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복음칼럼

겸손케 되는 만큼 성장함

Hernhut 2014. 9. 17. 11:00

 

그릿 시냇가에 가기 위해서 엘리야는 요르단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요르단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 이름은 내려가기, 강하하다.”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은 땅에 들어가려고 건넜던 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12족속을 대표하여 강바닥에 12개의 돌을 세웠습니다(4:9). 이스라엘의 모든 족속들은 거기서 수몰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요단강 건너로 보내셨을 때 그분은 엘리야에게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도록 요구하고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이긴 것으로 너무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낮아짐이 없이 엘리야는 그의 남은 생애동안 이 영광스런 순간을 반복해서 다시 체험했을 것입니다. 성장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높은 자부심과 자긍심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주를 사랑하고 그분을 따르기 시작했을 때 어떤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중요했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교회의 미래였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미래는 그 지체들 스스로가 낮아지고, 요르단 죽음의 물로 내려감으로 이기심이나 빈 자만심에 대한 그들의 느낌에서 벗어나는 그 지체들에게 달려있습니다(2:3, 5).

 

그러므로 엘리야는 요르단 동쪽에 있는 그릿 시냇가로 갔습니다. 이 개울의 이름은 자르다, 찌르다, 뚫다, 살해하다를 의미합니다. 엘리야가 단지 내려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잘리고, 찔리고, 살해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요르단 강으로 내려가고, 그릿시냇가로 간 후에 하나님은 그가 점점 더 낮아지도록 그를 꺾으셨습니다. 자르심으로 자르시는 하나님은 엘리야가 뽐낼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빼앗으시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꺾인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으스대는 신기한 모든 것을 잘라낼 작정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자신감을 꺾으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에 우리를 꺾으시지 않고, 반복해서 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것조차도 꺾으실 때 우리는 정말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고 주님, 이 꺾으심을 통해 저는 기뻐합니다. 끝난 것을 찬양합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꺾으심을 통해 우리가 되었지만 더 큰 꺾으심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통과하기 어려운 과정이지만 주님 안에서 우리의 성장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제게 부드럽게 하옵소서. 저를 너무 많이 꺾지 마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완전하게 꺾으실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작은 개울에서 물을 마시고, 까마귀로 하여금 먹을 것을 먹이게 함으로 살아야 했습니다(왕상 17:4). 이것은 낮아지고 끊어내는 과정의 부분이었습니다. 까마귀는 썩어가는 고기를 먹고 사는 더러운 새입니다. 이 까마귀들은 시체들을 먹은 부리로 엘리야에게 고기와 빵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까마귀들이 엘리야에게 가져온 고기의 종류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갈비가 아님을 보장합니다. 그것은 아마 특이한 어떤 것이었지만 적어도 엘리야는 그것을 요리함으로 그것을 살균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까마귀가 빵을 가져왔을 때 그는 그것을 다시 요리하거나 깨끗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모두 먹었습니다.

 

 

엘리야는 얼마나 이런 굴욕적인 모습으로 살았을까요? 내 생각으로는 적어도 1년은 그렇게 살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엘리야는 그가 이런 불결하고 부정한 환경 가운데서 깨끗하고 정결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단지 이런 더럽고, 불결한 까마귀들의 곁에 있지 않았고, 매일 그는 까마귀들에게서 먹을 것을 받아먹었습니다.

 

불결한 까마귀에 의해 먹을 것을 먹게 된 엘리야는 우리 주변에 있는 세상적인 사람들과의 친분관계에 대한 그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처럼 우리는 모든 면에서 정결치 않은 많은 사람들 한 가운데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땅 바닥을 세 발작 이상을 떠서 걷지 못하고, 모든 순간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과 관계 있는 정결치 않은 이웃들, 동료들, 주변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정결하지 않은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지만 그들은 그들이 그들의 문제들을 우리에게 말할 수 있고, 우리는 기꺼이 그들과 함께 있고,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주위에 있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돕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들에 의해 먹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떻게 친구가 되셨는지를 기억해 보십시오(9:10, 11:19). 예수님은 그들의 죄에 참여하시지 않으셨지만 항상 그들과 함께 말하고 먹는 것을 즐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물에서 죄가 있는 여자에게 좋은 소식을 나누신 후에 그분의 제자들에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4:3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아주 더러운 까마귀에 의해 먹여짐으로 배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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