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우리가 적은 영적인 얻음만을 가질 때 우리는 달라진다. 우리는 자기에 대해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주님을 가장 사랑해!”
우리는 자기를 아주 높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때가 돌봄이 필요하고, 내려가는 방법을 배울 때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 같은 사람이 우리 주변을 편안함을 느끼게 할 수 있고, 우리에게 그를 맡길 수 있을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여자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우리는 그녀에게 말하게 된다.
“신성한 경륜을 위해 하나님을 찬양하라. 신성하고 신비로운 영역을 누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오, 얼마나 놀라운 유기적인 구원인가!”
그 여자는 우리를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심지어 우리가 말하는 것을 알지도 못한다. 그녀가 우리 위치에서 어떤 내려가는 것을 보지 못하면 그녀는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녀가 보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얻는 누군가이고, 어느 정도까지 그녀보다 높아 보이는 누군가이다. 그녀가 관련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가까이하기 어렵다. 우리는 마할랄렐이지만 우리 체험 가운데 야렛이 없다.
야렛은 마할랄렐에 의해 태어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음으로 게난이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 마할랄렐이 된 후 우리는 내려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살았던 방법이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 것은 어찌하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고전 9:22).
우리가 야렛이 되는 것은 약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가 약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내면적으로 영적이더라도 비영적인 우리는 영적으로 처신하지 않는다. 새 사람이 모임에 갈 때 그들이 주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처신하고 말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내려가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누군가를 돕는 방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여러 유형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야렛이 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내려가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내려가는 것은 우리가 합리적인 태도를 느슨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야렛을 체험하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와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관까지 가는 것으로 내려가지 말아야 한다.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야렛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 건강한 영적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구원받지 않은 이들, 더 약한 이들, 젊은 형제와 자매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인간적인 것을 배우고, 높지 않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목적을 위해 밀접하게 접근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 마할랄렐이 되었을 때 우리는 야렛이 되는 것을 배우고, 내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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