르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복잡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다른 종류의 토양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고, 그것이 드러날지 전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