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7절에 관해 케네스 웨스트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여, 혹은 내가 나의 마음에 너희를 가졌기 때문에’라는 표현은 ‘너희가 너희 마음에 나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헬라어 성경의 문맥상 더 자연스럽고, 문법적으로도 맞다.
당신의 마음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들의 마음에 주의 종인 자신을 가졌다는 것에 격려를 받았고, 정말 감사하고 있었다.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다 은혜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것은 또 다른 곳에 있었던 빌립보 성도들과 사도가 한 곳에 있었다는 것이 다르지 않게 되었다. 빌립보 성도들이 그들의 마음에 바울을 가졌기 때문에 바울이 누렸던 같은 은혜를 그들도 누렸다. 마음에 바울을 가졌던 빌립보 성도들은 그리스도부터 바울에게 온 모든 은혜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었다.
이 구절이 설명하는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심리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혼자서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가졌고, 교회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하고, 우리 자신에게 효율적일 수 있다고 느낀다. 우리는 우리의 성장과 발전이 우리 마음에 가지고 있는 누구를 의지하는 것을 깨닫는 것을 실패한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아주 많은 교리들을 알지만 왜 주님에 대한 아주 적은 표현을 가지고 있는지에 궁금해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절에서 우리가 셀 수 없는 교사들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아버지들은 없다고 썼다. 교사들은 잠시 동안 우리를 훈련시킨다. 하지만 그들의 일이 끝났을 때 그들은 우리 마음에 없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우리의 성장을 돌보고, 우리가 충분히 자랄 때까지 방법이 무엇이든 간에 필요를 위해 우리와 함께 수고한다. 이것은 달콤한 생명관계를 산출한다. 아버지는 우리 마음에 있다. 그들은 우리가 건강한 방식으로 자라게 할 보장(保障)이다.
왜 은혜가 부족한가? 그것은 모두 우리의 마음의 문제다. 사도바울이 설명한 것은 생명연합니다. 사도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은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고, 그들 마음 안에 서로가 있었다.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과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기에 그들에게는 큰 축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