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복음칼럼

제련되는 만큼 성장함

Hernhut 2014. 9. 18. 18:00

 

엘리야에 대한 첫 번째 주님의 훈련은 그가 낮아지게 하고, 꺾이고, 굴욕을 받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후에 개울조차도 메말라버렸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더 고통을 받는 원인이 되었지만 그것은 주님께서 영적성장의 또 다른 단계를 엘리야에게 주시는 의미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은 흥미롭습니다. 가끔 하나님은 우리를 요르단강 앞 그릿 개울 아래로 가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랑과 자만심을 꺾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건강한 성장과정으로 우리는 정말 메마르게 됩니다. 그릿 개울은 메말랐습니다.

이런 점에서 좌절하고 주님, 제가 낮아지고 꺾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지라도 저는 그런 상태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지금 개울은 메말랐습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기도하기 쉽습니다. 사실상 이 메마름은 성장의 또 다른 단계로 이끕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것은 새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가 우리의 모든 생활을 누리라고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라는 것처럼 이러한 것들은 조금씩 우리를 준비시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라도록 돕는 바로 그것들은 또 다른 단계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메마르도록 한 것만큼 우리가 그분 안에서 더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전진하는 것을 준비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더 풍성한 축복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엘리야는 물이 메마르기 시작했을 때 절망적이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거하라. 보라, 내가 그곳의 과부 여인에게 명령하여 너를 돌보게 하였느니라”(왕상 17:9) 사르밧은 제련, 정제, 고상함, 세련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엘리야가 왕에게 말을 하고 개울 옆에서 살고, 또 까마귀에 의해 먹을 것을 구했을 때 여전히 광야에 있었기 때문에 엘리야를 제련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이 광야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제련하시는 주님의 사역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를 낮아지게 하고 꺾이게 한 후 주님은 우리를 제련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새로 믿는 많은 이들은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완전히 광야에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이것은 그들이 되는 방식입니다. 사람 생명에서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거친 경향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아버지들과 논쟁을 하고, 그들의 어머니의 감정에 상처를 줍니다. 그들이 생명을 체험하고, 더 자라기 시작하자마자 거칢이 사라지고, 더 멋진 사람이 됩니다.

 

엘리야가 왕 앞에 나타났을 때 거친 영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더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그릿으로 보내셨습니다. 주님의 꺾으심이 그를 자라게 하고, 덜 자랑하게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하나님의 제련을 받기위해 사르밧으로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도시 안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뭇가지를 줍는 과부를 만났습니다. 목이 몹시 말랐기 때문에 엘리야는 즉시 자기에게 물 좀 가져오도록 그녀를 불렀습니다. 그녀가 물을 가져왔을 때 그는 또 빵을 좀 가져오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 당신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내게는 납작한 빵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이니이다. 보소서, 내가 나뭇가지 두 개를 줍고 안으로 들어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해 그것을 차려서 우리가 먹고 죽으려 하나이다”(왕상 17:12)라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이 절망하는 과부에게 대답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가 말한 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해 작은 빵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뒤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해 만들라. *{}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가 비를 땅 위에 내리는 날까지 가루 통이 고갈되지 아니하고 기름병이 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느니라”(왕상 17:13~14)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엘리야와 과부사이의 차이가 보이십니까? 엘리야는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부는주 당신의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으로라고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는 성숙의 다른 단계에 있는 세 믿는 이들이었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어린 사람들은 더 성숙한 자들에게 주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약간 성숙을 가진 사람은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성숙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와 과부 둘 다 하나님에 대해 말을 했지만 그들은 다른 두 레벨로 그분을 간주했습니다. 과부가 주님께서 엘리야의 하나님이셨다고 알았다할지라도 그녀는 주님께서 경영하셨던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알고 있던 모든 것이 음식을 더 요청하는 사람을 위해 충분치 않은 음식만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그 음식만 먹고 죽으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고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엘리야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간단하게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주님은 그분의 증거를 좋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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