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죄로부터의 해방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포함한다. 사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또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만 한다. 다음 구절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임이라.”(롬 6:14)
그리스도인의 생명 안에서 이기게 되는 것은 우리가 율법의 원칙을 포기하고 은혜의 원칙으로 사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율법의 원칙”과 “은혜의 원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인데 우리는 적당한 과정에서 그 답을 찾게 될 것이다. 우리 신약을 믿는 이들을 위해 긴 안목으로 그 답을 얻기 위해 율법에 관한 성경을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경륜이었다.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기 때문이라.”(요 1:17)
“율법과 대언자들은 요한의 때까지요,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왕국이 선포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밀고 들어가느니라.”(눅 16:16)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롬 10:4) “앞서 나가던 명령은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으니 *이는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되 주께서 더 나은 소망을 가져오심은 완전하게 하였기 때문이니 우리가 이 소망을 힘입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느니라.”(히 7:18~19)
율법의 일(행위)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기 때문이니라.”(롬 3:20)
율법의 문제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라.”(고전 15:56)
“그러나 죄가 명령을 통하여 기회를 타서 내 안에 온갖 욕정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 *전에 율법이 없을 때에는 내가 살아 있었으나 명령이 오매 죄가 되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8~9)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르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는 만일 주께서 능히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임이라.”(갈 3:21)
율법은 생명을 공급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하나님께 허락되셔서 의로움과 관계없이 사실 필요가 있으셨다.
“그런즉 율법도 거룩하고 명령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도다. *그러면 선한 그것이 내게 사망을 이루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을 통해 죄가 내 안에서 사망을 이루었나니 이것은 명령을 통해 죄가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그 까닭은 우리가 알거니와 율법은 영적이나 나는 육신적이어서 죄 아래 팔렸기 때문이로다.”(롬 7:12~14)
율법 자신 안에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 자체는 의롭고 선한 것이나 그것이 타락한 육체와 결합되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사람의 죄성이 밖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살기 위한 방법으로서 율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이다.
오늘날 율법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가 아노라. *이것을 알지니 곧 주께서 율법을 만드신 것은 의로운 사람 때문이 아니요, 오직 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와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속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사람을 죽이는 자와 *음행을 일삼는 자와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는 자와 사람을 납치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위증하는 자와 그밖에 무엇이든지 건전한 교리를 거스르는 것 때문이니”(딤전 1:8~10)
오늘날 율법은 의롭지 않은 (그리스도인들) 죄인들의 죄성을 보여줄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율법의 목적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壎尹)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 3:24)
율법은 정죄 아래에서 죄인들을 속이는 것이며, 따라서 구주의 필요를 그들이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율법은 단지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그것의 실재는 신약 성경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이는 율법은 앞으로 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는 가지고 있으나 그 일들의 형상 그 자체는 아니므로 사람들이 해마다 계속해서 드리는 그런 희생물들로는 거기로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완전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히 10:1)
“그러므로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나 거룩한 날이나 월삭(嫄朔)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그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골 2:16~17)
규례들과 계명들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율법의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깨닫게 되었던 어떤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예를 들어 부정함과 정결함 사이를 구별하여 만들기 위해서 레위기 11장에 있는 음식의 규례가 율법으로 필요했었다(레 11:4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음식처럼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고 악한 마음 안에 있는 것과 사람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악한 생각들과 탐심, 그리고 비방과 같은 것들)고 설명하셨다.
“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 비유에 관하여 그분께 여쭈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닫지 못하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은 그것이 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뱃속으로 들어가 모든 음식을 깨끗하게 하고 뒤로 나가기 때문이니라.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는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色慾), 악한 눈, 신성 모독, 교만, 어리석음 등이기 때문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14~23)
그러므로 신약 시대 안에서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특정한 음식들은 하나님께 우리를 내세우지 못한다(고전 8:8). 구약 음식의 율법은 새 언약이 제정되기까지만 실행되도록 계획되었었다(히 9:10). 오늘날 모든 음식들은 정결하다고 여기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거룩함에 관해서도 거룩하다고 여겨진다(롬 14:14, 20, 딤전 4:3~5). 정결함과 부정한 것 사이를 구분시키는 것의 신약 성경의 실제는 안에 있는 부정한 것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우리 마음 안에서 성령께서 일하시고 계신다(롬 8:13~15, 갈 5:17~18, 골 3:5~9, 히 4:12~13).
그리스도 안에서 수행되어 질 율법의 규례의 또 다른 예는 할례를 요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할례의 실제(육체를 잘라 버리는 것)는 죄 있는 사람의 육체를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잘라 버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이시다(골2:11). 이 실제는 매일같이 마음속에서 적용되는 것이다(롬2:29).
또한 그것들은 구약 안에서 유대인들의 필요로 규례를 따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미 더 이상 어떤 특별한 날이 아니다(레 23). 그리스도 자신의 그림자를 포함하고 있는 이러한 것들은 실제이다(고전 5:7~8, 골 2:16~17).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의 모든 부담은 은혜의 자유함 안으로 율법의 방식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아시거늘 어찌하여 너희가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 다시 그것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염려하노라.”(갈 4:9~11)
율법에 대한 믿는 이들의 관계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게 되었으니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다른 이 곧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으신 이와 결혼하게 하려 하심이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하심이라.”(롬 7:4)
“이제는 우리를 붙들던 율법 안에서 우리가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율법 조문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7:6)
“내가 율법을 통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자 함이라.”(갈 2:19)
거듭나기 전 옛 “나” 안에서 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율법에 의해 묶여 있었다. 그것은 그분과 함께 우리의 관계를 지배하셨던 하나님의 법이었다. 그 법은 죄인들로서의 우리를 죽음에 가두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죽음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합병되었을 때 우리는 그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우리가 육체의 노력으로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았었으며 우리 영 안에서 새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합한 곳이 되었다(고전 6:17). 율법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믿는 이들로서 완전히 끝이 났고 우리는 율법에서 죽었으며 또 그것으로부터 해방 받았다.
초대교회 시대의 믿는 이들에 관해 생각해 보라. 그들에게는 우리 지금처럼 전체적인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무렵 성경들은 구약으로 구성되었었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다. 물론 다른 모임들도 마찬가지로 사도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그 모임들 또한 사도들의 편지를 하나님의 계시로 여겼다. 이교도(기독교)를 믿는 이들에게 구약 율법의 적용은 교회 내에서 논쟁의 문제가 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의 문제가 되었다(사도행전 15장에 있는 회의는 좋은 예이다.) 결국 율법의 이 문제는 사도들의 편지, 특별하게 바울의 편지들과 히브리에 쓴 사도의 편지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정결케 되었다. 위의 분류된 성경의 많은 명백한 구절들로 볼 수 있듯이 신약 성경을 믿는 이들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율법은 사람들을 위해 의도된 바가 아니다. 율법 아래에 있지 않는 한 가지 측면의 문제가 더 있다.
첫 번째로 위에 기록된 구절들로부터 이해됐을 것인데 구약의 규례들과 명령들은 오늘날 믿는 이들에게 직접적으로 공급되지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이 사는 동안 계명으로서 “십계명”을 지키는 믿는 이들도 잘못되었다. 이 규칙들은 구약성경 시대의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고 신약을 믿는 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의 생활에 관련된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거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교훈과 관련된 것을 말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사용하시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틀림없이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마 4:4, 롬 15:4, 고전 10:11, 딤후 3:16~17, 히 4:12). 그러나 구약성경은 정확하게 순종했어야 될 규칙의 책이 아니다.
두 번째와 “율법 아래”에 있는 더 근본적인 측면은 사람에게 공급하는 의로운 요구들을 수행하려는 믿는 이들의 노력과 능력이 관련이 있다. 이 측면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체험하는데 정말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7장에서 순종함으로 바울의 전투가 있음을 보게 된다. 그의 전투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일어났다. 로마서 7장에서의 문제는 우리의 하나님의 요구들에 순종하는 우리의 능력에 관련된다. 이 문제의 한 예로 바울은 탐욕과 전투를 했다. 바울은 탐욕을 금지하는 구약성경이 신약을 믿는 이들로서 아직까지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이해했다(막 7:22, 눅 12:15, 골 3:5). 그 문제는 예전의 “나”의 강한 힘, 그의 천연적인 능력의 힘에 의해 계명을 수행하려고 시도했었다. 그의 내면에 있는 탐욕은 도덕적인 가르침에 동의했으며, 그것을 따라가게 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는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을 떠나있었음을 발견하였다. 그 문제는 그의 몸의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롬 7:23)이었다. 바울이 의로운 명령을 따라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에서 떠나있었을 때 죄가 그 안에 살게 되었고(롬 7:9), 그는 그 안에서 죄의 힘을 거스를 수 없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죄악의 힘은 결국 그가 하기를 원치 않았던 어떠한 것들을 하도록 몰아붙였다(롬 7:14~15, 19). 바울의 전투를 명확히 관찰하기 위해서 로마서 7:7~25절을 읽어라. “법 아래에” 있는 이 측면 즉 다시 말해서 우리의 하나님의 요구에 복종하는 우리의 무능력한 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되는 이 문제에 대해 문제의 핵심이다.
이기는 생명을 살기 위해서 믿는 이들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율법아래에” 있다는 원칙은 오늘날 우리에게 구약성경에 적용되지 않는 규칙들이 보다 더 많이 포함하고 있다. “율법 아래에”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관계가 그분께 합당하게 되기 위하여 계명에 순종할 우리의 책임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초점은 명령에 순종하려고 자신의 노력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자기 자신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는데 왜냐하면 내재하고 있는 죄의 힘이 이 같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반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이 썼던 로마서 7장에 있는 것에 관한 정확한 체험이다.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는 이 같은 주제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서 아주 명백하다(갈 5:1, 율법의 언약을 상징하는 “속박의 멍에” 가 있는 갈라디아서 4:24절을 보라). 갈라디아서에서 우리는 사람의 실패한 자신인 육체가 “율법의 일들”과 짝하고 있는 것을 다시 보게 된다(갈 2:16, 3:2,5).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법과 사람의 노력이 연결되어 있다.
법의 원칙은 순종하게 됨으로 규칙을 정하여 사는 사람을 포함한다. 로마서 7:1~6에서 우리 옛 사람인 육체가 법 아래에서 강하게 묶여 있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 명령으로 살고 있는 천연적이고 거듭나지 않고 변화되지 않은 생명을 의미한다. 천연적인 사람은 “문자(율법의 조문)”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 바울은 로마서 7:6절에서 분명하게 그 문제를 말한다.
“이제는 우리를 붙들던 율법 안에서 우리가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고 율법 조문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7:6) 법으로부터의 우리의 자유함은 우리가 명령에 의해 계속해서 속박 아래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관계는 규칙에 의해서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우리는 은혜 아래에 있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는 은혜의 원리를 자세하게 탐구할 것이다. 도입부분으로서 내는 은혜 아래에 산다는 것이 성령의 지배와 힘을 공급 받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새 생명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한다. 이와 같은 생활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원리)에 의한 것이다(롬 8:2,4). 우리는 규칙을 따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율법의 요구 아래에 더 이상 있지 않으나, 우리는 그 영의 공급과 성령의 규칙 아래에 있는데 우리의 생명은 의롭게 살고 있다. 은혜는 규칙의 방식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방식이다.
이것은 신약을 믿는 이들을 위한 “명령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심지어 제한 없는 죄 있는 생활을 고려한 모든 법들과 명령들을 배경으로 하는 “안티노미안(도덕률 초월론자)”임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요구들과 명령들은 우리에 의해 깨닫게 되었고 또 법의 방식보다 다른 방식 안에서 합법적인 원리로 수행하고 있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한 구절은 고린도전서 9:21이다. 그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얻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믿지 않는 이들과 거래의 그의 방식을 말하고 있었다.
“율법 없는 자들에게 (내가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께 율법 아래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21) 우리가 하나님 아들의 사람의 생명 원칙인 그리스도의 법에 의해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규례들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계속해서 유지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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