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새벽이슬처럼

자갈이 섞인 토양

Hernhut 2019. 2. 22. 22:49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을 내나 해가 돋은 뒤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시들어 버렸고(13:5-6)

자갈토양은 종자 뿌리는 자의 뿌림에서 나오는 모든 유익을 잃어버릴 두 번째 성격유형이다. 땅에 조금 밖에 흙이 없고, 돌만 있다면 어떤 것도 자라기 어렵다. 물과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고, 뿌리가 뻗을 곳이 없다. 자라기 시작하는 것 무엇이든 그런 환경 속에서는 지속되기 힘들다. 특히 더울 때에는 더 더욱 자라지 못한다. 주님은 돌이 섞인 땅을 정의하셨다.

그러나 돌밭 속에 씨를 받은 자 곧 그자는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나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만 견디는 자니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 그가 곧 실족하느니라.(13:20-21)

자갈토양은 통행이 빈번해 표면이 딱딱해져 뿌려진 종자가 뚫지 못하는 길가토양과는 다르다. 자갈이 있는 곳은 흙이 있지만 돌 때문에 얼마 남지 못한다. 처음에는 자라는 것이 건강해 보이지만 지속해서 자라지 못하고 죽어 버린다.

돌이 섞인 토양은 마치 우리 젊은이들의 컨퍼런스와 같아 보인다. 젊은이들은 초죽음이 되어 도착을 하지만 찬양을 하고, 구호를 들고, 움직이고, 메시지를 듣거나 하는 것이 그들을 섞어 놓는다. 끝나고 나서 그들은 활력 있게 집으로 간다. 그들의 말은 그들이 주님을 만졌고, 그들의 삶을 주님께 드렸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참되시다. 그들은 그들의 친구들과 함께 그분을 나누기를 원한다. 이 모두가 아주 좋은 것이지만 얼마나 지속될까? 그들이 정상을 체험하고, 뜨거운 햇볕이 올라오면 정말 건강해 보였다가 시들어 죽는다. 즉시 우리가 솟아 올라왔지만 금방 우리가 시들어 버린다. 이런 젊은이들이 이미 아주 많은 것을 결정했기 했기 때문에 이들 안으로 헌신을 뿌리실 수 없으시다.

한번은 내가 어떤 형제를 격려한 적이 있었다.

형제에게는 그 자매가 아주 잘 어울려. 그 자매를 바라보는 것을 고려해 봐.

처음에는 그가 아무 말 없었다. 하지만 그를 다시 격려한 후 그는 자기가 다른 어떤 사람과 심각해져 있다고 내게 말했다. 그 때 나는 격려하는 것을 멈췄다. 왜냐면 그가 선택한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이 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를 한 길로 격려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이미 다른 길로 가기를 결정했다. 주님께서 그분의 격려를 멈추시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길로 갈 때 얼마나 큰 손실인지!

나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지만 모두를 주님께서 전시간으로 몇 년 뿐이라도 그분을 섬기도록 부르시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그들이 그들의 미래의 방향을 이미 결정했고, 그들이 해야 할 직업을 결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 듣거나 주님과 동역할 방법이 없다. 그들의 바꿀 수 없는 결정은 바위가 되었다. 그들이 새롭게 되었고, 주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것이 성화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돌들 때문에 헌신은 그들 안에 뿌리를 뻗을 수 없다.

나는 어떤 전문적인 학위를 얻으려고 결정한 한 성도를 안다. 그것이 주님에 대한 것인지 나는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하나는 자기의 입장에서 움직일 수 없는 결정이 확고하다면 그것은 바위라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데 제한을 받는다면 그것은 바위다. 우리 모두 이러한 바위를 가지고 있다. 아무도 자기가 돌에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의 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만지실 때까지다. 그들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놀란다. 우리가 우리의 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잘 자라지 못할 것이다.

나는 젊은이들이 메시지를 전할 때마다 복잡해진다. 그들은 더 체험한 형제들보다 훨씬 잘 전하지만 그들이 가진 것은 자기들의 돌을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 얕다. 그들은 좋은 메시지를 전하고, 빨리 자랑스러워지지만 자갈이 섞인 상태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메시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대로 살 수 없을 때 그들의 얕은 뿌리는 밖으로 노출되고 시들어 죽는다.

우리들 중 먼저 된 자들은 어떤가? 누구도 예외는 아니지만 우리가 우리의 돌을 잘 처리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시간에 지남에 따라 더 작아진다. 내 의견을 말하자면 나는 내가 주님을 따르기로 했을 때 돌을 처리했다. 오늘 나는 젊었을 때 가졌던 것과 같은 돌들이 없지만 여전히 돌에 자유롭지 못하다. 적어도 나는 여전히 어떤 작은 돌들이 있다. 어떤 작은 돌들이 섞여있는 것은 좋은 토양이다. 뿌리가 자랄 때 돌들과 부딪치지만 돌들은 내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큰 바위보다 처리하기 훨씬 더 쉽다. 내 안에는 어떤 부드러움과 연한 것이 있다. 나는 매일 순간마다 주님께 부르짖는다.

오셔서 더 일을 하소서. 더 전진하소서. 저를 더 얻으소서. 제 안에 뿌리를 내리소서. 저는 당신 안에 속했나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 온 존재가 당신과 하나 될 때까지 당신께 제 자신을 드립니다.

그러면 즉시 바위는 사라진다.

우리는 겉으로는 아주 좋을 수 있다. 하지만 표면 아래의 우리는 우리의 결정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결정이 주님의 이끄시는 것인 척 한다. 우리가 바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의 결정은 주님의 결정을 대체하지 못한다. 주님은 행하시지만 우리는 바위에 의해 막히게 된다. 주님이 우리 안에 자라게 하셨지만 우리는 바위로 인해 무엇이든 시들게 하고, 죽게 한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모든 것을 뿌리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있는 자가 되기 위해 그분의 뿌리심 안에 거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의 갈망을 확실하게 하신다면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들을 귀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가지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왜냐면 우리가 항상 쓰임을 받고, 그분의 이끄심을 위해 준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위는 쉽게 처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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