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의 강의에서 기꺼이 고난을 받는 문제에 대해 보았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의 혼의 만족함을 버리고 기꺼이 고난을 받는 것에 주의를 집중되었다. 우리는 이제 기꺼이 고난을 받는 두 가지 측면을 더 보게 될 것인데 하나는 이 강의에서 하나는 다음 강의에서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측면들은 우리를 덮고 있는 첫 번째 측면을 틀림없이 포함하고 있음을 말해야 하지만 나는 우리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고난의 능력을 완전히 보도록 우리를 위해서 그것들을 별개의 문제들로 볼 필요가 있음을 믿는다.
기꺼이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상황에 두어지는 것이고 배우는 것임
“기꺼이 고난을 받음”의 항목은 고난을 받는 기간 동안 하나님을 순종하고 체험하며 또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기를 추구하는 태도에 더하여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믿는 이들의 환경의 용납을 포함한다. 이와 같은 개념(생각)은 고난을 받는 것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기도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구원을 하나님께 요청할지 모르나 사람들은 해방에 관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점에 있어서 한 예로 바울과 사람들의 기도가 “육체 안에 있는 가시”에 관련되어 있다(고후 12:7~10). 고난들은 하나님에 의해 우리의 믿음을 강해지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의 인격이 성숙하게 된다.
첫 번째 구절로 우리는 로마서에 있는 이 문제를 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도다.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이로다.”(롬 5:1~4)
환란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쓸리피스”이다. 이 명사는 밀치다, 누르다, 또는 짜내다라는 의미하는 동사에서 유래한다. 이 단어는 재정적인 압박(고후8:13)과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고전 7:28)을 다른 것들 가운데에서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사용되었다. 또한 믿음에 대한 박해(히 10:33)에 사용 되었으나 우리는 고난의 또 다른 항목 아래서 강의 할 것이다. 환란의 고난은 필요로 하는 인내나 견딤의 환경을 만들어 냈다. 인내라는 이 단어의 헬라어응 “후포모네”이다. 이것은 헬라어 “남아 있는, 아래에”를 의미하는 두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말 그대로 그것은 “아래에서 계속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이러한 인내는 사람이 상황 아래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고, 그 환경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미덕이다. 그리스도인을 위한 함축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는 방식으로 압박에 의해 굴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환란 안에서 인내하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가까이에서 교제함으로 그분께 의지하며, 또 하나님께서 시험을 하시는 기간 동안 사람들의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배워 순종하여 주님께 믿음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이다. 환란 아래서 인내함은 “검증된 특징”, “입증되었거나”(웨스트) 혹은 “성격의 성숙 즉 성실히 시험을 끝내고 믿음을 인정받음”(확대역성경)을 산출했음을 말한다.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야고보서에 있는 이 주제를 볼 것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쁨으로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알기 때문이라. *오직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완전하고 완벽하여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여기에서 시련으로 사용 되고 있는 단어는 헬라어로 페이라스모스라 한다. 이 단어는 어떤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을 포함하여 유혹과 또는 시련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 대하여 그리스 학자 마빈 빈센트는 “성격의 시금석을 완성시키기 위한 모든 것을 포용한다.”고 언급했다. 다양한 시련들은 역경을 당하고 있거나 고난을 받고 있는 상태를 포함되겠으나 그 시련들은 이러한 고난의 유형에 국한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단어는 종종 죄에 대한 유혹에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여기 야고보서에 의하면 우리가 시련을 체험할 때 우리의 믿음은 시험을 받았다. 여기에서의 믿음은 영원한 구원을 위한 처음의 우리 믿음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믿음의 생활과 관련이 된 것이다. 그것은 입증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즉 믿음의 생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가져오실 목적을 위해 이러한 시험을 허용하신다. 우리의 믿음으로 이런 시험의 과정을 겪는다. 그것은 산출된 인내다.(야고보서에서 “인내”로 번역된 단어는 위에서 언급한 로마서 5장 3~4절에서의 “견딤”과 같은 말이다.) 게다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소망과 같이 참고 견딘다면 성숙해진 결과를 보게 된다.
“풍부한 일을 갖고 또 빈틈없이 사역을 하여 견디고 흔들리지 말며, 인내하라. 너희가 (흠이 없이) 완전하고 완벽하게 성장한 사람들이 되고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함이라”(약 1:4 확대역 성경)
고난에 의한 보상
다음 구절은 베드로 전서를 보기 원한다.
“비록 지금은 필요가 있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하여 잠시 근심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 구원을 크게 기뻐하나니 *이것은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훨씬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드러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1:6~7)
여기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시련(페이라스모스)에 의해서 “근심하게”(슬퍼하도록 만드는-웨스트)될 수 있음을 본다. 이 시련들은 시험을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필요”하다거나 아니면 우리 믿음의 걸음걸음을 시험하신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7절은 이 시험을 더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와 같은 시험으로 생길 우리 믿음의 증거(사실이나 인정)를 계시한다. 이와 같은 우리 믿음의 사실의 증거(우리가 성공적으로 일시적인 시험을 받음으로 인해 입증된)는 예수께서 돌아오실 때에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칭찬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인정과 그분의 심판대에서의 보상을 가리키고 있다. 인정을 위한 시험의 이 과정은 이 구절에서 불에 의한 금의 시험에 비교된다. 빈센트는 다음처럼 시험을 위해 헬라어 동사 “도키마조(dokimazo)"를 언급하는데 이 동사는 시험을 허가하거나 승인하기 위한 일반적인 방법과 금속 테스트나 시금법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되었다. 더욱이 우리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간주하심으로서 우리의 생활에서 고난을 받는 것을 허락하셨음을 볼 수 있다.
시금하는 이가 광석 가운데에서 금의 가치를 발견하고 얻기 위해서 불 속으로 광석을 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련으로 입증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인격 안에서 자라고 또 인내를 통해 우리에게서 반응을 찾고 계신다. 우리의 인내의 바탕으로 그분은 결국 우리에게 보상하실 것이다. 이 보상에 대한 야고보서에 있는 한 구절을 보자.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그가 단련을 받은 뒤에 주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왕관을 받을 것임이라.”(약1:12)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찾고, 그분으로부터 배울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심으로서 각각의 시련을 허락할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성숙되어질 것이다. 이기는 이들은 시련을 당하는 동안 주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상황을 통제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또 하나님의 목적이 항상 긍정적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시련의 시간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찾고 계신 반응이 무엇인지를 배우려고 할 것이다.
이 문제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예이시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아들이실지라도 고난 받으신 일들로 말미암아 순종하기를 배우사”(히5:8)
이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절일지 모르나 난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상태에 놓여 계셨다는 의미로 생각되는데 거기에는 아버지께서 필요로 하신 사실상의 순종에 관하여 각 사람들이 새로운 체험으로 배우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별한 고난의 체험 즉 참되신 인간의 체험을 통해 통과하신 오직 한분이심을 아들로서의 의미하는 순종하심을 사실을 배울 수 있다.
고난 속에서의 은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예수께서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4:15)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그분께 주어진 모든 시험을 통과 하셨다. 그리고 이 시험들은 종종 고난과 함께 언급되었다.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히 2:18)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우리를 앞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에 큰 격려가 된다. 모든 시험을 통과하신 후 고난들에 의해 그분께서 우리의 믿음과 자비하신 대제사장이 되셔서 시험들을 통과하도록 우리를 돕기 위해 준비 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자라고 또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상황에서 그분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여하시기 위해 준비하시고 계신다. 히브리서 4장에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호의 있는 돌보심을 기록하기를 우리가 시련들을 견딜 때 은혜를 공급하심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위대하신 대제사장이 계시니 하늘들 안으로 지나가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라.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굳게 붙들지어다.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
오래전에 우리가 강의에서 본 것처럼 은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의 사역하심의 영적인 공급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가 고난을 견딜 때 이 은혜보다 강력과 위안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이 은혜는 곧 우리에게 그 영(the Spirit)의 흐름이 된다. 대부분의 우리는 아직까지 우리 자신을 너무 의지하고 있으며 우리 자신의 자원에 자부심이 강하다. 하나님, 그분의 지혜로우신 주권 안에서 우리를 서로 얽히게 하고 무거운 부담을 지우고 또 피폐시키는 우리 생활 속의 상황을 허락하신다. 이러한 환경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들을 다루는 힘을 잃게 된다. 우리는 특히 주님을 위한 긍정적인 증언과 함께 이 환경을 통해서 그것을 다루게 될 우리의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일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은혜의 그분의 공급하심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분께 오도록 우리를 기다리시고 또 기대하신다. 그분은 그분을 우리가 완전하게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자아를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 이러한 시간을 사용하시고 계신다. 바울이 그의 “육체의 가시”로부터의 고난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음을 고려하라.
“내가 이 일로 인하여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도록 주께 세 번 간청하였더니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나의 강한 능력이 약한 데서 완전해지기 때문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하기 때문이라.”(고후12:8~10)
바울은 그의 고난당하는 상황이 약함을 탄식하여 그를 감소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이후에 은혜의 공급으로 바울의 삶에서 그분의 힘이 완벽하도록 하나님의 기회가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이러한 상황을 통해 바울의 삶에서 깨닫게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에 만족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련들 안에서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는가? 그분은 우리의 약함 안에서 그분의 은혜와 능력의 신선한 공급하심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다름없이 산출되는 것을 우리의 약함 안에서 깨달았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 안에서 일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인정하심을 구한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보상하실 것이다. 우리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특히 하나님께서 그 시련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어떤 것들을 볼 때 고난을 바는 것들 만족할 수 있는가? 우리 그분의 은혜의 보좌와 그분 앞에 가보기로 하자. 그분의 은혜의 공급을 위해서 그분께 마음을 완전히 열어 우리의 영의 깊은 곳으로부터 그분께 도달해 보자. 이것은 그분이 우리의 고난을 받는 것과 우리의 약함을 우리에게 가지고 오신 이유이다.
구약의 예와 신약의 훈계
“주 네 하나님께서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신 그 모든 길을 기억할지니 이것은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또 너희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 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알고자 하심이라.”(신 8:2)
이와 관련된 신약성경에서는 “이제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기 위함이며 또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함이니라.”(고전10:11) 라고 말씀하고 있다. 광야에서의 시험은 고난을 받는 상황을 포함하였다. 타나크흐(현대 유대어로 번역된 성경)방법으로 기록된 광야 시험을 기록하여 표현한다.
“주 너희 하나님께서 지난 40년을 광야에서의 여행을 하게 하신 그 오랜 길을 기억하라. 그것은 그분께서 너희를 너희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너희가 그분의 명령을 계속해서 지키는지 아니면 지키지 않는지를 아시려고 곤란으로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야 시험을 실패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을 때, 그들은 모세와 다투고 또 목말라서 죽게 되었다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나오게 한 그를 비난했다(출 17:1~3).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물이 없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것이 고난의 장소라고 알고 있었는가?
게다가 그들은 물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신지 아니 계신지를 물었었다(출 17:7). 이것은 사람들의 생활에서 엄습하도록 고난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을 때 가질 수 있는 이기지 못하는 믿는 이들의 반응의 종류이다. 사람들은 그의 상황에 대해 불평할 것이고 또 하나님과 그의 시련에 관련된 사람들을 비난할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들의 교제는 실패한 이스라엘처럼 감소할 것이고, 그들은 그분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게 될 것이다(히 3:15).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이시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에서 우리는 그분을 겸손하게 구할 것이고, 그분의 은혜를 찾을 것이며, 그분을 배우고 또 순종으로 그분을 따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굶주림의 역경의 고난을 당하던 곳에서 인도해 내신 그 때에 그분의 자녀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다(출 16:3~4). 또한 물이 부족하여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바위로부터 물을 내셨다(출 17:6). 만나는 우리의 영적인 생명 공급과 바위로부터의 물이 되심으로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요 6:31~33, 고전 10:4). 이것은 고난을 받는 상황을 당하였을 때 하나님은 새로운 방식과 더 깊은 방식, 아니면 이전 보다 더 견고한 방식으로 우리 생명 공급으로서 그분을 체험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고난에서 하나님과 함께 나오고자 하는 이들은 그것들을 탈출하려고 시도할지 모른다. 예를 들어 결혼생활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상황을 견디려고 찾기 보다는 오히려 이혼하려고 할 것이다.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을 넘어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해야만 하는데 이르게 된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그분을 신뢰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그분의 방식들을 이해해야 한다. 광야에서 실패한 이스라엘의 자손들에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항상 마음 속으로 잘못하여 내 길들을 알지 못하였다, 하였노라.”(히 3:10b) 말씀하시고 계시다.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삶에서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마치 그들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 일부분들도 깨닫지 못한다. 그분은 목적이 있으셔서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뜻을 따르고 그리스도를 살며, 그분을 의지하고 은혜 안에서 자라는 소망이 있으셔서 우리를 시험하시고 계신다(신 8:2~5).
그것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광야 체험에 연관된 두 신약성경 구절을 공부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보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분배는 히브리서 3장, 4장과 고린도전서 9:24~ 10:13이다.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보상과 인정(고전 9:25)과 그에 대한 반대 개념(고전 9:27)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 훈계와 격려로 끝나는 광야의 교훈에 관하여 성경은 구분하고 있다.
“그런즉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할지니라.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시험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하여금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2~13)
고통의 시간 동안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
맞는 말씀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은혜에 의해 다룰 수 없는 고난으로 결코 시험하시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것을 위해 그분께 오는 모든 이들에게 공급하실 것이다(히 4:16). 비록 주권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생활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고난 받는 것을 허락하셨을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분께서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시련들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 그것들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실 열망을 가지고 계시다. 다시 히브리서의 구절을 따라 기록한다.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히 2:18)
"이는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라."(히 4:15).
고난이 닥쳐올 때 거의 항상 불안을 동반한다. 우리의 문제들은 우리 생각 안에서 많은 불안한 의심들을 떠오르게 한다. ‘내가 직업이 없이 내 가족을 어떻게 먹일 수 있는가?’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내 배우자가 변화되지 않고 내가 남은 내 삶을 위해 이러한 상황을 견뎌야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고난에 의한 보상
하나님께서는 불안함이 일어날 수 있으며, 또 그것은 마귀가 불안한 생각으로 우리를 틈탈 수 있다는 것을 아신다. 그분은 베드로전서에서 우리에게 많은 위로를 주시는데 거기에서 베드로는 박해의 고난을 받고 있었던 믿는 이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여러분의 모든 불안을 겸손하게 내려놓으면 강하신 하나님의 손아래에 있는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높이실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영이 되고 방심하지 말라. 여러분의 반대자 마귀는 어떤 이를 찾아서 게걸스럽게 먹기 위해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헤매고 다닌다.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들에 의해 이루고 있는 같은 고난의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의 믿음 안에서 굳게 붙잡고 그를 대항하라. 또 여러분이 잠시 동안 고난을 받은 후에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영원한 영광으로 부르셨으며, 그분 자신이 여러분을 완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건축하실 것이다(벧전5:6~10).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며 또 우리가 고난을 받는 상황에서 염려를 체험하는 우리를 원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하나님, 아니면 다른 사람을 반대하여 비난하는 것은 물론하고 마귀의 염려에 대항하는 우리를 원하신다(출16:2~3).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 안에서 굳게 서 있기를 갈망하시며, 또 우리 상황에서 우리를 뒷받침하실 것이다.
기꺼이 고난을 받는 항목 아래에 특별하게 포함되지 않는 두 종류의 고난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초래하는 것인데 이것은 베드로에 의해 간단하게 언급했다.
“그러나 너희 중에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행하는 자나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는 말라.”(벧전 4:15)
우리는 우리의 죄로부터 오는 천연적인 결과로 고난을 받는다. 도둑은 감옥에서 그 시간 동안 고난을 받게 될 것이다. 고난의 다른 형태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우리 삶에서 사용하실 수 있는 주님으로부터 온 구체적인 징계의 고난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 12:4~13에서 볼 수 있다. 고난의 이 두 항목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 때문에 공식적으로 우리와 거래를 하시며 또 거기서 우리에게 배울 점을 더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원칙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간 동안 그분 안에서 성장하고 그분을 체험하고 그분으로부터 배우려는 우리를 갈망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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