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부서지기 쉽고 연약한 그릇과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
남편은 지식을 따라 자신의 아내와 함께 거하는 것
이제 우리는 “부서지기 쉽고 연약한 그릇(아내)”라는 제목에 왔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사용한 말입니다. 베드로가 남편들이 아내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에 대해 권면을 할 때 사용했지요. 하지만 자매들이 자신들에 관해서 이것을 깨달음을 갖는 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너희도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그녀를 더 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는 자로 여기고 존중하라. 그리하여야 너희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벧전 3:7 흠정역). 모든 남편들은 아내가 남편 자신들로부터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형제는 지식을 따라서 아내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더 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남편들은 아내가 자신과 조화를 이루고 자신을 지지할 것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남편은 지식을 따라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7절은 아내의 모든 책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남편이 아내의 어떤 것을 제외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신 남편은 아내를 사랑만 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더 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편은 지식을 따라 아내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왜냐면 아내는 더 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남편이 아내를 너무 많이 제외시키지 말아야 하지만 아내는 남편을 모든 것을 제외시킬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어떤 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남편은 지식을 따라서 가정에서 아내와 함께 동거해야 합니다. 이것은 남편이 아내를 돌보는 방법 안에서 가장 좋은 판단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여성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합니다. 아내가 더 연약할 뿐만 아니라 모든 자매들이 더 연약합니다. 여러분이 자매라고 하는 한 여러분은 더 연약한 그릇입니다.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용어는 불쾌하거나 한층 모욕적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일 자매가 저알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다면 아내는 이 용어를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고마워할 것입니다. 왜 베드로는 자매의 그릇이 더 연약하다는 것을 강조를 해야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자매가 자신을 혹사하는 모든 압박으로부터 완화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남편에 대해 계속해서 말을 합니다.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는 자로 여기고 존중하라.” 모든 남편들은 아내들의 명예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성경에서의 “존중”은 아주 특별한 용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께 경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그것은 형제가 아내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존중하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존중하고 합당한 관심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존중하지 않을 때 남편은 사실상 자신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받는 공동 상속자이다.
베드로는 남편과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받는 공동 상속자”로 부릅니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생명의 은혜를 상속받는 자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서 남편이 받는 모든 생명의 은혜는 아내와 함께 공동으로 받아야만 합니다. 모든 남편들이 은혜를 체험할 때 그가 그의 사랑하는 아내의 도움 때문에 은혜의 누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편이 받는 은혜의 누림은 혼자서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 안에서 아내와 함께 나누려고 내놓아야 합니다. 혼인을 한 형제가 생명의 어떤 은혜를 받을 때 그는 자신을 칭찬(높이는 것)하고 아내보다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그것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이 받은 생명의 은혜는 아내와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생명의 은혜를 상속받는 자로 여깁니다. 이 같은 이유로 남편이 약할 때 자매가 너무 지배적이게 건강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임재 안에 있도록 아내가 훈련하여 건강하지만 아내가 너무 지배적이도록 건강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녀가 너무 지배적이라면 그녀는 “별”이 됩니다. 그녀가 많은 교회 일을 돌보고 있고 남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녀의 생명이 남편을 통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경우 생명의 은혜를 그녀가 받는 것은 상속을 받는 자로 여겨서가 아니고 오히려 그녀의 개인적인 수고를 통해서 받는 것입니다. 성경을 따르면 자매는 더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들이 생명의 풍성함을 받을 때 이 생명은 그들의 사랑하는 남편을 통해서 받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리하여야 너희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함으로 이 부분을 결론 내립니다. 남편이 아내와 함께 누릴 생명의 은혜를 나누지 않는다면 남편의 기도는 방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방해를 받다”라는 단어는 갈라디아교회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너희가 잘 달렸는데 누가 너희를 막아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갈 5:7 흠정역). 이 갈라디아교회에서 모든 긍정적인 것의 중심에 한가지의 부정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이 부정적인 요소는 긍정적인 모든 것들을 못 쓰게 만들었습니다. 남편이 지식을 따라 아내와 함께하는 방법, 더 연약한 그릇으로 다루는 방법, 존중하는 방법, 공동 상속자로서 아내와 함께 생명의 은혜를 받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남편의 기도는 방해받고 막힐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남편의 추구 안에서 긍정적인 모든 것들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남편의 기도를 응답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 합당한 이해를 가진 어떤 형제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 형제는 주님의 임재 안에서 생명을 더 받는 방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정생활에 활기, 활력, 희망을 줄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자매들에 관해 어떻게 말했는지에 대해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자매들이여, 성경에 따르면 여러분은 “부러지기 쉽고 더 연약한 그릇”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따라서 여러분이 너무 지배적이고, 강하고, 높고, 또 아름다워서는 안 됩니다. “그녀를 더 약한 그릇”이라는 용어는 지배적인 자매가 되는 것에 대한 여러분의 개념을 완전하게 뒤지어야 합니다. 성경이 지배적인 자매가 되려고 하는 여러분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지배적일 때 여러분이 생명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남편과 함께 생명의 은혜를 상속받을 자로 여깁니다. 성경은 여러분 자신이 아닌 여러분의 남편을 통해서나 여러분의 남편과 함께 생명의 은혜를 받기를 갈망합니다. 여러분의 남편은 여러분이 누리는 생명의 원천이 되어야만 합니다. 자매들은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내는 더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그릇이요, 남편과 함께 생명의 은혜를 상속을 받는 자로 여깁니다.
자매들은 아주 강하기 때문에 “더 연약한 것”입니다.
성경이 자매가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말할 때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매가 강한 것 보다 더 실제적이기 때문에 “더 약한 것”입니다. 자매는 무미건조하고 또 죽어있다는 점에서 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만 계속해서 그들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매들이 “약하다.”는 이유입니다. 약하게 되는 다른 방면이 있는데 이것이 주된 것입니다. 자매들은 그들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연약합니다.
레아와 라헬의 본
우리는 이것을 성경에서 많은 예로부터 볼 수 있습니다. 자매들에 대한 가장 좋은 예 중의 하나인 더 연약한 그릇은 야곱과 그의 아내들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 있는 창세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우리는 한절씩 살펴보겠습니다. 야곱은 모든 성경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두 아내 레아와 라헬과 혼인을 한 후에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와 함께 생각하는 두 아내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야곱은 라헬과 혼인하기로 계획을 세웠지만 라헬의 언니 첫째인 레아를 혼인시키려고 삼촌 라반에게서 속임을 당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야곱은 두 아내들 즉 레아를 위해 7년, 라헬을 위해 7년 총 14년을 삼촌 집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 두 자매들은 서로 아주 상이하게 달랐습니다.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우나 라헬은 아름답고 잘 생겼더니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므로 이르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칠 년 동안 섬기리이다, 하니”(창 29:17~18 흠정역). 어떤 사람은 레아가 영리하지 않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레아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해석합니다. 그렇지만 흠정역에서는 부드럽다고 해석해 놓았습니다. 왜냐면 레아의 눈은 흐릿해 있었고 어떠한 생명(생기)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지혜를 가지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라헬은 아름다운 사람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라마에서 거기서 애통하고 슬피 울며 크게 애곡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것은 라헬이 자기 아이들로 인하여 슬피 우는 것이라. 그들이 없으므로 그녀가 위로 받기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하였느니라.”(마 2:18 흠정역). 이것은 라헬이 또한 라헬의 인간성이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일 한 아내가 아주 영리하지 않았고 다른 아내가 너무 상냥하고 다정했다면 그것은 야곱이 가지고 있어야 했던 것처럼 아무래도 아주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부분을 통해 읽은 것처럼 우리는 자매들이 있었던 것이 얼마나 강한지를 볼 것입니다.
“주께서 레아가 미움 받는 것을 보시고 그녀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수태(受胎)하지 못하였더라. 레아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이르기를, 주께서 분명히 나의 고통을 보셨으므로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기 때문이더라.”(창 29: 31~32 흠정역). “르우벤”이라는 이름은 “아들을 보라!”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레아에게서 완전히 조정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아들 이름조차도 짓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레아가 더 연약한 그릇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레아는 자신이 강했기 때문에 약해져 있었습니다. 레아가 아이를 낳았을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지배하고 있었는지를 봅니다. “그녀가 다시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주께서 내가 미움 받는 것을 들으셨으므로 이런 까닭에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창 29:33 흠정역).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아는 야곱이 자신보다 라헬을 사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를 바탕으로 아들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레아와 라헬 사이에 아이들을 생산하는 경쟁이 심화되어 간다는 것을 봅니다. “그녀가 또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이번에는 내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이런 까닭에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창 29:34 흠정역). “레위”는 “연합한”을 의미합니다. “그녀가 또 수태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주를 찬양하리로다, 하고 이런 까닭에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고 낳는 것을 멈추었더라.”(창 29:35 흠정역). “유다”라는 이름은 “찬양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마침내 레아는 주님께서 그녀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레아는 주님을 찬양을 했고 그녀의 아들 이름을 유다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후 레아는 아이들을 낳는 것이 멈추었습니다. 이것은 레아가 아이들을 더 이상 낳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분을 찬양을 할 수 있었는지를 보시려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훈련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레아가 아이들을 낳는 것으로 남편 야곱을 이기려고 하는 것을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레아는 혼자서 주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레아는 자신의 수고를 그쳤고 주님께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찬양이 레아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레아가 단산이 된 후 라헬이 경쟁으로 들어갔습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기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달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으리라, 하니”(창 30:1 흠정역). 이제 우리는 베드로가 자매들은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말했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봅니다. “야곱의 분노가 라헬을 향해 타오르므로 그가 이르되, 당신이 태의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금하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내가 그분을 대신하겠느냐? 하매”(창 30:2 흠정역). 다른 말로 말하자면 야곱은 “난 하나님이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남편에게 같은 일을 얼마나 많이 말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남편이 “난 하나님이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야?”라고 당신에게 말해야 했던 곳에 남편을 얼마나 많이 밀어 넣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이것은 자매들이 더 약하다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라헬과 레아로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봅니다. 우리는 레아와 라헬의 고집스러움, 경쟁적임, 시기와 질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녀가 이르되, 내 하녀 빌하를 보라. 그녀에게로 들어가라. 그녀가 내 무릎 위에 자식을 낳아 주리니 그러면 나도 그녀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으리라, 하고 자기 여종 빌하를 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녀에게로 들어갔더니”(창 30:3~4 흠정역). 라헬은 야곱에게 “만일 당신이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은 나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야곱이 그것에 동의 했습니다. 야곱은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야곱은 아주 약삭빠르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형제와 아버지를 속이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씨름을 하여 이기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그는 아내들을 다루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자매가 너무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 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그의 아내들과 함께 하는 것에는 그 또한 강한 자여서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싸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라헬이 말한 대로 야곱은 라헬의 여종 빌하에게로 갔습니다. “빌하가 수태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으매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께서 나를 판단하시고 또 내 목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런 까닭에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창 30:5~6 흠정역). “단”이라는 이름은 “판단”이라는 뜻이요, 라헬이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러주셨다.”고 말한 것처럼 “단”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라헬의 하녀 빌하가 다시 수태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니 라헬이 이르되, 내가 내 언니와 큰 싸움을 싸워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창 30:7~8 흠정역). “납달리”는 “나의 씨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자매들에게 경쟁이 얼마나 심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이름조차도 서로 경쟁적으로 선택하여 지었습니다. 결국 레아는 경쟁을 하러 돌아왔습니다. 레아는 라헬이 사용하고 있었던 방법을 사용할 생각을 했습니다.“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춘 것을 보고 자기 하녀 실바를 취하여 야곱에게 아내로 주었더니 레아의 하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창 30:9~10 흠정역). 야곱은 절대로 싸우지 않았고, 언쟁을 하지 않았으며, 그는 어떠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심지어 자신의 아들들 중 이름을 짓는 권리도 갖지도 않았습니다. 그 자매들이 다 했습니다. “레아가 이르되, 군대가 오는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레아의 하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나는 행복한 자니 딸들이 나를 가리켜 복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창 30:11~13 흠정역). “갓”은 “행운”을 의미하며 “아셀”은 “행복, 축복된”을 뜻합니다. 이제 이 이야기는 한층 더 이상해집니다. “밀을 수확할 때에 르우벤이 들에 나갔다가 합환채를 찾아 자기 어머니 레아에게 가져왔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내게 주라, 하매 레아가 그녀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하니 라헬이 이르되, 이런 까닭에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함께 누우리라, 하니라.”(창 30:14~15 흠정역). 사실상 라헬은 야곱이 처음부터 원했던 아내였습니다. 라헬은 자신이 야곱의 정처(正妻)였다는 것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삼촌 라반에게 속았기 때문에 레아하고만 결혼을 했습니다. 야곱은 단순하게 레아를 취했고, 라헬을 위해 또 7년을 라반의 집에서 일을 했습니다. 레아는 자신이 남편을 강탈하였다는 것이 아주 정확하지 않은 것이라고 라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자매들은 절대로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두 자매는 많은 잘못을 했지만 그들은 결코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고집이 세고 경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합환채(맨드레이크 혹은 메이 애플)에 대한 이 이야기로 그들은 이런 작은 문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라헬과 레아는 서로 겨루고 또 싸우는 것에 어떠한 핑계 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싸우고 있는 합환채는 무엇에 사용하는 걸까요? 합환채는 마약과 비슷한 약물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이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허브라고 여겼습니다. 이 자매들은 그것을 이와 같이 싸우는 문젯거리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사실 합환채에 관해서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작은 문젯거리로 싸우기를 좋아하는 더 연약한 그릇들이었습니다.
“라헬이 이르되, 이런 까닭에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함께 누우리라, 하니라.”(창 30:15b 흠정역). 라헬은 레아에게 뇌물을 약속했습니다. 이들 자매들은 아주 교묘하게 일을 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라헬은 영리하였습니다. 라헬은 합화채을 원했고, 상항을 다루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라헬은 그날 밤에 야곱과 함께 있도록 레아에게 허락했습니다. “저녁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맞이하며 이르되, 당신은 반드시 내게로 들어와야 하리니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확실히 세내었노라, 하매 그 밤에 야곱이 그녀와 함께 누우니라.”(창 30:16 흠정역). 야곱은 이토록 한심스런 남편이었습니다. 그는 온 종일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휴식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야곱의 아내들은 야곱에 대한 모든 것을 이미 결정을 해놓은 상태였습니다. 남편을 어떻게 합환채와 바꿀 수 있습니까? 이런 일은 아주 값싼 것이요, 회귀한 거래였습니다. 야곱은 ‘당신 무슨 말을 하고 있어? 내가 당신에게 가길 원하면 내가 그렇게 할 거야. 내가 원하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당신 아들의 합환채로 나를 빌렸다니 무슨 말 하는 거야?’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합환채는 아주 작은 일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아내들에게 항복했습니다.
더 연약한 그릇의 특징
이 이야기는 자매가 더 연약한 그릇이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인간의 그릇이 “더 연약”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고집스럽고, 다루기가 힘이 들고, 경쟁하고, 지배하며, 자만하는 존재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라헬과 레아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남편을 절대로 살피고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주님 앞에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항상 “이제 내꺼야!”라고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쟁, 완강함, 조정, 그리고 자만은 그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었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이 지점까지 야곱은 어떤 아들들의 이름을 짓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이 때어나서 자란 후에도 아들 중 하나를 부르게 될 때마다 야곱은 아내들을 거쳐서 가야하는 어려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빌하가 아들을 낳았을 때 라헬이 “납달리”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왜냐면 그녀는 레아를 이기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납달리를 부르게 될 때마다 아내들이 서로 어떻게 싸우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이와 같은 것을 어떻게 통과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물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야곱은 우리에게 ‘나는 지식을 따라 나의 아내들을 다루었다. 나는 그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었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에서 야곱과 그의 아내들에 관한 이 부분을 읽을 때 거의 우리를 웃게 만듭니다. 이것이 무슨 내용이지요? 이것이 어떤 가정생활의 내용입니까? 집안의 머리에 있어야할 야곱은 어디에 있습니까? 야곱에 대해 아는 우리 모두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일하러 들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틀림없이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다는 실제 상황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자매들 모두 묘사하는 이 내용을 좋아합니다. 그들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기란 힘든 것입니다. 레아는 라헬이 자신의 남편을 취했다고 느꼈습니다. 라헬은 아버지 라반이 속였기 때문에 레아가 야곱에게 정상적인 혼인을 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레아는 많은 아들들을 낳음으로 이겼다고 느꼈습니다. 라헬은 ‘만일 내가 아들을 갖지 못한다면 난 죽어버릴 것이다.’라고 느꼈습니다. 이 두 자매는 결코 서로 화평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휴전이라는 것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항상 경쟁하는 것, 싸우는 것, 고집부리는 것뿐이었고, 절대로 그런 것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베드로가 자매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말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든 형제들보다 훨씬 더 강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매들이여, 이 말씀을 은혜로 취하십시오. 자매가 부드러워 보일 수는 있지만 말할 때뿐입니다. 혼인을 하지 않은 자매들은 아주 부드럽고 달콤하게 행동할 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결혼을 하면 남편을 거침없이 집어 삼킬 수 있습니다. 아주 소수의 자매들은 남편들이 자매들을 두려워하는 만큼 남편을 두려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면 자매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매들이 “성공”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자매가 성공을 하지 않으면 그들이 성공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자매가 아직도 성공을 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들은 꼭 성공할 수 있도록 남편을 강요할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더 연약한 자매인지를 보여줍니다. 자매들은 지금 그들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감각이 없다는 점, 배려가 없다는 점, 합당한 판단이 없다는 점에서 약합니다. 이것은 남편이 자매들을 다루는 데 지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연약함이 필요치 않는 것은 어떤 책임을 수행한다거나 어떤 부담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이런 경우였다면 형제들 또한 약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형제가 자매보다 더 연약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형제는 보통 아이들을 동시에 돌볼 때에 하루 세끼를 요리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형제에게는 너무나 힘에 겨운 것입니다.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남성들은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자매의 연약함은 주된 여성의 특징입니다. 자매는 매우 특별한 여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특징은 베드로가 자매가 “더 연약한 그릇” 말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매가 아름답고 값비싼 다이아 반지를 가지고 있다고 추측해 보십시오. 이것은 다른 자매들이 쉽게 시기하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왜 자매들은 다이아몬드 한 조각에 관해 아주 많이 관심을 갖는 걸까요? 그것은 경쟁과 자만 때문입니다. 자매들은 자주 제일 좋은 것을 갖기를 갈망합니다. 옷과 헤어스타일도 이러한 것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이 경쟁 안으로 자매들을 데려올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이것은 같습니다. 자매가 다른 자매들의 영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것보다 형제들이 다른 형제들을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여러 형제들과 자매들이 함께 봉사모임 있고 그 모임이 어떤 기도로 시작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인도하는 형제 중 하나가 어떤 자매의 기도에 대해 칭찬을 하고 한 예로서 사용합니다. 다른 자매들은 그 모임 나머지에 대해 어려운 시간을 갖게 할 확률이 높습니다. 형제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지만 자매들은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더 약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경쟁하는 기질로는 자매들이 자라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자매들이여, 이것 모두 여러분 내면에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까? 우기는 것, 주장하기, 경쟁하기, 자기만족, 지배하려는 본성이 여러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편협함, 옹졸함, 잘못을 용서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자매들은 쉽게 불쾌해집니다. 불쾌해지면 그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 달 동안이나 심지어 몇 년을 기억할 것입니다. 더 연약한 그릇이 되는 것은 여러분의 주님을 따르는 것에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더 연약한 그릇이 되는 것은 생명 안에서 여러분의 성장이 한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매들은 아주 많은 것을 돌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대개 형제들보다 더 작습니다. 작게 되는 것은 좁게 되는 것이며 좁게 되는 것은 많은 것들을 차지하게 된 사람이 되는 원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매일 불쾌한 모든 것들이 기억할 수 만 있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곳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서 주님에 대해 누립니까? 어디에 교회생활이 있습니까? 어디에 말씀에 대한 풍성이 있습니까? 그런 것들을 위해서는 작은 공간이 잇을 뿐입니다. 왜냐면 이미 여러분의 온 사람-몸, 혼, 영-은 부당한 것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것은 더 연약한 그릇이 되는 것이 여러분이 주님을 따르는 것에 실망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너무 많은 압박은 자매들이 “태만하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디모데전서에 있는 자매들과 관련된 바울의 말씀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과부들은 거절하라.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슬러 방탕(放蕩)하기 시작할 때에 결혼하리라. 그들은 자기들의 처음 믿음을 내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또한 그들은 게으르게 지내는 것을 배워 이 집 저 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수다쟁이와 참견하기 좋아하는 자가 되어 자기들이 마땅히 말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말하나니”(딤전 5:11~13 흠정역). 바울은 과부들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게으르게 지내는 것을 배우는 것”에 대한 원칙은 대개 자매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경쟁할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게으르게 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형제들은 긍정적인 것으로 경쟁을 돌릴 가능성을 더 가지고 있지만 자매들은 대개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만일 형제들이 일 년에 3번 성경을 읽기를 경쟁한다면 그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매들은 이와 같은 경쟁이 실제의 압박이 될 수 있습니다. 자매들이 ‘난 그것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더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그들에게 압박이 됩니다. 그들이 압박을 받으면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게으름이 그들을 느슨하게 하기 때문에 게을러집니다.
자매들이 게을러질 때 그들은 집에서 집으로 떠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이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매들이 너무 경쟁적일 때 그들이 서로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매들은 서로에게 가깝게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경쟁적일 수도 있습니다. 자매들이 경쟁적일 때 그들은 자주 서로의 가정에 갈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바울이 게으르게 되는 것에 관해 그들을 경고하는 이유입니다. 자매들이 게을러지는 이유는 그들이 압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긍휼로 자매들이 ‘난 더 연약한 그릇이야. 내가 너무 지배적일 필요가 없어. 주님, 난 자만을 위한 나의 갈망을 끝냅니다. 나는 나의 경쟁을 내려놓습니다.’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게으름은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경쟁적일 때 우리가 주님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경쟁적이게 되는 것은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므로 우리를 압박하도록 하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자매들이 경쟁, 자만, 지배하기를 갈망함에 흠뻑 젖어들게 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일들, 사람들, 문제들에 이기기를 갈망함으로 흠뻑 젖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지나치게 좁고, 작게 될 수 있고 또 용서하기 힘들게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타인들에게서 잘못된 모든 것, 잘못 행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조차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또한 아주 높고 지배적이도록 갈망합니다. 교회생활에서 이것은 그들을 너무 압박하게 되고 경쟁적이도록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게을러지는 것입니다. 게을러지는 것은 건강이 필요 없지만 적어도 자매들이 느끼는 걱정거리를 덜어 줍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압박들을 다루는 방법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자매들은 교회생활에 오고서 약 2년 후에 그들은 더 이상 압박을 다루는 방법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압박을 다루는 것은 무리인 것 같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어떤 사람들을 어떠한 사람을 데리고 오거나 좋은 증거를 주는 것이나 성경에서 어떠한 빛을 얻는 또 다른 자매에 관해서 들을 때마다 그들에게 압박이 됩니다.
사랑하는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여러분이 걱정하기가 쉽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형제들은 긴장상태를 다루는 데 더 낫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과 잠을 잘 잘 때까지 많이 다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매들로 또 다른 것이 왔을 때 분을 내고 실망하기가 쉽습니다. 상황에서 이기는 방법, 어떤 것을 하거나 어떤 것을 말하는 방법, 심지어 자신감을 얻기 위해 상황을 활용하는 방법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의 온 사람-몸, 혼, 영-은 소모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생명 안에서 실제로 성장하는 어떤 마음을 여전히 갖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압박을 푸는 것과 적극적인 것으로 점령되는 것
자매들이여, 주님의 은혜로 압박에서 벗어나십시오. 경쟁하지 마십시오. 누군가 딴사람이 그리스도께 사람들을 데려 온다면 행복해 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선한 증거를 준다면 그 때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또 다른 사람이 성장한다면 그것을 즐거워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위험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게으르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집에서 집으로 옮겨 다니며 여러분이 말해야하는 것을 말하는 어떠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압박이 풀리면 여러분의 온 사람-몸, 혼, 영-이 시도하는 것과 섬기는 것과 같은 긍정적인 것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여하히 자매들이 교회생활 안에서 아주 건강하게 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주님 앞에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난 어떤 자매가 될 수 있어. 난 어떻게 쓰일 수 있는 것을 가질 수 있어. 난 주님을 위해 어떤 것을 할 수 있어.’라고 지배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그와 반대로 주님의 임재로 오십시오. 주님께 간단히 말씀하십시오. “주님,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난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난 스스로 높이려 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난 항상 경쟁적입니다. 항상 지배적입니다. 내 자신을 위해 어떠한 것을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더 연약한 그릇이기에 나는 너무 좁고 작습니다. 어떤 것을 용서하고 또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 난 당신의 긍휼이 정말 필요합니다. 난 불필요한 모든 압력을 내려놓기 원합니다. 모든 경쟁에서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주님, 건강한 것들과 긍정적인 것들만으로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여러분이 신중해지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것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날 때마다 “조심해”라고 스스로 말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남편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거나 지배하려는 데 능숙해지기 시작할 때마다 여러분이 자신을 ‘나는 더 연약한 그릇이야. 조심해.’라고 상기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자주 여러분이 어떤 것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생각합시다. 뭐 그런 것 경쟁, 부러움, 시기 등 말입니다. 그러고 나면 곧장 ‘난 더 약한 그릇이야.’ 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은 압박을 받을 필요가 없고 또 비난을 받을 느낌도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주님께 ‘난 내가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난 당신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교회생활에서 스스로 훈련하는 방법을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더 연약한 그릇이 되려고 고의적으로 약하도록 하는 훈련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남편에게 ‘주님을 찬양한다. 나는 더 약하다. 당신은 이것을 모른다. 당신은 생명의 은혜가 필요하다.’라고 말하도록 돌아가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아주 주의를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이 보호하는 것을 가질 때 여러분은 합당한 훈련 또한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기도하는 훈련, 주님을 섬기는 훈련, 사랑하는 훈련, 교회를 돌보는 훈련을 할 것입니다.
남편들이 그들의 아내들을 생명의 순수한 방식으로 얻는 것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에게서 이 구절을 연구를 했고 이제 우리는 어떠한 격려를 위해 계속해서 베드로에게 돌아 가야합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것은 누가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여도 그들 또한 말없이 아내의 행실을 통해 얻고자 함이니 두려움이 동반된 너희의 정숙한 행실을 그들이 눈여겨보느니라.”(벧전 3:1~2 흠정역). 다시 말해서 만일 여러분이 믿지 않은 남편을 얻거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을 얻는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남편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러분을 좌절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하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여러분에게 ‘나에게 복종해. 노름판에 가자.’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안 돼!’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합당한 머리직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것을 동의의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종하는 것은 진실로 태도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의 태도는 항상 여러분의 남편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비록 여러분의 남편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는 그의 아내로서의 여러분의 행동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분발시키는 구절입니다. 베드로는 ‘자매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더 약한 그릇들이라고 남편들에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러분에게는 말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더 약한 그릇이든지 아니든지 잊어버리라. 사랑하는 자매들이여, 여러분에게 난 단순하게 되는 것을 배우라고 말할 뿐이다. 여러분의 남편들에게 복종하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남편들은 자신들의 아내들에 대한 순수한 행동을 자신들의 눈으로 볼 것입니다. 남편은 생명에 대한 자신의 아내의 순수한 방식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매의 날마다의 생활에 집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 실례를 들어 “여러분의 남편이 구원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 그는 가까이에서 여러분이 사는 것을 증거할 것이다. 여러분의 행동, 대화, 순결이 결국 그를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감춰진 남자: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 썩지 않는 장식
이 장에 있는 다음 구절은 자매들에게 귀중한 것입니다. “너희가 단장하는 것은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며 옷을 차려입는 그런 외적 단장으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으로 하되 썩지 아니하는 것 즉 온유하고 조용한 영(靈)의 장식으로 할지니 그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흠정역). 베드로는 만일 매일매일 합당한 생활을 하기 원한다면 여러분의 머리, 금, 옷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여러분의 고려를 내려놓으십시오. 베드로는 단순히 우리의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장식은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으로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매들이여, 비록 여러분이 더 연약한 그릇이라 할지라도 여러분 안에 “감추어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까? 감추어진 사람은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 썩지 않는 장식입니다. 모든 것들이 레아와 라헬과 연관되어 있는 것보다 더 일찍 언급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이 두 자매에게는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들은 온유함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부러움, 질투, 다툼, 경쟁, 자만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온유함은 없습니다. 더하여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집에서 집으로 옮겨 다니는 게으른 자매들에 관해 언급했던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조용함입니다. 게으른 자매들은 그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한담을 하고 말참견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베드로는 “자매들이여, 비록 여러분에게 한계가 있을지라도 여러분 안에는 감추어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까? 이 감추어진 사람은 온유하고 조용한 영입니다. 이 감추어진 사람이 여러분의 장식이 되게 합시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여러분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들을 보도록 합시다. 무엇이 여러분의 밖으로 나와야 합니까? 온유와 조용한 영입니다. 무엇이 온유가 되게 합니까? 화내고 짜증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무엇이 조용하게 합니까? 불평하지 않는 것, 수군거리지 않는 것, 소문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진정한 영은 썩지 않는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자매들에게 ‘머리, 금, 옷과 같이 겉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을 멈추라. 여러분이 고정하는 것, 장식하는 것, 높이는 것, 빼앗은 것에 집중하는 것에서 멈추라.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안에 있는 것에 집중하라. 여러분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이 온유하고 조용한 영이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여러분에게서 살도록 하라. 그것이 여러분의 장식이 되게 하라. 왜냐면 이와 같은 장식은 썩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부분을 온유하고 조용한 영이 “하나님의 눈에는 지극히 값지다.”고 말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이와 같은 장식은 엄청나게 비싼 것입니다. 자매들이여, 그런 장식들은 아주 가치가 높고 갓이 비싸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자매들에게 특별한 것들이 있습니까?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을 아는 자매들은 온유하고 조용한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매들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눈에 지극히 비싼’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만일 감추어진 사람을 따라서 자신을 훈련하는 방법을 안다면 이 감추어진 사람은 어떤 것도 썩지 않습니다. 온유함이 있고, 조용함이 있습니다. 이 감추어진 사람에게 있는 것은 어떤 것도 지극히 값비쌉니다. 이 감추어진 사람이 나와 사는 것은 하나님의 눈에 지극히 귀한 여러분을 만듭니다. 자매들에게 말한 후에야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메시지 처음에 7절을 이미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다른 이해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너희도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그녀를 더 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자로 여기고 존중하라. 그리하여야 너희 기도가 방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벧전 3:7 흠정역). 자매로서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으로 살도록 훈련하고 있는 것이며, 남편들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7절은 읽고 있는 자매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며, 남편들에게 ‘당신은 보고 있는가? 난 더 연약한 그릇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난 할 수 있다. 당신의 지식을 사용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신 자매들은 온유하고 조용한 영인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베드로는 ‘당신은 지식을 따라 당신의 아내와 함께 동거해야 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당신의 아내는 심히 귀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하나님의 눈에 큰 가치가 있다.’고 남편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자매들은 심히 비쌉니다. 그들은 매우 귀중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높은 표현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자매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 보호되고 또 자매들이 온유하고 조용한 영으로 자신을 장식함으로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에게 집중할 때 그들은 심히 값지고 하나님의 눈에 귀하게 됩니다. 자매들이여, 만일 여러분이 이 문제를 본다면 여러분은 더 많은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압박을 덜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주님 앞에서 누림을 더 많이 가질 것이고 교회생활에서 합당하게 훈련하는 방법과 걷는 방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을 얻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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