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아담 vs 그리스도

은혜 아래에서(I)

Hernhut 2013. 4. 18. 22:01

 

이번 수업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제목으로 한 여섯 번째 수업 아래의 말씀의 계속이다. 믿는 이들은 이제 법에 의해 사는 것으로부터 해방이다. 그것은 합법적인 원칙에 의해 사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이기는 이들이 되려면 우리가 은혜 아래에서 법으로부터 해방 받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화제에 관하여 어떤 중요한 개념들은 아래에 덮여져 있다.

 

율법과 은혜에 대하여 법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으로 사는 것

율법 아래에있다는 것은 명확한 명령들로 나열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포함한다. 이 명령들을 통해서 사람은 옳은 것을 할 것을 기대되는 것과 옳고 그름의 지식을 얻는다. 사람은 그 자신의 힘과 능력(“육체”)의 의미에 의해 이 명령들을 수행하기를 시도한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법으로 살며, 법을 섬기며, 법에 매여 있다(7:2, 4, 6). 그 사람의 초점은 그 법 위에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의로움은 그 계명을 수행하는 것을 의존한다. 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의 구약성경과의 관계가 특징이다.

 

은혜 아래에있다는 것은 성령의 공급에 의해 그리스도와 함께 믿는 이들의 연합 생활을 포함한다. 은혜 아래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그의 생명과 생명 공급으로서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받고 있는 것이다(고전 15:10, 2:20~21, 5:4). 은혜를 체험하는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의 생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또 그의 영 안에서 그리스도를 추구한다(고전 6:17). 이 같은 사람은 전적인 의지와 필요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 도달하려는 내면을 가지고 있다. 그의 전체적인 생명으로서 그리스도를 체험함에 의해 믿는 이들은 겉으로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영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다(1:9, 7:6). 은혜 아래에 사는 믿는 이들은 그 순간 그리스도의 생명의 작용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그의 생활이 자동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8:2,4). “은혜는 하나님께 대하여 사람의 신약성경과의 관계가 특징이다. 바울은 내가 율법을 통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자 함이라.”(2:19)고 증언했다.

 

율법에서 독립하는 것과 은혜에 의존하는 것

법률적인 원칙은 계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사람이 필요하다. 법 아래에 사는 사람은 법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준수해야만 한다. 그래서 사람의 지식과 사람의 노력, 둘 다 필요로 했다. 이런 형태의 타입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의 독립을 조장한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것이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에 의해 특징을 나타내졌다는 것을 볼 수 있는가? 이 같이 지식에 의해 사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행하는 것을 알고서도 실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있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될 수 있다.

한 실례로서 아홉 살 된 소녀가 그녀의 생활을 독립하겠다고 결정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녀의 독립적인 태도 안에서 그녀가 스스로의 생활을 꾸려나가는 방법과 행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그렇게 결심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녀의 독립은 생활을 위해 부모에게 더 이상 돌봄 받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에 의해 준비되는 것 대신에 자신이 아침 식사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다음으로 그 작은 소녀가 부모에게 의지 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후로 날씨로부터 보호되는 방법과 따뜻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작은 소녀는 이와 같은 결정의 불편함과 도전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밖으로 나간다. 그런 날을 계속해 나감으로서 그녀는 아홉 살 된 작은 소녀가 스스로 꾸려나가기란 몹시 어렵다는 것을 점점 더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작은 소녀가 그녀의 부모의 양육과 돌봄 아래에서 살도록 설계되었듯이 사람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살도록 설계되었다.

법적인 원칙과 대조적으로 생명의 나무는 사람의 절대적인 생명을 위해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함을 상징한다. 사람이 그 나무에 오지 않고 그것과 함께 하지 않으면 생명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생명나무이시다. 우리가 그분께 오지 않고 그분으로부터 은혜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을 가질 수 없을뿐더러 어떠한 것도 할 방법이 없다. 은혜의 길은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 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은혜 아래에서 살 때 우리는 매 순간마다 그분을 의지함으로 산다. 우리가 의지함으로서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공급하신다(3:5, 1:9). 예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이는 나 없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15:5)고 말씀하셨다.

 

은혜는 무조건적인 호의보다 훨씬 더 높다. 신약 성경에서의 은혜를 뜻하는 단어는 카리스. 비록 그것의 의미를 무조건적인 호의로서 대중적으로 가르치고 있으나 그 단어의 의미는 많은 신약성경 안에서 다른 특성들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그 은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호의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2:8~9). 은혜 아래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현재의 체험은 하나님의 호의를 받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는 죄의 지배와 율법의 멍에로부터 해방되어 사는 것이다(6:14). 우리가 다음 구절들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은혜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연합된 우리의 생활을 지적한다.

우리가 다 그분의 충만하심에서 받았으매 은혜 위에 은혜니”(1:16)

이 구절은 은혜 위에 은혜의 방식 안에서 그분의 사람에게 어떠함을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받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체험 위에 체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16:20b)

이 구절도 역시 체험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임재와 권능의 공급을 말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

여기서 바울의 증언은 그 생활인데 그가 사역을 하고 살도록 도달하게 된 것이 그 스스로가 이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불리는 은혜는 단순히 바울의 생명 안에서 체험과 또 성령의 능력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방면은 봉사를 위한 그분의 강력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행할 때에 단순함과 하나님께서 주신 진실함으로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 또한 너희를 향하여는 더욱더 그리하였노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또 우리 양심이 증거하는 바라.”(고후 1:12)

바울의 제고된 인간의 행위를 위한 명성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의미하는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이 구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방면은 그분의 거룩하심이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여기서 우리는 은혜가 우리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나 다름없음을 본다. 이 구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방면은 인간의 체험 안에서 우리를 억압하고 또 우울하게 하는 부정적인 상황들의 경향에서 이기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우리가 이 세상의 고난으로 인하여 패배되지 않음으로 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영과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에베소 사람들의 교회의 첫 감독으로 세움 받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서신을 바울이 네로 앞에 두 번째 불려나갈 때에 로마에서 써서 보내다.)”(딤후 4:22).

나는 이 두 구절들이 같은 것을 말하고 있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이 놀라운 구절은 은혜가 보좌 위에 계신 그분 자신으로부터 우리에게 본질적인 분배하심이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은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때에 이기도록 우리를 힘을 공급한다. 이 은혜는 우리에게 분배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공급임에 틀림이 없다(3:5).

그러므로 우리가 움직일 수 없는 왕국을 받을진대 은혜를 소유하자. 이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공경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도록 섬길지니”(12:28)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과 성령의 권능에 의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도록 섬길 수 있다. 성령의 공급의 의미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연합을 가리키고 있는 은혜라는 용어로 사용되는 다른 구절들이 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용어집으로 더 연구하기를 원할 것이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은혜 아래에 있는 것을 비교해 볼 때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성경 안에서 어떻게 대조를 이루는지를 확인하는데 유익이 될 것이다.

만일 첫 언약이 결점을 가지고 없었더라면 거기에는 둘째 언약을 추구할 근거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의 결점을 찾아보면 히브리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에게서 흠을 발견하시고 그분께서 이르시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과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에 따른 것이 아니니 그들이 내 언약 안에 머물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눈여겨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주가 말하노라. *그 날들 이후에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한 백성이 될 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그들이 각각 자기 이웃과 자기 형제를 가르쳐 말하기를, 너는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다 나를 알 것임이요, *또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하여 긍휼을 베풀고 다시는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기억하지 아니할 것임이라, 하셨느니라.”(8:8~12)

여기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두 언약의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위한 새 언약의 약속은 이미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새 언약 안에서 약속의 자녀들로서 여겨지고 있다(9:4~8, 4:24~28). 그것은 주님의 마지막 만찬에서 교회로 세워졌다(26:26~29).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세우신 새로운 방식으로 유대주의의 옛 방식에 대조를 이루도록 기록했다. 율법의 옛 언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계속 헤아리도록 계명을 판에 새겼다. 율법은 외적인 어떤 것이다. 유대인들은 돌에 새겨진 그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새 언약은 내적인 어떤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법들은 우리 마음 위에와 우리 생각 안으로 새겨져 있다. 그분은 우리 본성 안으로 그분의 방식의 법들을 분배하고 계신다. 이 대조는 과장하여 말할 수 없다. 위에서 인용된 구절에서 선포에 의해 훨씬 더 명료해 졌는데 거기에서 (계명을 기록됨에 의해) 주님을 알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필요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새 언약 아래에 있는 각각의 믿는 이들은 하나님 그분 자신을 알기 위해 본질적인(타고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우리 안으로 분배하시고 계신다. 그분의 법들은 우리의 내적 실재 위에 새겨져 있다.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람으로서 그분의 내적인 법들을 배우는 것의 이 체험 안에서 자란다(벧후 3:18).

율법 아래 있는 것은혜 아래에 있는 것우리의 대조 안에서 우리는 독립과 의존의 용어를 대조시키는 데 사용 되었다. 이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용어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두 단어를 더 더해야 한다. 외적인 것은 법으로 사는 것이요, 내적인 것은 은혜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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