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퍼런스/교회

우리는 언제, 얼마나 자주 주의 만찬을 가져야 하는가? I

Hernhut 2012. 8. 6. 20:22

 

우리는 언제, 얼마나 자주 

주의 만찬을 가져야 하는가?

합당한 시간과 주의 만찬의 빈도수

성임현헤른훗

 

언제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만찬에서 예수의 죽으심을 기억해야 할까요? 우리는 주의 날이나 일곱 번째 날에 만찬을 해야 하나요? 교파들은 누룩 없는 빵, 포도주를 가지고 매주, 매달, 혹은 분기별, 1년에 한 번씩 실행할지 모릅니다. 이 연구는 시간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주의 상에 참여하는 빈도수에 대한 가르침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서론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위한 합당한 시간과 빈도수는 어떻게 됩니까? 어떤 종교적인 무리들은 “주의 날”을 믿기 때문에 주일(일요일)에 만찬을 갖고, 다른 어떤 무리들은 일주일의 마지막 날에 주의 만찬을 가졌기 때문에 안식일에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다른 이들은 매달, 분기별, 연도별, 혹은 특별한 거룩한 날이나 그들이 좋다고 느낄 때 언제든지 갖습니다. 또 어떤 무리들은 주중에 만찬을 갖습니다.

 

여기서는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성경적 대답을 갖게 될 것입니다.

 

(1) 얼마나 자주, 언제 우리가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를 가져야 합니까?

(2) 주의 만찬에 대한 시간과 빈도수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I. 배경소개

   

A. 성경의 권위에 대한 원리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것에 대해 성경적인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그것을 가르침 받은 것이 없이는 하나님의 섬김을 실행하는 데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실행을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마치 그분께서 말씀하시고 그것을 바꾸시지 않으시는 것을 기꺼이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며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마 15:9)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배가 사람의 교리에 바탕에 둔 것이라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영역에서 이 말씀이 적용됨을 명심하십시오. 예를 들어 요즘 기독교회들마다 유행처럼 번지는 여성 목사, 장로를 세우고, 함부로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 분파하고 분당하는 것들, 세습하는 것, 교회 건물에 목숨 거는 것, 맘몬주의, 정치참여, 목사들의 맹목적 권위발휘, 성직자와 성도들을 경계를 긋는 것, 목사들의 성 추태, 등은 한국교회 중심을 파고드는 암적 존재이며, 악의 축입니다. 글을 쓰면서도 다른 곳으로 흘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기독교에서 사라져야하는 분명한 사탄의 누룩이요, 전략이요, 궤술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도 싫어하거나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거나 더 적극적으로 비난내지는 이단으로 몰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예방접종을 받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한 것 같이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너희가 받아들인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9)

나는 이 메시지를 쓰면서 주님께 나아갑니다. 진정한 진리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파나 교단에서 실행하는 것이 진리에 맞지 않더라도 그대로 그것을 인정하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들과의 교제가 끊어지면 자신이 도태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들의 시류에 편승되어 갑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비춰보면 이것은 편승해 가는 자들이 문제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가르침을 받은 복음보다 다른 어떤 것들을 가르친다면 이미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지으며 그리스도의 교리<역자: 복음>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없고 그리스도의 교리<역자: 복음>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아버지]와 [아들]이 둘 다 있느니라.”(요이 1:9)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에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가지지 못한 것이요, 하나님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거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깁니까? 나는 후배들이 목사를 하기 위해 신학대학에 간다고 했을 때 ‘형제, 자네가 신학을 한다고 하면 말리지 않네. 하지만 복음 이외의 것을 가르치지도 또 그들에게 끌려가지는 말게나. 그리고 만일 자네가 교회나 하나님의 사역을 놓았을 때에는 목사로서 살지 않는 것이기에 망설임도 없이 목사직을 내려놓고 성도로서 섬기기를 기뻐하시게.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이라네.’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날 기독교회의 목사들이 성도로서 주를 섬기기를 두려워합니다. 권위를 갖기 좋아하고 너무 가르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적 권위는 직책이나 직분이 아니라 성경을 따르고 성경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완전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기 원하시는 모든 것으로 완벽하게 안내 합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분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자기가 들을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시리라.”(요 16:13)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해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도다.”(벧후 1:3)

우리는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 실행에 있어서 다른 복음으로 실행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들을 실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실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특별히 금지하도록 하는 구절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행하도록 말씀하실 때 마치 그분께서 다른 것을 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그렇다할지라도 우리가 어떤 다른 것을 실행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그분께서 한 가지 것을 실행하도록 말씀하시고 우리는 다른 것을 행하고 인간의 교리를 따르고 성경에 없고 사도들이 가르치지 않은 다른 복음을 따른다면 우리의 경배는 헛된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자입니다.

 

왜 우리는 주님의 상에 우유와 양고기나 소고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누룩 없는 빵(효모로 부풀리지 않은 빵)과 포도나무의 열매의 즙(발효된 포도주)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침례를 줄 때 물을 붇거나 뿌리지 말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침례 가운데 매장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어린 아이들의 침례를 하지 않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침례를 받기 이전에 복음을 이해하고 믿고 회개하고 또 고백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과 다른 많은 실행들은 비록 그것들을 분명하게 금지하는 구절들이 없다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들이 성경적인 권위가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성경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의 만찬을 어느 날에 가져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찾지만 우리가 다른 날에 주의 만찬을 실행한다면 우리는 인간적인 권세로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원칙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권세를 따르는 원칙은 이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다른 주제들의 본질입니다. 명령하지도 직접적인 말씀도 하지 않지만 예들과 필요한 추론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 거하는 우리는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말하는 것을 따를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을 본과 이유로 가르친 것은 다른 때입니다.

“참으로 너희가 심지어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나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가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 2:21)

예수님은 본을 남기셨습니다. 그 본은 우리가 그분의 발걸음을 따라야 하는 예입니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주제에서 벗어나 있지만 오늘날 많은 교파들의 전통, 교리, 틀에 박힌 생각에서 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가려고 하는 길을 자신들의 방법으로 정죄하는 것을 볼 때 많은 슬픔이 밀려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따르는 자가 되고 또 너희가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 같이 그렇게 걷는 자들을 주목하라.”(빌 3:17)

“너희는 내 안에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들을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빌 4:9)

바울은 본보기처럼 따르도록 한 예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들은 것들 뿐만 아니라 바울 안에서 볼 수 있었던 것들을 행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 교파의 교리를 가르친다면 온전하고 합당한 교회는 아무리 벽에 부딪치더라도 그리스도와 성경의 이름으로 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문제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유대 성전에서 제물을 사고팔고 돈 바꾸는 일을 할 때 상을 엎으신 일에서 우리를 경고 하셨습니다(마 21:12~17). 우리가 오늘날 삶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 11:1)

바울이 그리스도를 따랐던 것처럼 바울을 따르십시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니 그들은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느니라.”(히 5:14)

성경으로부터 배운 모든 공과들은 단순하고 상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연구를 함으로서 우리의 감각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합당한 결론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교파와 그 교리, 사람들의 가르침을 통해 교회가 건축되어 간다면 아직도 그들이 하나님을 갖지 않은 자들이요, 단지 모양만이 거룩한 생활을 하는 기만적 행위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아무리 신학박사, 신학교수, 성경해석가라도 말입니다.

 

“이제 그들이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지나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으므로 바울이 자기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 세 안식일에 성경 기록들을 인용하여 그들과 토론하며 설명하고 주장하여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났어야 한다 하고 또한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 하니”(행 17:1~3)

바울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을 성경에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을 분발시키지만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성경구절에서 행해진 것입니다(마 22:23~32, 히 7:11~25, 마 19:3~9). 그리하여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비록 그 자체의 결론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을지라도 말한 것으로부터 반드시 뒤따르는 것을 본보기와 이유로 계시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한 어떤 구절을 연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또한 대한 다른 구절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진실로 모세가 조상들에게 이르되,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들 중에서 나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너희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그가 너희에게 무엇을 말하든지 너희는 모든 일에서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그 대언자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는 모든 혼은 백성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리라, 하였고”(행 3:22~23)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모든 것들을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예수와 그분의 말씀 곧 성경외의 것이 교회나 믿음의 가정에 들어온다면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이에 마귀가 그분을 데리고 거룩한 도시로 올라가 성전 꼭대기에 그분을 세우고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관한 책무를 주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또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 4:4~7)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육체적인 음식을 소홀히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양식으로 사는 영적인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마귀가 어떤 구절을 인용했을 때 예수님은 마귀가 먼저 인용한 구절을 남용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또 다른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면에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실행하는 그분의 백성들을 받아들였다고 보여주는 구절을 안 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여 실행하는 그들을 받아드리셨다는 것을 또 다른 구절에서 알게 됩니다. 우리는 다 이룬 방식이 문제를 이룬 것이 아니라고 결론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제를 갖고, 덧붙이고, 또 어떤 것을 실행하기 위해 계시된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음을 아는 모든 지식을 취한다면 그것이 우리가 따라야 하는 유형입니다.

 

 

B. 성경적인 기념일과 잔치에 관한 관점

주님의 만찬은 기념적인 잔치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죽으심에 참여합니다(마 26:26~75, 고전 11:23~34).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의 기념과 잔치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것들은 오늘날까지 유효하지 않습니다(히 10:9~10, 갈 3:23~24, 5:1~4, 골 2:14~16). 하지만 구약성경의 기록은 어떤 유용한 공과들로 우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롬 15:4, 고전 10:1~12).

 

하나님은 언제든지 자신께 경배 가운데 특별한 기념이나 잔치를 하도록 허락하셨고 그분은 항상 언제 얼마나 자주 그것을 행할지를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념적인 잔치를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분한 가치가 있었고 또 그것을 실행할 때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분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에 대해 어떤 예외가 없습니다.

 

• 유월절- 출애굽기 12:6, 14, 24~51절에서

매년 첫 달 14일에 행하도록 말씀되었습니다.

• 나팔절- 레위기 23:24절에서 매년 7월 1일에 행하도록 명령되었습니다.

• 속죄제- 레위기 23:27절에서 매년 7월 10일에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 장막절- 레위기 23:39~44절에서 매년 7월 15일에 행하고돌 하셨습니다.

• 안식일- 출애굽기 20:8~11절에서 매주 일곱째 날에 거행하게 하셨습니다.

• 주의 만찬- 사도행전 20:7절에서 매주 첫날에 행했습니다.

 

하지만 주의 만찬을 제외하고 모든 기념일이나 잔칫날은 율법에 의한 것이요, 또 옛 언약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새 언약의 시대가 2,000년 전에 일어났기에 새 언약의 기념과 잔칫날을 실행해야 한다는 엄연한 근거가 있습니다. 어떤 무리들은 안식일을 한 주의 마지막 날에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새 언약의 사람들이라면 주의 만찬을 포함해 주의 날을 주일 곧 한 주의 첫날에 실행하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먹고 마시기 위해 특별한 시간과 특정한 빈도수를 갖지 않고 실행한다면 하나님의 정해진 기념일이나 잔칫날 중의 유일한 것을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새 언약에서의 주의 날과 주의 만찬을 누리는 것은 역사가운데 있는 가장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왜 기념하도록 하고 그것을 실행하도록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할까요? 왜 때에 관해 기준선을 남기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우리는 우리가 주의 만찬을 가질 때 우리에게 말하는 신약성경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념일을 준수할 날을 말씀하실 때 얼마나 자주 실행해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의 본을 이미 기록한 것을 보십시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단순하게 그것을 실행하도록 말씀하시지만 백성들은 그것을 얼마나 자주 실행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들은 지정된 날을 시작부터 끝까지 그것을 수행했습니다.

 

잔칫날이나 기념일이 모년모월모시에 시작되었더라면 사람들은 매년 그 시간이 될 때마다 수행했을 것입니다. 또 모월모일에 실행되도록 말했더라면 모월모일이 시작될 때마다 준수되었을 것이요, 그리하여 한 달에 한 번씩 실행해야 했을 것입니다.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일하는 엿새 동안에는 동쪽을 바라보는 안뜰의 문을 닫되 안식일에는 그것을 열며 월삭인 날에도 열지니라.”(겔 46:1)

“월삭인 날에는 그것이 흠 없는 어린 수소 한 마리와 어린양 여섯 마리와 숫양 한 마리가 될 것이며 그것들은 흠이 없을지니라. 또 그는 음식 헌물로 수소 한 마리에 밀가루 일 에바, 숫양 한 마리에 일 에바를 예비하며 어린양들에 대하여는 자기 손이 할 수 있는 만큼으로 예비하고 일 에바에는 기름 일 힌을 드릴지니라.”(겔 46:6~7)

한 주 모일에 시작하는 것이었더라면 한 주에 한 번씩 모시에 실행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수할 어떤 날을 정하셨을 때 빈도수도 안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고 그 날이 시작된 때부터 내내 실행되었습니다. 이것은 추론이 필요한 것이요 추론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날이 아니라 다른 날에 기념일과 잔칫날이 준수되었더라면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까요? 백성들이 정해진 날에 도착하여 그것을 준수할 수 있지만 그 준수한 것이 무효가 되었더라면 그분께서 기뻐하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