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교회

교회사역(헌금 I~III)

Hernhut 2012. 9. 6. 01:04

교회사역(헌금 I~III)

성임현형제 씀

 

교회들이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고 재정적인 수익을 어떻게 얻어야 할까요? 무슨 원칙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기부하도록 안내하고 또 교회의 사역에 재정을 기증하도록 할까요? 그리스도인으로써 십일조, 빙고게임, 복권게임, 바자회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교회는 주님의 날에 헌금을 모금해야 하나요? 지체들이 얼마나 많이 기부금과 헌금을 할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요? 십일조를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복음은 교회가 자금을 조달하는 것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나요? 이런 질문에 의견이 분분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조직과 마찬가지로 교회들은 교회들의 사역을 수행하고 도달하기 위해 재정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알고 있듯 하나님은 지체들로부터 헌금을 모음으로 자금을 조달하도록 교회들에게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고전 16:1~2, 고후 8~9, 4:32~5:11, 11:27~30, 2:44~45).

 

이 공과의 목적은 성경이 지방(지역)교회의 재정적인 사역을 후원하도록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에 관해 말하는 것을 검토하려는 것입니다. 교회에 재정을 기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유일한 기부의 종류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런 특별한 연구에 초점을 맞추어야하는 공과이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의 드림이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룬다면 우리가 알게 우리를 돕도록 몇 가지의 성경적인 원칙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교회들은 십일조, 복권과 같은 것으로 돈을 모으고 빙고게임, 그리고 바자회 등으로 재정을 모으라고 가르치고 때론 그런 일들을 교회가 실행하기도 합니다. 다른 교회들은 주일 곧 한 주의 첫날에 모아 기부하도록 지체들을 요구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교회 기부금과 헌금에 관해 무엇을 가르칩니까?

 

 

 

I. 번영(, 풍성)과 능력

 

 

구약 율법에서 십일조를 가르쳤다.

구약성경과 율법에는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 연구에 있어서 바른 십일조에 대해 연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의견이 분분한 것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네 원수들을 네 손에 넘겨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하매 아브람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니라.”(14: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빵과 입을 옷을 내게 주사 내가 평안히 내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오게 하시면 {}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되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28:20~22)

아브라함과 야곱은 시내의 법에 의해 우선적으로 1/10을 드렸습니다. 이 가르침은 유대인들에게 선포되었던 모세의 율법은 아니었고 시내의 법에 따라 드렸던 것입니다.

 

땅의 모든 십일조 곧 땅의 씨나 나무 열매의 십일조는 {}의 것이니 그것은 {}께 거룩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십일조 중에서 조금이라도 무르려면 그는 거기에 그것의 오분의 일을 더할 것이요, 소 떼나 양과 염소 떼의 십일조에 관하여는 어떤 것이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든지 열 번째 것이 {}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살펴보지 말고 그것을 바꾸지 말지니라. 그가 그것을 바꾸면 그것과 또 그것을 바꾼 것이 다 거룩하게 되리니 그것은 무르지 못할지니라.”(27:30~33)

모세의 율법은 레위인들을 후원하기 위해 자신들의 수입(증가분)1/10을 드리도록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구하였습니다(18:21~32, 3:7~10).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한 민정과 종교적인 봉사를 후원하기 위한 봉헌, 세금, 다른 선물(물건)들을 드리는 데 자유의지가 주어졌습니다(35:29, 대상 29:1~19, 12:5~19, 14:22~29, 10:34~39).

 

그 뒤에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하셨으니 그분께서 첫째 것을 제거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영원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10:9~10)

하지만 구약 율법은 예수님께서 그것을 다시 세우신 이후로부터 더 이상 구속력이 없습니다. 이는 교회가 오늘날에 십일조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7:1~7, 2:14, 16, 3:24~25). 많은 기독교사들은 십일조에 대해 강하게 요구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율법에 자유함을 주장하지만 십일조에 대한 것만큼은 강하게 요구하는 현상은 아이러니 합니다.

 

그렇지만 구약성경은 유익한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고전 10:6, 11, 15:4). 다른 것들 가운데서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의 사역을 후원하기 위해서 적어도 자신들의 수입 1/10을 드리는 능력이 있다고 배웁니다. 왜 이것이 오늘날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는 신약성경을 연구함으로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신약의 법은 풍성과 능력으로 드리기를 가르친다.

이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지시한 바와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주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자기 곁에 모아 두어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 16:1~2)

여기서 한 주의 첫날에 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신대로 드려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풍요로운 사람들과 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더 드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교적 가난하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조금씩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풍성, 번영, 부유실질 월급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급료의 20~25%의 가치가 있는 부가적인 이익을 더 받습니다. 세금과 다른 항목들은 월급에서 공제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투자금, 다른 사람들의 재산 사용료, 가족으로 구성된 사업, 보너스, 상속재산 등 다른 풍성함이 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저마다 자기 능력대로 유대에 거하던 형제들에게 구호금을 보내기로 결정하고”(11:29)

모든 사람은 자기의 능력에 의해서 드리도록 단단히 마음속에 결정했습니다. 수입의 증가, 부와 능력 또한 증가대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무리들은 비록 그들이 수입 가운데 얼마가 증가했던지 수입이 줄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수년 동안에 같은 액수를 계속 드리도록 합니다(고후 8:12, 12: 41:~44, 25:14~30).

 

() 세기에서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드림에 대한 성경적인 원칙은 현대의 어떤 나라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표준으로 다른 사회의 사람들을 비교해 보면 부자가 되지 못할지 모르지만 사실 평균적인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진짜 부유하고, 능력이 많아 일반적으로 드림에 대한 큰 부담을 갖습니다.

알지 못하고 채찍 맞을 일들을 한 자는 적게 맞으리라. 누구든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할 것이요, 사람들이 많이 맡긴 자에게 더 많이 달라고 하리라.”(12:48)

우리 한국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부유하고 풍성한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보다 더 많이 드리고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실 재정에 대한 인색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나라에는 너무 많습니다. 디퍼런스연구소에서 서무영목사는 몸의 은사(Gifts of Body) 구제라는 부분에서 드림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려는 것은 성경적인 합당한 헌금, 십일조, 드림, 구제 등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기부, 헌금구제의 은사임이 분명합니다. 어떤 이는 인색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담대하게 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실행하는 헌금에 대한 강요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날 기독교회의 헌금 사역은 샤머니즘적인 경향이 다분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헌금을 많이 하면 부해진다.”하는 어떤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헌금 목록을 나누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교회입니다. 교회는 정상적인 헌금사역을 할 때 비로소 정상적인 교회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이 헌금에 대한 사역이 잘못되었을 때 사람들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됩니다. 십일조를 드렸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건축헌금을 냈는가의 문제도 아닙니다. 감사헌금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어떤 마음으로 드렸는가의 문제입니다. 십일조를 안 하면 어떻습니까? 건축헌금을 안하면 어떻습니까? 헌금을 분수대로 하는 것이 정상적인 헌금사역입니다.

 

 

 

II. 관리직분과 분배하는 것

 

 

우리는 교회 사역 가운데서 분배해야할 부담이 있다.

우리는 교회가 하는 사역을 후원할 수 있도록 드리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나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이제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초기에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로 나와 나눈 교회가 너희 외에는 없었느니라. 심지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그리고 또 다시 내 필요를 위해 보내었느니라. 나는 선물을 바라지 아니하며 오직 너희 회계장부에 넘치게 될 열매를 바라노라.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들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한데 이것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니라.”(4:14~18)

빌립보교회는 바울을 후원하기 위해서 드렸습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하는 그의 사역 안에 있는 교제, 분배가 이루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지역교회에서 가르치는 목자들은 모이는 집회, 모임, 복음집회, 라디오, TV, 그리고 문서에서 가르칠 수 있음으로서 재정이 필요합니다(딤전 3:15, 11:22~26, 고전 14:1~40, 살전 1:8, 고전 9:6~14, 고후 11:8~9).

그들이 기도하기를 마치매 그들이 함께 모인 곳이 흔들리더니 그들이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니라. 믿은 자들의 무리가 한 마음 한 혼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들 중에 아무도 자기 소유를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매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니라. 그들 가운데 부족한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이는 땅이나 집을 소유한 자들이 다 그것을 팔아서 그 판 것들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더라.”(4:32~35)

지역교회들은 또 지체들의 필요를 돌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들을 서로 나누었습니다(고전 16:1~4, 고후 8~9, 11:27~30). 나는 여기서 기독교회에 헌금에 관한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규모가 큰 교회들은 성도들 중에 가난하게 사는 성도들에게 교회 안에서의 일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실내외 청소, 애찬준비, 시설 개보수 등을 성도들에게 맡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봉사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제안은 가난한 성도나 긴급한 필요를 위해서 헌금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헌금은 헌금하는 사람의 이름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성도의 이름을 쓰면 재정 맡은 형제들과 책임 있는 형제(장로나 목사)들은 이름이 적혀있는 성도에게 전달하고 격려하는 실행을 해야 합니다. 나는 예전부터 기독교회들이 고치지 않고 오랫동안 끌고 오는 것 중 하나가 헌금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봉투에 써서 헌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하지 못하고 성경적이지도 아닙니다. 봉투에 이름을 쓰는 것, 그것을 공개하는 것은 교회가 탐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탐욕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정도까지 우리는 교회의 사역 가운데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가 나누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려운 자가 교회에 있는가를 돌아보는 일, 그런 성도를 격려하고 돕는 일이 결국 구제의 은사를 가진 것입니다. 부유한 성도들은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주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성도들도 돈을 빌리러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교파들은 빙고게임, 바자회, 복권과 같은 것, 이런저런 헌금 목록으로 두려움을 유발시켜 거둬들이기로 돈을 마련합니다. 이런 방법은 주님의 교회가 그런 것들을 절대로 사용하도록 하시지 않기 때문에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지체들이 나누는 것에 대한 부담을 갖는다면 교회가 그 같은 방식 없이 그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드리면 드릴수록 교회는 헌금사역을 풍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교회의 사역 가운데 여러분이 나누기 위해 여러분의 부담을 이행하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에 대해 지키는 청지기들이다.

청지기는 주인을 위해 일을 수행하려고 다른 재산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데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의 시) 땅과 거기의 충만한 것이 {}의 것이요, 세상과 그 안에 거하는 자들도 그러하니 그분께서 바다들 위에 그것을 세우시고 큰물들 위에 그것을 굳게 세우셨도다.”(24:1~2)

숲의 모든 짐승과 천 개의 작은 산 위의 가축이 다 내 것이니라. 산의 모든 날짐승도 내가 알며 들의 들짐승들도 내 것이로다. 가령 내가 주린다 할지라도 네게 말하지 아니하리니 세상과 거기의 충만한 것이 내 것이로다.”(50:10~12)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 만군의 {}가 말하노라.”(2:8)

하나님은 동물들, , 금 등을 포함해 모든 것과 땅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우리의 소유물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들입니다(대상 29:12~14, 8:11~18, 1:17, 1:21).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는 것들만 소유하거나 주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 사용하거나 아니면 사용하지 않을 것을 결정할 능력을 갖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소유물들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서는 우리가 주인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진짜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제어하실 권리를 가지십니다(대상 29:11, 10:14, 14:22, 고전 10:26).

 

그들이 기도하기를 마치매 그들이 함께 모인 곳이 흔들리더니 그들이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니라. 믿은 자들의 무리가 한 마음 한 혼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들 중에 아무도 자기 소유를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말하지 아니하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매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니라. 그들 가운데 부족한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이는 땅이나 집을 소유한 자들이 다 그것을 팔아서 그 판 것들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더라.”(4:32~35)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소유물들이 진정 자신들이 주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필요한 믿는 이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소유물들을 우리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소유물들을 드리는 것을 분개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속해 있다고 깨닫는다면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을 위해서 그 소유물들과 재산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주의 물질()”처럼 교회재정을 생각하지만 우리 주머니에 있는 돈(물질, 재산)주님의 재무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교회에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청지기 중 또 다른 하나님의 청지기에게로 옮기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호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행위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소유물을 사용하는 청지기로서 우리의 의무를 꼭 수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재무에 대해 세심하게 사용하는 청지기입니까?

 

이 청지기직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다.

믿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자기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대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며”(2:44~45)

모든 믿는 자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나눠주고 있었고, 불평하는 이들이 없었습니다(4:32). 재산을 모으는 데 얼마나 힘이 들고, 또 그것을 지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까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나누어 성도들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재산이 소중하지 않을까요? 누가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재무가 특정한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주의 재무는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면 오늘날 아버지가 목사이면 자식에게로 대물림하는 세습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초대교회는 나누어 소유하는 것이 생활화되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만이 아니라 다른 형제와 자매들의 소유였습니다. 이렇다면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결코 돈거래는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거래로 인하여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을 포기합니다.

 

이에 제자들이 저마다 자기 능력대로 유대에 거하던 형제들에게 구호금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또 그것을 실행하여 구호금을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맡겨 장로들에게 보내니라.”(11:29)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능력에 따라 드렸습니다. 헌금을 능력이 있으면 인색하지 말고 드려야 하고 능력이 없으면 기꺼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또 많이 헌금한다하여 우쭐거리거나 적게 하는 사람들을 비웃지 말아야 합니다. 또 적게 드린다하여 많이 드리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헌금을 드리는 마음은 순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지시한 바와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주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자기 곁에 모아 두어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 16:1~2)

여러분 모두 당분간 백화점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한 주간 동안 절약하고 아껴 모은 재정을 재무 하도록 교회에 헌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헌금에 대한 올바른 사역입니다.

 

교회를 후원하는 것에 대해 부담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지체들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교회의 지체들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재정을 드리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거의 모든 모임가운데 돈에 대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몇 안 되는 지체들로 드려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더 드릴 수 있을지라도 비교적 적게 들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색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믿음의 분량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적은 것을 진심을 다해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엇을 많이 드려야 복 받는다는 샤머니즘이 아니요, 무속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더 드릴 수 있다면 이제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놓는 것을 그만두기를 선택하는 것은 여러분은 불신앙의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더 좋은 청지기가 되었다면 교회가 더 수행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드림에 있어 심판될 것이다.

자신의 재산을 가진 자는 그가 자신의 자산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청지기에게 지울 권리가 있습니다(16:1~2, 12:42~46, 고전 4:2).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인을 정하신 이후 그분은 책임을 추궁할 권리가 있고, 우리 모두가 심판을 받을 날을 정하시고 계십니다(17:31, 고후 5:10, 14:12, 25:31~46).

 

여러분이 예수 앞에 설 때 여러분은 여러분이 교회를 후원하기 위해 드린 것에 대해 부끄러워할까요? 아니면 여러분은 그 심판에 대한 보상을 받을 믿음 있는 참된 청지기일까요? 이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III. 규칙적으로 헌금하기

 

 

매주 첫날에 드리기

이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지시한 바와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주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자기 곁에 모아 두어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 16:1~2)

이 성구를 여러 번 응용하고 적용하려는 것은 언제 어떻게 헌금사역을 해야 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기를 바라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주제입니다. 매주 첫날에 드리십시오. 성경이 어떤 날에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행동을 우리에게 말할 때 그 행동이 그 날이 돌아올 때마다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만일 거룩한 날이 어떤 달() 어떤 날()이라고 말했다면 그 후에는 매년 집회를 했을 것이고 그달 그 날에 집회를 갖고 또 헌금을 했을 것입니다(12:18, 16:29, 23:5~6, 24, 34). 안식일은 매주 일곱 번째 날에 있었습니다(20:8~10). 이것은 매주 돌아올 때마다 그 날에 계속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은 매주 첫날에 주의 만찬과 드리는 것을 갖도록 우리에게 말합니다(20:7, 고전 16:2). 필요한 영향은 매주 첫날이 될 때마다 그 날에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같은 언어를 사용합니다. 한국인은 한글, 일본은 일본어, 중국인은 중국어, 프랑스는 불어, 독일은 독일어, 영국과 미국은 영어를 사용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모임이 매달 두 번째 화요일에 모인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매달 그 날 그 때에 모이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렇죠? 만일 여러분의 고용주가 당신은 매주 마지막 날에 급료를 지불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면 여러분은 매주 급료를 지불받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처럼 규칙적이고 정기적이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린도전서 16:2절은 너무 분명하게 여러 번역본에서 실제로 모든, 전부, 라는 단어를 넣은 것은 매주 첫날에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NAS, NI, RS, NE의 성경들을 참고해 보십시오.

 

확실하게 교파들이 한 달에 한 번 이나 일 년에 한 번씩 주의 만찬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이요, 마찬가지로 그들이 평일에 모이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형제들이 재산을 많이 갖고 매주 첫날에 드릴 수 있는 때 아직까지도 그렇게 실행하는 것을 실패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것과 다르게 짜였습니다.

 

교회 모임에 참여하는 것과 드리는 것

대부분의 교회 지체들은 소유한 재산을 드리는 것을 실패합니다. 그들은 모임들에서 예배하는 것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놓쳤을 때 드리는 것에 실패한 것에 대해 나중에 만회하지않습니다. 이것은 놓치는 것에 연관된 많은 문제들 중 하나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한 주에 10,000원씩 드리기로 했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드려야 할 10,000원을 헌금하는 것을 주일에 놓쳤다면 여러분은 소유한 대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소유한 것이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명령에 맞춰 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딱 10,000원을 도둑질 한 것입니다(3:8~10). 이것은 십일조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헌금을 말하는 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규칙적으로 교회에 일주일 동안 절약하고 준비한 헌금을 드립니까? 이것은 십일조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