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회복을 통해 셋의 임명됨을 체험한 후 불행하게도 선악을 알게 하는 노선에 그들 자신이 연합해 버린다. 극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회복된 후 에노스로 넘어가야 그리스도인 삶을 계속해서 산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기들이 연약하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생명 노선에서 살기를 노력하는 이들로서 셋의 선택됨을 체험한 후 우리는 에노스의 영원히 살 수 없음을 체험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내가 부서지기 쉽다. 약하고 주님이 필요하고, 주의 긍휼이 필요하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내가 정말 쉽게 부서지는 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천연적으로 자랑스러워한다. 우리는 자기가 “어떤 누구”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에노스가 체험적이어야 하는 이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가장 깊은 축복 중의 하나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부서지기 쉽고, 영원히 살 수 없고, 약하다. 그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분을 부를 수 있을 뿐이다.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우리가 절실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분이 필요하므로 그분을 부른다. 우리는 그분 없이 우리가 전진해 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에노스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생명의 노선에서 자랄 수 있다. 우리가 자라면 자랄수록 우리가 에노스라는 것을 더 알게 된다. 강한 자로 자란다기보다 더 약한 자로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더 제한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으로 체험이 있기 전에 우리는 모든 이를 압도할 수 있지만 이젠 모든 이들이 우리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생명의 노선에서 자라면 자랄수록 우리의 약함과 영원히 살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얻는 모든 것은 “나는 에노스야!”라고 아는 것에서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그분에 의해 쓰임 받을 수 있다.
'빵과 음료 > 복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할랄렐에 대한 우리의 체험 (0) | 2018.06.02 |
---|---|
에노스가 게난을 낳는 것에 대한 우리의 체험 (0) | 2018.06.01 |
셋에 대한 우리의 체험 (0) | 2018.05.31 |
생명의 두 방식(요약) (0) | 2018.05.31 |
사람을 돌보기 위해 내려감 (0) | 2018.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