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새벽이슬처럼

가시를 내는 토양

Hernhut 2019. 2. 26. 20:21


 

더러는 가시나무들 사이에 떨어지매 가시나무들이 돋아나 그것들을 숨 막히게 하였느니라.(13:7)

세 번째 종류의 토양은 가시나무를 내는 곳이었다. 이 토양을 나쁜 토양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어느 쪽이냐면 이 토양은 너무 좋은 것이었다. 모든 식물은 뿌리를 뻗기 너무 쉽기 때문에 그 토양에서 자라기를 원했다. 주님은 이 토양을 대표하는 사람을 설명하셨다.

가시나무들 사이에 씨를 받은 자 또한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가 말씀을 숨 막히게 하므로 열매 맺지 못하는 자니라.(13:22)

우리가 가능성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가 장래성을 보면 볼수록 모든 것이 우리의 유익함을 얻기 원한다. 부의 기회와 약속이 가득한 세상은 우리를 모이도록 촉구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 회사로 오라.

우리 사무실로 오라.

우리 대학으로 오라.

우리에게 와서 당신의 삶을 보내라.

하지만 우리가 자라는 한 늙고, 우리의 잠재력은 사라진다. 이런 것들은 우리를 뒤따라오지 않는다. 마침내 우리는 주님의 곡식이 자라고 있어야 하는 토양을 사라지게 하는 가시나무가 자라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시나무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로 받은 가시나무다(3:1718). 땅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저주받았다. 가시나무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저주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우리를 미혹하는 세상의 것들은 죄를 지을 필요가 없지만 저주의 대상이 된다. 영화도, 소설도, 인터넷도, 전화도, 텔레비전도 죄가 아니지만 우리를 붙잡고, 우리 안에서 자라기 시작하고 하나님께서 뿌리신 것을 대체시킨다.

가시나무가 자라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것들이 너무 빨리 자라기 때문에 일어난 일을 전혀 모를 수 있다. 그것들은 너무 합법적이고, 적절하고, 정상적이고, 용납할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에 따르면 가시나무들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세상 안에서 자라고 있는 모든 것을 저주하셨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들과 기회로 둘러싸여 있다.

젊은 부부가 좋은 집을 원하는 것은 합법적인 것이다. 또 가족이 늘어나는 것처럼 그들은 더 큰 집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더 큰 집에 대한 이런 갈망이 뿌리 뻗고, 우리 안에서 자라기 쉽다. 그런 생각, 갈망은 필요성을 넘어서는 것이요, 세상에 속한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된다. 더 큰 집을 갖으려는 우리는 돈을 더 벌기 위해 더 긴 시간을 일해야 한다. 우리는 대출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빚더미에 앉게 된다. 그것은 우리 교회생활과 성도들과 함께 시간에 대해 우리를 도둑질을 하게 함으로 우리에게 저주 받게 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어떤 것을 하시기 원하시지만 너무 늦다. 가시나무는 우리가 해방되기에 너무 두껍게 자라나 있다.

자동차, , 우리 삶에 필요한 것 역시 똑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우리 생활에 얼마나 많은 가시가 있는지 믿을 수 없다. 그 가시들의 유일한 기능은 우리를 붙잡는 것이요, 우리의 생활을 압박하는 것이요, 주님에 대한 완벽한 우리의 사랑을 빼앗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생활의 요소들이 우리를 압박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활 가운데 우리를 장장을 저해시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요, 우리는 그것을 던져버려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합법적이고, 적절한 이유가 되고,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이유가 되지만 생명 안에서 합당하게 자라는 것을 막는 한 우리는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가시나무와 함께 자라는 것을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주님께서 뿌리신 것만으로 자라기를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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