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아담 vs 그리스도

이기는 이들의 특성(II)

Hernhut 2013. 4. 18. 22:21

 

기꺼이 고난을 당함

두 번째 특성에 와서 우리는 아주 광범위한 부분을 덮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것은 신약성경 많은 곳에서 여러 형태로 볼 수 있다. 주제는 전체적으로 정말 가치 있는 책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개요가 이 메시지를 읽고 누리는 이들에게 알맞고 강한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을 다만 기도할 수 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는 마음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슬픔의 사람이요, 고통을 잘 아는 자”(53:3b)이셨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로서 우리는 또한 우리의 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아야 될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을지니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라.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無名)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2:5~8)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이는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가 이미 죄를 그쳤기 때문이라. *그런즉 그는 자기 육체의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들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리라.”(벧전 4:1~2)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 아니라 그분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것도 주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주셨음이라.”(1:29)  

경계의 말씀은 여기의 순서대로이다. 그리스도인 삶에서 고난을 받는 문제가 오해를 받았던 그리스도인들 몇 명이 있었다. 고난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그들의 시도에서 그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고행을 훈련 했었다. 그러나 성경은 스스로를 위해 받는 고난과 단순히 종교적인 자기 거부는 가치가 없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한다(2:20~23). 우리는 또한 병적인 방법 안에서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을 신중해야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고난을 받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고난 받는 것과 연결된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목적으로 우리의 욕망을 죽이고 기꺼이 고난을 받아야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돌쩌귀가 달린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던 그리스도의 실례가 있다. 또한 환경(상황)적 고난들은 우리를 더 영적으로 만들어 우리가 이와 같은 고난의 뜻을 생각하도록 하기 때문에 우리가 꾸미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주권적인 분배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벧전 3:17, 4:19).

예수께서 기꺼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문제를 가르치신 한 부분의 구절을 보기로 하자.

이때부터 예수님께서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 다시 일어날 것을 자기 제자들에게 비로소 보이시니 *이에 베드로가 그분을 붙잡고 만류(輓流)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임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거늘 *그분께서 돌이키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실족하게 하는 자로다. 이는 네가 하나님에게서 난 일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에게서 난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로다, 하시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면 찾을 것임이라. *사람이 만일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혼과 바꾸겠느냐? *이는 사람의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영광 중에 자기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그가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대로 갚아 줄 것임이라.”(16:21~27)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의 걸림돌이 되었고 심지어 사탄이 됨을 보게 된다. 문제는 고정된 사고방식이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케네스 웨스트(Kenneth Wuest)에 의해 확대 번역본을 읽으면,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것들을 위하는 생각을 갖고 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것들을 위하는 생각을 가지고 하기 때문이라.’(23). 여기서 생각을 뜻하는 단어는 정신적인 뿐만 아니라 또한 욕망과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의지도 포함한다.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의 욕망의 상실로 사람이 기꺼이 고난을 받지 않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행복과 만족함을 얻도록 기꺼이 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죽음에 넘기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분의 뜻을 옆에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그 십자가)을 허락받기위해 기도 하셨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던 것이다.

 

위의 25절에 있는 생명(life)”에 대한 그리스(헬라)어는 프슈케(psuche)”인데 이것은 혼(soul)을 의미한다. 26절에 있는 혼(soul)로 번역된 단어와 같은 단어이다. 24절에서 자기 스스로(himself)”에 대한 단어이지만 프슈케가 아니라 그것은 이 구절에서는 같은 것으로 적용되었다. 이것은 문맥상으로나 누가복음 9장의 같은 구절에 의해서 입증된다. 눅가복음 9:25에서는 자기 스스로(himself)”를 잃어버린다고 말하고 또 마태복음 16:26에서는 (soul)"을 잃어버린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라 혼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혼을 보존하거나 구원한다는 의미는 가능하다면 온 세상을 얻는다는 개념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의 만족함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자기 혼을 잃는다는 것은 만족하는 어떤 것들을 잃거나 혼과 목숨과 행복 등을 잃음으로 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우리가 기뻐하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자발적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다.

나는 아주 젊었을 때 가진 체험을 결코 잊지 못한다. 어떤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그곳에서 주님을 체험하였으나 난 그때까지는 이 분야에서 배울 것이 너무 많았었다. 교회와 선교모임의 한 부분에서 주님의 좋은 영적 사역자로 있었고, 또 그곳에 많은 진실하게 주님을 찾는 이들이 있었다. 어느 날 장로형제의 인도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는 어느 정도 나를 감싸 안았다. 우리는 수시로 우리 교회에 참석하고, 선교모임에 참여하는 젊은 대학생들이 방문했다. 방문 후에 그가 나에게 와서는 한 젊은이에 관해 말했다. 그는 이 특별한 젊은이는 우리 모임에 지속적인 회원이 결코 되지 못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밝혔다. 그 이유는 그(장로)가 그 젊은이는 우리가 하고 있는 만큼이나 뜨겁게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너무 많은 댓가를 지불하는 그의 생활양식을 좋아했다는 것을 분별하여 너무나 두드러지게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고 특정한 장소에서 식사하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관하여, 그가 여유시간을 얼마나 즐기는지에 대해서 그의(장로)의 언급한 것으로 충분했지만 그 현명한 장로형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의 결정적인 요소는 그의 그리스도인의 생활 안에서 놓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 장로형제의 예언은 완전히 정확하게 밝혀졌다. 그 젊은 사람은 비록 몇 명의 친구들이 활동했지만 주님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에게 결코 가입하지 아니했다.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위한 규칙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라. 혼의 즐거움을 버리고 기꺼이 고난을 받는 마음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는 실제로 어떤 즐거움을 버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성령(하나님의 뜻)의 인도하심을 받는 문제이다. 다시 나는 하나님의 뜻인 전적으로 의지하여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지적하기를 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기꺼이 기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만을 한 후에는 하나님의 뜻이 그분께서 허락하신 것이든 아니든지 우리에게 명확히 나타나게 된다.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면 안에서 자라고 또 그분께 아주 가까이에서 교제를 유지함으로 해서 그분의 소망은 우리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큰 소망들은 변화를 겪게 됨으로서 그분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든 그런 것이 아닌 것이든 간에 그분의 뚜렷한 인도하심의 문제가 아니다.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여진 우리의 강한 소망들은 사람들의 힘과 능력을 잃게 해서 사람들의 만족함을 얻는 방법으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사용한다.

나는 내 경험에 관해 말하려는 것을 실례를 들기로 하겠다. 그리스도인 생활 안에서 아주 오래전에 나는 어떤 좋은 성경 역본을 갖고 성경공부에 참여했는데 교제 안에 있는 어떤 믿는 무리들을 보게 됐다. 나는 게다가 좋은 사람을 정말로 좋아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어쩌면 그를 얻기 위해서 나가기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이것을 고려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성령에 의해서 몹시 근심에 빠졌다. 어떤 것들은 합당치 않았다. 내가 그를 얻는 쪽으로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점점 더 주님과의 교제가 무너짐을 느꼈다. 평안은 나를 떠나고 있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이 체험을 이해하려고 했을 때 자랑해 보이려고성경공부를 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경공부를 위한 열망의 그 뿌리에는 자기 스스로의 영광이었으며, 주님으로부터 온 열망은 아니었다. 나는 주님께 굴복했으며 그 성경공부를 얻지 않았다.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한 가지 더 나누기를 원한다. 그 체험을 한 1~2년 후쯤에 난 두 젊은 청년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기 위해 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우리는 가구가 많이 없어서 밖으로 나가 식탁과 거실 가구 몇 가지를 구입했다. 그 후 또 난 갈색 가구에 맞는 그릇들을 사기로 결정했다. 그릇들을 사기 위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성령께서 나를 방해하셨다. 내 안에는 평안이 사라지고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은 우리에게 몇 가지의 그릇이 있었으나 나의 혼이 개인적인 미()의 어떠함을 추구함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나의 사랑하는 것을 방해하셨던 것이다. 나는 세상 것들을 사랑하고 있었으며(요일2:15), 나의 방향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을 성령께서 나에게 신호를 보내셨다. 나는 또 주님께 굴복했고 그릇을 사려고 했던 아의 욕망을 포기했다. 그때 나는 위의 두 체험으로 주님을 정말로 추구하고 있었으며, 또 그분을 기쁘시게 할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어떠한 체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전심으로 주님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당연하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리스도의 기쁘심을 위해 혼의 욕망을 소멸시키고 기꺼이 고난을 받기 위한 상태로 살고 있었던 나는 위에서 기록한 것처럼 성령으로부터 강한 간섭들을 받아 강한 욕망들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안다. 나는 아직까지 자아가 일어날 때 주님으로부터 간섭하심을 받지만 그때로 돌아가는 것으로 인해 아무것과 전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 자아를 기쁘게 하려는 욕망이 종종 되돌아가려고 하거나 때때로 주님의 소망에 의해서 겉으로 보기에는 그것들 앞에서 제압하려고 강력한 힘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안다. 우리는 우리의 목숨을 걸고서 그리스도의 체험을 더 하도록 성령에 의해 다만 조절되어 자라야만 한다(3:4). 우리의 타락한 혼은 많은 것들에 의해서 즐거워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하며, 만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에 의해 제지되지 않은 그것의 만족함을 가지려고 그것을 허락한다면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생명을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그분의 비유에서 이 문제를 그리셨다. 그분은 열매 맺는 생명은 물질적인 것들과 쾌락을 위한 우리의 욕망에 의해 실패될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진 자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나아가다가 이 세상 삶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으로 숨이 막혀 완전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라.”(8:14)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을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우리의 소유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고 가야만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33)

우리의 혼은 가족과 가정생활의 즐거움과 심지어 우리의 생활을 위해서 그분의 능력을 깨닫고 또 완전히 주님을 따르기를 계속 할 수 있는 좋은 것들로 아주 소중히 감쌀 수 있다(10:37~39, 10:29~30). 우리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지 않는 예배에서 어떤 만족함을 갖기 위한 우리의 혼의 용납에 의해 순수함이 더럽혀 지게 되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봉사와 예배를 허락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가능하다. 이러한 유형이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발생했는데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마치 주님께 예배를 하는 것처럼 그 금송아지를 숭배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혼의 갈망을 만족함을 얻기 위해 그들의 숭배를 기쁨으로 혼합되었다.

 

다음 날에 그들이 일찍 일어나 번제 헌물을 드리고 화평 헌물을 가져오며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32:6).

이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성령께서는 고린도전서 107정에서 우리에게 우상숭배 자들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인용된 구절은 금송아지의 우상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에 대해 적용시키신다. 오히려 우상 숭배를 수반한 것, 즉 오락으로 흡족한 활동을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기쁨을 위한 욕망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정말로 어떠한 우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놀았도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10:7)

골로새교인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遲體)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3:5) 오늘날 기독교의 습관들은 비 성경적인 전통들로 엮여 있다. 이런 경우에 어떤 방식 안에서 사람의 혼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러한 전통들을 버리려고 시도했다면 대분분의 기독교인들은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전통을 반대하는 데 매우 강하셨다. 하나님의 말씀 그 전통으로 있는 상태를 무효화했다(15:6).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전통을 버림으로서 여러분의 혼을 만족케 하는 것을 버리고 기꺼이 고난을 받겠는가?

 

우리는 앞의 강의에서 기꺼이 고난을 받는 문제에 대해 보았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의 혼의 만족함을 버리고 기꺼이 고난을 받는 것에 주의를 집중되었다. 우리는 이제 기꺼이 고난을 받는 두 가지 측면을 더 보게 될 것인데 하나는 이 강의에서 하나는 다음 강의에서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측면들은 우리를 덮고 있는 첫 번째 측면을 틀림없이 포함하고 있음을 말해야 하지만 나는 우리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고난의 능력을 완전히 보도록 우리를 위해서 그것들을 별개의 문제들로 볼 필요가 있음을 믿는다.

 

'컨퍼런스 > 아담 vs 그리스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기는 이들의 특성(IV)  (0) 2013.04.18
이기는 이들의 특성(III)  (0) 2013.04.18
이기는 자들의 특성(I)   (0) 2013.04.18
은혜 아래에서(II)  (0) 2013.04.18
은혜 아래에서(I)  (0) 2013.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