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새벽이슬처럼

왜 다시 회개함으로 새롭게 함이 불가능한가?

Hernhut 2014. 9. 10. 13:00

 

12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과 관련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정인 면을 가기고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그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네피림들로 점령된 원주민들은 강했고, 성곽도시에서 살았습니다(13:26~29, 32~33).

 

사람들을 간곡하게 촉구하는 갈렙과 여호수아는 우리가 당장 올라가서 그 땅을 소유하자. 우리가 능히 그것을 이기리라”(13:30)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우리가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니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13:31)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고를 듣고, 두 권고를 들었지만 그들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보고보다 오히려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믿었습니다. 그들의 결과적인 행동은 모든 것을 말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서 이집트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절정에 이르는 문제는 그들이 또 다른 지도자를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기를 추구했다는 것입니다(14:1~4).

 

실재에서 그들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셨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가장 극심한 심판이 책임이 있는 모든 세대에 선포되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20세 이상의 세대들로 구성된 자들 모두는 광야에서 전복되었습니다.

 

한번 배교는 다시 회개하여새롭게 될 수 없는 심판이 일어났습니다. 실제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다시 그려지는 이유는 그들이 그들 중심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승리하셔서 그들을 이끄시려고 하셨던 그분을 비난하고, 수치를 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마음의 변화는 이스라엘이나 그리스도인의 부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분입니다.

 

바로 그 다음 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회개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바꿨습니다. 그들은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돌이키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 땅으로 그들이 들어가는 것과 적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과 관계가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떠나 그 땅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엄청난 고통과 되돌림을 당했습니다(14:40~45).

 

그것은 히브리서 6:4~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멜기세덱 계통을 따른왕 같은 대제사장으로서 다스리시러 오시는 그분 아들에 대한 성숙한 지식을 갖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하신 후 그 그리스도인이 배교한다면 모세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인은 부르심을 둘러싸고 있는 일과 관련되어 있는 한 그리스도로부터 끊기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가 부르심을 받았고, 대적과 전투에서 승리했던 하늘에 속한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그가 이미 차지하고 있었던 위치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회개함으로 다시새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나중에 그 문제에 관해 자신의 마음을 바꿨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을 바꾸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인은 피 우편에 던져지게 되겠지만 그의 부르심의 목표와 다른 쪽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은 이런 행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고, 훼손을 가져올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행동에 대해 강한 심판으로 그를 대하십니다.

[하나님][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6:6) 여기서 새롭게라는 단어는 헬라 원문에는 없는 단어입니다. 그런 생각은 아들을 두 번째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갈보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치와 모욕과 관계가 있습니다(7:27).

 

하지만 세상 편에서 아들을 이 같은 형태의 수치와 모욕하는 주제는 오늘날 가능합니다. 이런 수치와 모욕은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행동처럼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이 떨어져 나가는 행동의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이런 방식을 따라 떨어져 나가는 것은 두 가지 것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땅 위로 가져오시는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관련 있는 것들에 대해 성숙한 지식과 이해를 자져야 합니다. 그 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앙을 버렸던 것처럼 배교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땅에 속한 그 땅으로부터 눈길을 돌리고 이집트로 갔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하늘에 속한 땅으로부터 눈길을 돌리고 세상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체험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굴욕과 수치 당하시게 할 것입니다. “자신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다라는 표현은 사실상 나머지 구절로 설명되었습니다.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를 통해 굴욕과 수치를 주는 것이 다가오는 세상 통치자의 주제입니다. 세상 통치자는 오늘날 세상 체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앞에 있는 것에서 돌아보게 하는 사탄입니다. 사탄과 세상의 것은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6:3) 하나님께서 가르침의 기초를 떠나 완전하고 성숙한 것으로 나아가게 하시면 우리는 다가올 땅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통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로 성숙하게 나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