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이어서 계속 은혜 아래에서를 시작하는 메시지이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과 은혜 아래에 있는 것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신 말씀 안에서 명령들과 계명들의 역할을 고려해야만 한다. 기독교 역사 곳곳에서 어떤 기독교 교사들(목사들)은 율법이 믿는 이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믿는 이들에게 놀라워했다. 이 교사들은 믿는 이들이 죄 안에서 살려는 경향이 있어서 성경적인 계명들을 소홀히 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법 없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놀랐다. 역사적으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들을 살기 위해 그런 것들을 용납하므로 서 이 같은 방법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해방의 개념을 왜곡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올바로 이해하라.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은 성경적인 명령에 대한 경시를 수반하지 않는다. 은혜 아래에 사는 생명은 우리가 아무리 소망한다 할지라도 자유롭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붙잡고 깨달아 “율법 아래서” 살아가는 방식과 우리가 그 생명을 사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 아래에서” 사는 것은 내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서 외적인 계명으로 사는 것을 포함함을 기억하라. 그것은 독립적이다. 은혜는 성령의 공급과 지배 아래서 사는 것을 수반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내 마음 안에서 그분의 은밀한 수행하고 계신 모든 것 즉 내게 보여 주시는 그분의 뜻과 그분의 뜻을 행하시기 위한 내게 공급하시는 그분의 힘을 하나님께 의지한다.
본이 되신 예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따르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그분이 세우신 본을 보아야만 한다. 땅에서 사시는 동안 예수께서는 영광스런 그분의 입장을 버리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입장을 취하셨다(빌 2:2~8). 성경은 분명히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사셨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분의 그 생명 사심이 너무나 유익하시다. 우리 성경을 보기로 하자.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내가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이는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이를 것과 말할 것을 친히 명령으로 주셨음이니”(요 12:49)
“다만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하노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요 14:31)
“내가 아버지의 명령들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명령들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인용된 마지막 구절은 그분께서 그분의 아버지의 계명을 행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계속해서 지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님께서 지키신 계명들은 그분은 그분의 아버지와 함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사시면서 이시고 계셨음을 주의하라. 요한복음 12:49절에서 예수께서 “계명을 나에게 주신 분이 아버지 자신이시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헬라어에서 이 구문은 예수께 계명을 스스로 주시는데 관련되어 있음을 아버지를 강조하여 묘사한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행하시느니라.”(요 14:10)
이 마지막 구절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 직접 명령을 주시는 분이 아버지이시지만 아버지께서는 그분이 명령을 수행하시도록 하기 위해 그분 안에 사신다. 나는 이와 같은 구절을 윌리암스역에서 읽기를 좋아한다. 윌리암스역본을 한글로 해석하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와 연합되어 있고, 아버지께서 나와 연합되어 있음을 믿지 않느냐? 나는 내 스스로의 권위로 이것을 말하지 않고 나와 연합하여 항상 머무르고 계신 아버지께서 그분 스스로 이것들을 행하고 계시느니라” 이것은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급하심이다. 이것은 은혜이다. 그렇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사람으로서 그분의 의지하는 신분 안에서 은혜가 필요하셨다. 다음 구절을 읽으라.
“다만 예수님을 보노니 이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사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계명들과 이기는 그리스도인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포함하고 또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으로부터 논쟁할 여지가 없다(요 14:15, 고전 7:19, 벧전 4:2, 요일 2:3~4, 3:22, 24). 그러나 우리는 법 아래에 있음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죽었고, 또 다른 곳인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어야 했으며,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열매를 맺어야만 했다(롬 7:4).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믿는 이들을 위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사역하시는 것 외에는 결코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을 체험하는 영역인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롬 1:9, 7:6, 고전 6:17).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명들을 기록하심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방법들을 반향 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원칙들과 명령들은 그분 자신과 동등하다. 우리의 손 안에 있는 육적인 말은 우리 안에서 거주하시는 살아있는 말씀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요 1:1, 계 19:13). 그러므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안에 계신 성령이시다. 그분은 그분의 거룩하신 말씀으로부터의 원칙과 성경구절로 우리에게 직접적이고 정확하고, 경고나 책망으로 자주 말씀하실 분이시다. 우리의 추구는 하나님 자신이지만 우리는 종종 그 영의 충만한 말씀과 성령의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분을 만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로 성령께서 특정한 상황에서 필요로 함으로서 정확하고 개인적이며, 또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사용하실 수 “언어”이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몇 구절을 생각해 보겠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 후3:16)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권능이 있어 양날 달린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骨髓)를 찔러 나누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니”(히 4:12)
“위로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 그분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였든지 다 기억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러나 너희에게는 그분에게서 받은 기름부음이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기름부음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또 그것이 진리요 거짓이 아닌즉 그 기름부음이 너희를 가르친 대로 너희가 그분 안에 거하여야 하리라.”(요일 2:27)
아마도 우리가 다른 구절들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이 네 구절들은 그분의 명령을 포함한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들을 어떻게 하시는지를 우리에게 함께 생각하도록 보여준다.
첫 번째 구절에서는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생명 안에서 이해하고 또 지배받는 모든 종류를 위해 유익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히브리서인 다음 구절은 이 성경이 살아있고 영 안에 있은 우리의 은밀한 곳에까지 꿰뚫으며 우리의 마음의 생각들을 명쾌히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 성령께서 무엇이든지 말하기 전 알맞은 그 때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실 것임을 보여준다. (이 구절의 엄밀한 해석은 문맥상으로 봐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포함한다. 그러나 의심할 바 없이 우리의 생에 관련하여 성령께서 종종 우리에게 이 구절들을 기억나게 하신다).
마지막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움직이심을 표현하고 모든 것들에 관해 가르치시며, 또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여 가르치신 대로 움직여 순종함으로 반응하도록 하는 기름 부으심을 본다.
의심할 바 없이 다른 구절들에서 보는 것처럼 기름부음은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성경을 사용하실 것이다. 성경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언어”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 안에서 기름 부으심으로부터 어떤 내적인 거부감이나 조급함을 느낄지 모르고 또 우리는 종종 우리의 통달한 생각으로 성경의 이해에 의해 우리 영 안에서 이러한 느낌들을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그 영은 이기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밀접한 관계를 갖고 간다. 만일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여 추구하는 것을 포함하여 그분을 진실한 마음으로 추구한다면 주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을 가지고 계시다. 말하자면 그분의 말씀에서 이 구절들을 사용하게 된 것은 우리들이 감동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영적인 명령에 따라서 걷는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의 체험
우리의 체험과 관련이 있는 몇 가지의 실제적인 예들은 이기는 생명 안에서 버리지 못하는데 있는 이 계명의 문제를 강조할지 모르나 “법”의 방식 안에서 깨닫지 못하는데 있지만 “생명”의 방식 안에서는 깨닫게 된다. 왜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유혹에서 얼굴을 돌리는가? 그들은 죄에 대한 내적인 혐오감, 내적인 꺼림이 있어서 타락한 육체에 대항하여 싸우기 때문이다.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 5:17)
이기는 사람들은 규칙, 형식을 따르지 않고 안에 있는 생명을 체험한다. 그러나 그들은 죄에 대항하는 성경적인 명령들을 깨닫게 될 것이고 때로는 특별히 유혹을 받을 때 기억나게 된다. 왜 이기는 믿는 이들은 새 차 광고에 관심 갖는 것으로부터 거부하며 그것에 대한 욕망을 피하는가? 그것은 그 차를 사랑하는 것과 심지어 세상 광고에 의해 탐닉의 생활방식이 증가된 것을 꺼리는 그들 안에 어떤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은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것들 대신에 아버지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생명이다(요일 2:15~17).
왜 이기는 자매들은 짧은 머리나 짧은 드레스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는가? 그것은 일부 형식에 구애되는 모임(교회)들 안에서 증가된 규칙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남자처럼 보이거나 천박하게 보이는 것을 거절하려는 그녀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해방운동(페미니스트 무브먼트)의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거절하고 있다. 이기는 자매들은 그녀들 남편들의 지도력 아래에서 있기를 내적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녀들은 또한 주님 앞에서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기를 바란다. 가끔 주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하신 방법들을 그녀가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그녀의 영 안에 있는 그녀에게 성경을 말씀하실 것이다.
이기는 그리스도인들의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들은 의지에 의해 수행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성품은 외적인 모방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미덕은 그분 자신의 사역에 의해 우리 안에서 깨닫게 된다. 이 증거로 다음 구절들을 기록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완수하라. *이는 너희 안에서 일하시며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빌 2:12~13)
“이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으로 생각할 만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요, 오직 우리의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기 때문이니라.”(고후 3:5)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니 *이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3~4)
(하나님께로서 난 것은 우리 인간의 영이다.[요 3:6, 히 12:9b])
이전부터 우리의 영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 우리 영의 영역 안으로 들어감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있다.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분의 뜻을 수행하시기 때문에 부담이 아니다.
“이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이끌어 내신 화평의 하나님께서 영존하는 언약의 피를 통하여 ㆍ모든 선한 일에서 너희를 완전하게 하사 자신의 뜻을 행하게 하시고 자신의 눈앞에서 매우 기쁜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너희 안에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분께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히 13:20~21)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영 안에서 사는 것
우리는 율법에서부터 해방되었으나 우리가 “영 안에” 사는 것으로 우리의 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려 하심이니라.”(롬 8:2~4)
“그러나 너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갈 5:18)
여기서 우리는 믿는 이들이 그들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율법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본다. 다른 말씀 안에서 사람들은 그분을 따르고 또 그분을 알며 그분과 연합되기 위해 사람들 영 안에서 내적으로 주님을 추구한다. 사람들이 이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사람들 안으로 그 영의 기름 부으심을 따름으로서 사람들은 율법 아래로부터 나가게 된다. 사람들은 은혜를 체험을 하고 있다. 무엇이 더 명백하게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죄에 자극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것의 잠재력으로 율법을 뒤에 남겨두고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영적인 연합을 훈련할 때다.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임이라.”(롬 6:14)
“이제는 우리를 붙들던 율법 안에서 우리가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율법 조문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7:6)
로마서를 훌륭한 해석한 것이 있는데 윌리암 뉴웰은 강력한 소견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각자의 가장 큰 교훈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의 마음으로 접근 해야만 한다.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어느 쪽이든 간에 원칙으로서 법 아래에 있지 않으나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을 접근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믿는 이들의 삶은 이제 그 영에 의해 걷는 것은 외부적인 계명들에 의해 걷는 것 대신에 ❶노력이 아닌 믿음 안에서 ❷내주하시는 그 영의 능력 안에서이다.’ [굵게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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