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메시지/교회생활과 자매들의 역할

건강한 본을 따르는 생활

Hernhut 2012. 6. 24.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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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본을 따르는 생활

 

 

주님의 긍휼로 그분은 그분의 교회를 위해 많은 소중한 자매들을 얻으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주님의 증거를 지지하기 위한 자매들의 기능이 부족합니다. 많은 자매들은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이 기능을 발휘하려고 갈망할 때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어떤 것이 있든, 그들 자신들로부터 어떤 것이 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기능을 발휘하려고 할 때 그들은 빈번히 지나치게 압박과 좌절이 됩니다. 그들은 또한 그들이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그들의 위치를 넘는 것에 대해 염려됩니다. 자매들의 합당한 기능과 그들이 주님의 교회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메시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자매들은 생명의 움직임을 따라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자매가 되는 것은 문젯거리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자매들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방식으로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자매들은 단순히 여성 믿는 이들입니다. 형제들은 남성 믿는 이요, 자매들은 여성 믿는 이들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귀중한 피와 그분의 생명으로 회심하게 함으로써 얻은 성도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을 낳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제들과 자매들 사이에 작용하는 어떤 것이 있는지의 차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는지에 따라서 심히 본성적인 것이요, 또 자연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들과 자매들은 그들에게 누가 있느냐에 따라서 단순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가 자매들은 이렇게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요, 형제들은 이렇게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지시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우리는 자매들의 기능에 관련하여 우리가 문젯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매들은 주님의 교회에 결정적인 힘과 축복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들이 건강한 방식으로 움직일 때 큰 유익을 거둡니다. 하지만 많은 자매들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사람으로 자신들을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그들의 기능이 기대할 만큼 건강하지 않다고 좌절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이 건강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교회는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틀림없이 자매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런 방식으로 여러분 자신을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안에 있는 생명의 움직임에 대한 순수함과 진심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의 움직임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높습니다. ‘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어떻게 기능을 발휘해야 할까? 이게 내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것인가? 내가 너무 멀리 가고 있는가?’보다 더 높습니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의 기능은 아주 높은 영역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자격이 있든지 없든지 우리가 너무 멀리 가고 있는지, 너무 많이 방해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너무 관련되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의 움직임은 이 문제들보다 더 높이 있습니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의 기능은 주님의 생명과 이것이 어떤 교리적인 이해보다 더 높은 것에 따라서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형제들이 자매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반대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성경을 따르는 여인들은 전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자매들이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많은 형제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은 또한 자매들이 남자에 대해서 권위를 발휘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만일 자매들이 남자를 감독할 수 없다면 자매들이 알려져 있는 많은 형제들을 어떻게 일으켰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을 들은 후 자매들은 다음번에 교회가 복음집회를 가지면 내가 메시지를 주기 원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태도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 없지 않아 있습니까? 우리는 거기에 사실상 두 가지 극치를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매의 위치를 유지해야 하고 자매의 기능 안에 제한되어야 한다는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게 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움직임을 심각하게 좌절시킬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자매의 기능을 다스려야 하는 어떤 원칙을 줄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라 걷지 않는다면 우리가 우리의 증거를 잃을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교리적인 문제보다 더 높은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생명의 움직임을 따른 자매의 발휘는 우리의 계급보다 교리의 이해보다 더 높습니다. 자매들이여, 이런 이유로 여러분은 강하고 담대하게 되도록 용기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역에서 가능한 한 많이 훈련하고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왜냐면 교회는 여러분의 움직임이 너무 제한적이고 무력할 때 고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기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여러분은 난 자매다. 이것은 나의 배우고 있는 과정이다. 난 내 안에 생명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배우고 있다.’라고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기능을 문젯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지만 여러분은 자매로서 여러분의 위치를 존중해야 합니다. 기능 발휘를 지배하는 것과 조금도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 것 사이에 합당한 균형이 있습니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교리적인 이해보다 더 높은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생명의 움직임을 따라서 기능을 발휘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본은 우리의 행동들보다 더 결정적이다.

 

 

교회생활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합당한 본에 따라 사는 것이 우리의 품행 속에서 합당한 행동을 갖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 각별한 행동들을 갖고 있습니다. 아침에 우리가 성경을 읽고 주님의 임재 안에서 찬송을 부르고 우리의 영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낮잠을 자고 신문을 읽는다면 결국 우리의 밖으로 완전히 내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행동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활 속에서 관심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행동들이 아니라 본입니다. 이본은 무엇입니까? 그 본은 매일 아침 우리가 주님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성경구절을 읽고 또 찬송을 부릅니다. 이것은 합당한 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안에서가 아니라 육체 안에 있는 아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왜냐면 그 본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육체 안에서 성경을 읽고 주님께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 본은 건강한 것입니다. 우리의 본은 우리의 행동보다 더 결정적입니다.

 

 

 

어떤 가정들은 아이들이 설거지를 하는 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행동들보다 더 중요합니다. 십대 아들이 합당치 않은 태도로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부모는 그가 설거지하는 것을 멈추게 해야 하나요 아니면 끝낼 때까지 놔둬야 하나요? 부모는 아들에게 넌 영 안에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 안에서 하고 있구나. 비키 거라. 이것은 정말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일을 끝내도록 말을 그에게 했을 것입니다. 그가 합당한 본안에 있을 때 그의 행동들을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본은 저녁식사 후 매일 밤 아이들이 설거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분이 좋든 나쁘든 차이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옳은 본이 되는 한가지의 예입니다. 아이들 중의 한명이 격려를 받고 또 다른 시간에 자신 스스로 설거지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하면 그 아이의 행동은 옳은 것이지만 그것은 그 아이의 본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아이가 저녁식사 후 매일 밤에 설거지를 할 때 그 아이가 좋게 느끼든 나쁘게 느끼든 그것은 건강한 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들에 완전히 관심을 주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에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임에서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가? 교회생활에서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가? 나의 무슨 기능이 나의 영을 따르지 않는 것인가?’ 라고 우리 자신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문제는 교회 생활의 신성한 본을 따라서 내가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가?’라고 하는 질문뿐입니다. 그 대답은 분명하게 .’입니다. 이 의미는 너무나 많이 우리 자신을 분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본을 따라야 하고 행동에 집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매들이여, 그것은 여러분이 교회생활 안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입니다. 이 기능을 발휘하는 본안에는 그 양식과 함께 오는 많은 행동들이 있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여러분의 영 안에서 이런 행동들을 가져오기를 갈망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행동 중에 어떤 것을 가져오고 있다고 스스로 알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관련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 본은 여러분을 따르고 있는 것이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들보다 더 우리의 본을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에 대한 우리의 본에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옳은 양식 안에 있을 때 이 양식은 합당한 행동들을 산출할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를 저지르고 행동들이 합당하지 않을 때조차도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의 행동은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가정을 여는 것은 우리의 본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가정을 열어야 해.’라고 자매가 남편과 함께 결정하는 것은 건강합니다. 그 깨달음을 갖는 것은 합당한 양식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양식을 세울 때 우리가 영 안에 있든지 없든지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가정을 꾸준하게 여는 건강한 본을 갖는다면 우리가 영 안에 있었다거나 없었다는 느낌이 있을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나서 나중에 우리가 영 안에 있지 않다거나 어떤 방식이 부족했었다고 깨닫는다면 우리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몇 개의 접시나 그릇을 깨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비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배우는 과정의 모든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번에 우리는 더 잘할 것입니다. 다음번에 우리가 사람들을 초대할 때에는 우리가 영 안에 있기를 노력할 것입니다. 이 발휘는 건강한 본안에 있게 우리를 보호할 것입니다.

 

 

건강한 양식을 유지함으로써 감수성이 넘치는 것으로부터 보호 받기

 

 

자매들이여, 여러분이 교회생활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것과 움직이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매우 주의를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실을 받아들여 여러분의 감수성을 개입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난 자격이 있는가? 난 주님의 임재 안에 있는가? 난 기도할 가치가 있는가? 난 합당한 자인가?’라고 묻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 감수성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자매들은 내가 기능을 발휘할 때 내가 육체 안에 있는지 영 안에 있는지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부딪쳐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육체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지 않고는 영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너무 분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기능을 발휘할 때 육체 안에 있더라도 죽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이 늘 낫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따라 기능을 발휘하고 있거나 우리의 천연적인 능력으로 기능을 발휘하든지에 관해서 너무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칙 안에 있는 자매들은 아주 감수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매가 심한 책망아래에 있기 너무 쉬운 이유입니다. 우리가 이 영역 안에 우리 스스로 포함됨으로서 우리는 적을 위해 커다란 문을 엽니다. 사탄은 비난자요, 사탄은 모든 것에 대해 우리를 비난하려고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별하게 자매들은 감수성이 넘치는 것에 관해 아주 주의를 해야 합니다. 자매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생명의 기능을 따라서 그들이 할 수 있 것을 최선을 다하여 단순하게 기능을 발휘해야 합니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천연적으로 아주 예민하기 때문이며, 여러분은 행동들을 돌보지 말고 본을 돌보는 원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행동들에 관해 완전하게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여러분이 행동보다 더 본에 관해 관심하고 관련을 지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여러분의 양식입니다. 여러분이 옳은 본을 가지고 있을 때 여러분의 행동이 사라지는 때조차도 그것은 문제가 안 될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본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여는 것은 건강한 본입니다. 이 본을 따라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여러분은 별다른 뜻 없이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어떤 것을 할지 모릅니다. 만일 여러분이 우연하게 여러분의 육체를 따라서 어떤 것을 한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문젯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계속해서 가정을 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같은 양식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면 여러분의 본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축복 속에 있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에 교회생활 안으로 왔을 때 여러분은 여러분이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틀림없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게 기능을 발휘했습니다. 왜냐면 여러분이 생명의 누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얼마 지난 후 교회생활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중단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너무 예민해졌고 심지어 자신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면 대적은 여러분이 실패했다고 여러분에게 말할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잃어버렸고, 여러분이 더 이상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너무 예민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적이 우리의 감수성을 기회로 활용할 비난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합당하고도 건강한 본을 붙잡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방식 안에서 실패했다면 우리는 계속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들이 가끔 잘못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본은 옳은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누림 안에서 유지해야하고 또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소그룹모임에 참여하는 본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어느 아침에 여러분이 남편과 싸우고 모든 것들에 관해 사이가 나빠졌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날에 여러분은 내면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분은 더 이상 자격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 모임을 건성건성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주님께 열 때 비록 계속해서 화가 날지라도 여러분은 더 높은 어떤 것을 만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정직하게 주님, 저는 저의 육체 안에 있습니다. 나는 엉망진창인 자입니다. 형편없는 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소그룹 모임에 나갈 것입니다.’라고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위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본을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임에 갈 때 여러분은 구원될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높고 영광스러운 어떤 것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건강한 본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구원될 것입니다.

 

 

교회생활에서 종종 우리는 우리의 상태를 따라서 이따금씩 기능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많이 우리 자신을 분석합니다. 우리가 좋다라고 느낀다면 우리는 기능을 발휘합니다. 우리가 좋지못한다면 우리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대신 우리는 기능을 발휘하는 건강한 본을 세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모임에서 말을 하는 좋은 본입니다. 우리가 옳은 말을 하든지 잘못된 것을 말하든지 본을 세우는 것만큼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말을 하고 실수를 한다면 적어도 우리는 이미 죽어서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 본을 따르는 것으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임에서 말하는 방법을 배울 것이고 더 많이 교회생활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본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옳고 그른 것에 대해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건강한 본을 따른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제자리로 찾아갈 것입니다.

 

 

율법의 본이 아니라 생명의 본을 드러내기

 

 

건강한 본을 드러내는 것은 스케줄을 유지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스케줄을 유지하는 것은 율법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케줄로 살아가는 것 같은 것을 건강한 본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건강한 본은 율법이 아니라 생명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본을 따라서 훈련을 할 때 우리는 생명의 기본적인 일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침부흥의 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은 아침 7시에 일어나는 것이며, 기도하기 위해 몇 분을 주님과 함께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에 우리가 9시까지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스케줄만을 따라 산다면 우리의 기도 시간은 이미 넘어 간 것입니다. 아침에 7시에 기도하는 본을 가져야 하거나 우리가 깨어나면 기도하는 본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가 스케줄을 유지하는 것에 관하여 너무 연관이 되어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생명의 본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느슨하게 되고 훈련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하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우리의 기도 시간이 변함이 없는 것은 건강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시간에 일어날 수 있든지 전날 밤이 크게 좌우됩니다. 만일 우리 아이들이 밤새 우리를 깨워서 우리는 아침에 9시까지 잠을 자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더 이상 기도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까? 7시나 9시에 일어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건강한 본을 갖는 문제입니다. 우리의 본은 아침에 주님의 임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7시에 이것을 하는 것은 매우 좋지만 그것이 율법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일어나는 시간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는 대신에 우리는 본에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태도는 내가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날 수 있는지를 알지는 못하지만 내가 일어나는 때가 언제든지 주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본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 본은 지나치게 요구하는 율법과 아주 다른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아침시간을 지내는 것은 좋은 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늦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같은 본에 계속해서 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어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비록 내가 늦게 일어났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나의 시간을 보낼 것입니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법적인 요구에 따라서 비난을 받는 것에서 우리를 보호하게 될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너무 늦게 잠을 잤을 때 우리는 7시에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나와의 약속을 깼다. 나는 주님의 임재를 오게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날 나머지 시간에 우리는 비난 속에 우리 자신을 넣습니다. 아침에 주님께로 나아오는 것은 건강한 본입니다. 정해진 시간을 유지하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패할 때 그 본은 여전히 같습니다. 우리의 본은 나는 어떤 시간에 어떤 것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것을 하는 것은 율법을 따라서 스케줄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훈련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행위보다 더 우리의 건강한 본을 관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본을 관심할 때 우리는 비난으로부터 보호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양극단에 있습니다. 우리 역시 너무 많이 율법을 사랑하거나 율법과 상관없이 삽니다. 또 우리 역시 높은 요구 아래에서 우리 자신을 붙잡고 있거나 아니면 몹시 느슨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합니다. 둘 다 옳지 않습니다. 한 방면에는 율법이 필요하고 다른 방면에는 율법 아래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먹는 것이 율법입니다만 율법이 아니기도 합니다. 잠자는 것이 율법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율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생명의 원칙 안에 있습니다. 생명을 따라서 율법을 수행할 때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율법 아래에 있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또한 만일 너희가 율법이 없다면 너희는 너무 느슨해질 것이다. 너희가 불법자가 될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침부흥과 같은 어떤 실행적인 것을 유지하기 위해 훈련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나는 내가 일어나는 때가 언제이든지 그 때 기도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너무 느슨하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역시 우리가 내가 일어나려고 했던 시간에 일어나지 못했네. 오늘은 기도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너무 율법적이지 말아야 합니다. 두 생각 다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균형 잡혀야 합니다. 우리의 태도는 주님의 임재 안에 있을 수 있기 위해서 일어나야 할 시간에 일어나겠어. 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고 또 일어나야 할 시간에 일어날 수 없다면 나는 주님의 임재 안에 있는 방법을 계속해서 배울 거야!’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합당한 본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느슨하거나 너무 율법적인 것에서 우리를 구할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생명으로 제한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있는 자매들은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자매들이여, 만일 여러분이 아이들이 있다면 자신들로부터 너무 규칙적인 것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행복한 어머니가 되는 비밀입니다. 여러분의 아이들의 스케줄은 불규칙하고, 심지어 여러분의 남편의 스케줄도 가끔 불규칙합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지내기 위해 어떤 정해진 아침시간에 일어나기 원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어린 아이들이 밤에 몇 번씩 일어나기 때문에 여러분은 난 그렇게 규칙적으로 일어날 수 없어. 좀 더 잠을 자야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많은 어머니들은 일찍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아침부흥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늦은 아침에 일어나면 여러분은 그 때 아침부흥을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여러분은 너무 높이 여러분 자신을 위해 목표를 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난 어떻게 잠을 잤든지 7시에 일어나야 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날을 견딜 수 있을까요? 결국 여러분은 좌절하게 될 것입니다. 규칙적인 스케줄에 너무 많이 관심을 집중하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 특히 어린 아이들을 가진 어머니를 위해 더 낫습니다. 대신에 합당한 본에 관심을 집중하십시오. 합당한 본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일어날 때 여러분은 주님께 옵니다. 여러분이 특별한 시간을 유지하려 할지 모르나 환경이 여러분의 스케줄에 영향을 줄 때 여러분은 그 때야 주님께 옵니다. 여러분은 일어나자마자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하는 본을 계속합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매우 좋은 아침부흥을 가졌을 때 어떤 것은 몇 시간 후 여러분을 좌절시키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기도한 후 여러분의 아이들이 여러분의 기질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되어 여러분을 화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여러분의 기질을 잃은 후 여러분은 주님의 임재를 누리려고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건강한 본입니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만일 여러분이 이것을 배울 수 있다면 축복될 것입니다.

 

 

요구아래에서 우리 자신들을 미는 것에 대해 우리의 마음에 있는 갈망을 일해내기

 

 

우리 모두 합당하고 괜찮은 인간성을 갈망합니다. 미덕이 있고 건강하기 위해 우리의 생명을 갈망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에 놓도록 요구하는 우리의 갈망에 대해 허락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갈망과 요구 사이에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갈망은 우리 마음 속에 어떤 것이 있는 것이고 요구는 법적인 필요입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어떤 것이 우리 자신을 요구하게 될 때 거기에는 옳지 못한 어떤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 영적인 것들조차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매 집회마다 기도하는 갈망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건강한 갈망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임에서 기도하지 못할 때 비난으로 당황하게 된다면 그것은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합당하고 건강한 갈망을 여러분의 마음에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 갈망이 비난아래에 여러분을 가져 온다면 그것들은 더 이상 건강하지 않은 요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체험 속에서 우리는 아주 건강한 갈망으로 시작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요구가 됩니다. 우리의 갈망이 요구 안으로 돌아오면 그것은 더 이상 효과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요구를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 안에서 합당한 갈망을 수행할 수 있도록 공급될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빈번히 우리의 체험 속에 있는 갈망과 요구는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어떤 것을 갈망하겠지만 우리가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요구아래에 우리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덫에 걸릴 수 있는 곳입니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이 합당하게 갈망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생명 안에 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건강하고 고결하고 순수한 것들을 갈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여러분이 갈망하는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요구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와 같은 요구는 여러분이 자신에게 사실상 상처를 입히는 금욕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갈망이 요구가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건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갈망과 요구 사이에 있는 차이를 인정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자매들이 더 많이 휴식을 얻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자매들이여, 여러분 마음에 갈망을 존중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하지만 여러분에게 요구가 될 갈망을 존중하지 않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집회를 갖는 모든 시간 분내도록 여러분의 양심을 허락하지 마십시오. 왜냐면 자신을 강압하는 기준으로 집회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구가 되도록 하는 것 없이 여러분의 갈망 안에 거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갈망 안에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여러분의 실재가 될 때까지 갈망이 점진적으로 성장하게 합시다. 이것이 압박 아래에 여러분의 스스로를 놓지 마십시오. 아주 정상적인 여러분의 갈망으로 사십시오. 이것이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비밀입니다. 우리의 갈망이 요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을 너무 많이 요구에 놓는다면 좌절을 시킬 것이고 심지어 여러분의 성장도 죽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압박 아래에 여러분 자신을 넣지 않고 경건한 것들을 위해 여러분의 갈망에 거할 때 생명 안에서 건장하게 자라도록 여러분을 인정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본의 내용: 신성하고 영적인 본이 되는 하늘에 속한 본

 

 

우리는 자매들이 그들의 행위보다 더 그들의 본에 관심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특히 성막을 설계하는 데서 몇 번 사용되었습니다. 성막은 신성하고 하늘에 속한 본을 따라서 건축되었습니다. “이 제사장들은 모세가 성막을 만들려 할 때에 하나님께 권고 받은 바와 같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와 그림자를 섬기나니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는 조심하여 산에서 네게 보여 준 양식을 따라 모든 것을 만들라. 하시니라.”(8:5 흠정역). 성경에서 에 대한 문제에 가장 중요한 원칙은 신성한 어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막을 건축할 때 신성하고 하늘에 속한 본을 따라 건축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조심하여 산에서 네게 보여 준 양식을 따라 모든 것을 만들라고 그분의 백성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이것은 그 본이 신성하고 하늘에 속한 어떤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우리의 날마다의 생활 가운데서 본을 말할 때 우리는 아마도 나의 본은 하늘에 속한 것이 아니야. 나의 본은 어느 정도 땅에 속한 것이야.’ 말했을 것입니다. 그 본은 우리가 땅에 속한 본이 아닌 신성한 본이 되어야 함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우리가 한 본으로 사는 것은 어떤 신성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첫 번째 메시지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관심하지 말고 우리의 본에 관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본을 따라 생명을 사는 훈련을 함으로 우리는 나는 나의 행위를 관심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난 나의 본에 관심할 테야.’라고 주님께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에 너무 많이 관심을 집중할 때 우리는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이 혼란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들에 관해서 볼 수 있게 될 모든 것이 잘못입니다. 대신에 우리는 하늘에 속한 본을 따라서 또 다른 천사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건강한 본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본이 일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살수도 없고 또 우리의 본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신성하고 영적인 본으로 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본에 대한 영적인 실재는 생명 안에 있는 우리의 성장에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새로운 자매가 몇 달 동안 교회생활 가운데 있었다고 합시다. 만일 그녀가 한 주에 한 두 집회에 나가는 방법을 알고 있거나 아니면 조금씩 기도를 하고 영을 발휘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틀림없이 만족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관찰에 따라서 이 자매는 어리고 얕을지도 모르고 그녀의 기도가 많은 내용을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영을 사용하기 보다는 목소리를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관점에서 이 자매가 영을 사용하지 않고 목소리를 발휘하는 것은 바로 주님께서 갈망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자매가 새로운 자매라면 주님께서는 그녀에 대해 어떤 것을 요청할 수 있습니까? 대부분 주님은 그녀가 복음을 조금씩 전하거나 성경을 조금씩 읽고, 또 얼마나 적게 집회에 갔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생명 안에서 성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그녀가 신성하고 영적인 본을 따라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본은 영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 안에서 우리의 성장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본의 요소

 

 

첫 번째 요소: 주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분투하기

 

 

우리가 살아내는 하늘에 속한 본은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이 각각의 요소들은 사실상 영적인 훈련입니다. 먼저 우리의 매일의 생활 가운데서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특히 친밀함(우정)의 문제에 관련된 교회생활을 하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함께 모이는 것을 등한시 하지 말고 단체적인 교회생활을 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이 요소들 모두 우리의 실재에 대한 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늘에 속한 본에서의 첫 번째 요소는 우리가 주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날마다 분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함으로 우리를 훈련해야 합니다. 자매들은 나의 생활의 본에서 난 주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분투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축복 안에서 가져올 것입니다. 자매가 자신의 행위에 관심을 집중할 때 종종 비난 아래에 있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남편에게 성질을 부리는 것을 잃어버린다면 그녀는 잠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난 아주 많은 세월 동안 주님을 사랑해 왔다. 이 같은 분을 계속해서 내는 데 나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을까? 내가 남편에게 계속해서 몹시 화를 낼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행위가 합당치 못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합당하지 않은 행위를 갖는 것을 분발되지 말아야 되지만 그 행위들은 가끔씩 계속해서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합당하지 않을 때 우리는 단순하고 빠르게 주님의 귀하신 보혈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주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후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향해 가기를 분투하고 우리가 갔었던 곳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늘에 속한 본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본 안에서 우리가 조금도 건강하지 않은 행위를 가질 때 우리는 하늘에 속한 본으로 가는 방법을 배웁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분투합니다. 우리의 본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 있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배우면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가정생활, 교회생활에서 아주 많이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 문제 대부분은 우리가 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본에 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운전하고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분투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에도 주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분투합니다. 우리가 다른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분투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의 약함 안에 있을 때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분투합니다. 우리가 승리를 하든지 패배를 하든지 우리는 관심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재 안에 있기를 사모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명에 대한 건강한 본입니다. 우리가 이 방법을 발휘할 때 우리는 주님의 구속과 구원의 효력을 받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주님, 저의 행위는 가끔 몹시 건강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합당하고 건강한 본에 저의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매일의 생활에서 모든 시간에 당신의 임재 안에 있기를 분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의 생활 가운데서 살아야 하는 신성하고 영적인 본입니다.

 

 

두 번째 요소: 매일의 생활 가운데서 교회생활을 훈련하기

 

 

매일의 생활 속에서 규칙적으로 교회집회에 나가는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다른 자매들과 함께 있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교회생활에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자매들과 함께 있을 수 있을 때 시간이 소중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교회생활에서 이 훈련이 다소 짧습니다. 다른 자매들과 함께 모이도록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자매가 없어 보입니다. 여러분은 문젯거리가 기능을 만드는 것에 관해 연관되었는지 모릅니다. 사실은 여러분의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다른 자매들과 함께 있으려 하는 것은 건강한 본이라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진리를 풍성히 누리는 것, 교제하기, 또 기도하기 위해 함께 올 때 그것은 건강한 본입니다. 이 본은 여러분의 훈련이 건강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성장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특별한 성도들, 장로들, 새로운 사람들, 교회의 필요들, 복음, 주님의 움직임,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부담을 주신 어떤 것이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의 모든 풍성과 말씀 안에서의 수고하려고 함께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건강한 본입니다. 개인적으로 주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분투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의 생활 가운데서 교회생활을 갖기를 분투하십시오.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자신의 개인적인 날마다의 생활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날마다의 생활 안에서 교회생활 안에 있기를 분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몇 명의 성도들을 방문할 수도, 한 자매와 말씀으로 수고할 수도, 또 다른 자매와 어떤 기도할 수도, 자매들과 함께 그룹 모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분이 훈련하면 할수록 교회생활은 건강해질 것입니다. 만일 자매들의 그룹은 기도하기 위해 시종일관 함께 올 때 그들의 기도가 영적이든 아니든 문제가 안 됩니다. 교회는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의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교회생활을 갖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다른 자매들과 함께 있는 것을 훈련하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의 본이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여러분의 생활을 살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시간을 여러분에게 주신다면 다른 성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배우십시오. 다른 자매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수고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이와 같은 긍정적인 훈련은 생명 안에서 건강한 성장을 여러분에게 줄 것입니다. 긍정적인 훈련은 여러분이 인도하는 사람들과 장로들의 부담을 위해 기도하고 부담과 함께 섬으로써 교회를 강하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의 개인적인 매일의 생활을 갖지 마십시오. 하지만 교회생활 안에서 여러분의 매일의 생활을 가지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건강한 본의 일부입니다. 자매들 모두 이 방법 안에서 발휘하도록 분발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장로들의 결정은 많은 기도를 필요하게 만듭니다. 교회가 많은 기도를 필요로 하는 부담이 무엇입니까? 장로들이 어떤 필요와 관련되어 있는 교회와 함께 나누기를 시작할 때 그것을 공급하기 위한 충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장로들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처럼 단지 우리와 함께 교제하는 문제들을 다룹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도로 이 같은 문제들을 공급할 필요를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결정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결정은 만일 영적으로 기도를 공급하기 위해 분투하지 않는다면 죽은 것입니다. 생명이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기도를 통한 것뿐입니다. 주님과 함께 협력하는 많은 분투가 되어야 합니다. 상황을 지지하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 같은 방식으로 교회를 위해 우리가 기도하면 할수록 어떤 것은 우리 안에서 불태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흥미를 위해 불태울 것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모임에 이 불을 가져오게 될 것이고 그 모임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이 함께 오는 것도 좋고 기도로 교회를 지지하는 것도 좋습니다. 무엇이든 간에 사용하십시오. 너무 조직적으로 그것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는 집이 어디인지 언제 만날지에 관해 융통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함께 기도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가끔 여러분은 인도하는 형제들의 부담과 함께 서 있을 수 있기 위해서 인도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교제했는지에 대해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상태를 생각할 수 있고 교회가 강하게 되도록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합당하게 돌볼 필요가 있는 어떤 새로운 사람과 기도와 교제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방법으로 훈련하는 것은 주님의 축복 안에서 가져 올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건강한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제를 갖기 위한 자매들을 위한 필사적인 필요

 

 

우리는 교회생활에서 건강한 교제를 산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교회생활을 하는 많은 자매들은 외롭습니다. 그들은 아주 적은 자매들이 그들에게 연결하고 아주 자매들은 동료들이라고 느낍니다. 어떤 자매들은 함께 교제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매가 어떤 것을 통해서 갈 때 그녀는 자신과 싸웁니다. 그녀의 남편이 어떤 어려운 것을 통해 갈 때 그녀는 함께 기도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녀가 몇 년 동안 교회생활 안에 있었지만 계속해서 개인적일 것입니다. 교회생활에서 많은 자매들은 그들 자신만으로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렇게 많은 자매들이 왜 그들 자신만으로 남아있을까요? 단순히 교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자매들이 진정한 교제를 갖기를 정말 어려운 것처럼 보입니다. 자매들은 교회 모임을 통해서만 서로를 알뿐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매일의 생활 가운데서 서로 함께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다른 자매들과 함께 친근함을 가질 수 있지만 어떤 이유로 그들은 영 안에 있기를 함께 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날마다의 생활에서 교회생활을 하는 훈련을 갖지 않습니다. 자매들이 건강한 교제의 본을 훈련할 때 그들은 너무 개인적이거나 홀로 있지 않을 것입니다.

 

 

가끔 주님께서 교회에서 움직이실 때 한 형제가 응답할지 모르지만 그 형제의 아내는 응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내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녀가 홀로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녀는 교회를 사랑할지 모르지만 그녀가 주님의 움직이심에 반응할 수 없는 곳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배짱 좋게 교회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날마다의 생활 속에서 그녀 안에 있는 긍정적인 부담을 보살피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녀의 교회생활은 그녀가 훈련하기에 건강한 본이 아닙니다. 대신 그녀가 지회에 가는 것은 단지 판에 박힌 일상입니다. 이것이 교회생활 안에서 그녀의 활동의 경우는 몹시 제한적이게 될 것입니다. 그녀가 영적인 교제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생활에서 주님의 움직이심에 그녀는 반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교회생활 속에서 그녀와의 교제를 갖는 몇몇 자매들이 있다면 주님께서 움직이실 때 그녀가 반응하기에 더 쉬울 것입니다. 그녀는 또한 주님에 대한 남편의 따름과 함께 서기에 강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보호를 위해 영적인 교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우리는 우리가 교제할 수 있는 자매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성장 안에서 어려운 단계를 체험할 때 우리는 우리와 함께 기도할 수 있고 기도를 통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자매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친밀한 교제입니다. 만일 자매의 그룹이 자주 함께 있지만 그들이 하는 것 모두 다른 것들에 대한 이야기와 한담이라면 이것은 참된 교제가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한 자매가 심각한 문제를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녀가 교제하기 위해서 이 자매의 그룹에 그것을 가지고 왔을 때 또 다른 자매는 너무 영적이지 말라.’고 말을 하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필요 안에 있는 그 자매는 도움을 받지 못했고 또 다른 자매들이 그녀의 도움을 줄 기회를 잃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시간에 이 자매들은 함께 있었고 그들은 진정한 교제를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런 교제는 세상 사람들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제는 천연적인 영향력이나 상호이익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제는 영적이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혼적인 교제를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것들을 갖기가 매우 쉽습니다. 교회생활에서 작은 기능을 산출하는 것조차도 가려져 있는 사람은 자매들입니다. 우리는 분열이 되게 우리의 교제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친하게 느끼거나 우리가 상호간의 사무적인 연락을 하고 냉정하게 대해야 하는 다른 자매들을 피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영 안에서 자매들과 함께 있기를 배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친밀하고도 가까워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에 속한 친근함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교제는 세상에 속한 흥미와 혼적인 영향력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우리는 주와 그분의 증거를 위해 서로의 분투를 하려고 함께 있습니다. 자매들은 주여, 저는 저의 동역자 몇 명의 자매가 필요합니다. 어려운 시간이 닥쳐올 때 저는 저를 위해 기도를 해줄 수 있고 당신의 임재를 제게 가져올 자매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가 당신과 함께 추구할 수 있기 위해서 영 안에서 저와 함께 기도 할 수 있는 자매와 함께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라고 주님께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으로부터 참된 축복을 가져올 수 있는 건강한 교제입니다.

 

 

자매들이여, 여러분의 날마다의 생활에서 교회생활을 훈련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혼자서 있는 것을 용납하지 마십시오. 교회생활에서 홀로 있는 자매가 되지 마십시오. 영적인 교제들을 건강하게 발전시키십시오. 여러분이 영적인 교제로 어떤 자매를 가질 때 그것은 그들이 단지 여러분의 친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고 교제를 하고 말씀 안에서 수고를 하고 생명 안에서 서로의 성장을 위해 그들과 함께 분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남편은 어떤 어려움을 통과하고 있고 여러분이 여러분을 도우려는 여러분과 교제가 있는 자매들이 있습니다. 서로 함께 기도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함께 있는 것을 배우십시오. 여러분의 날마다의 생활을 침해하도록다른 자매들을 허락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심지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위해 같은 것을 행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은 교회생활에서 자매들이 홀로 있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적인 교제가 되도록 어떤 자매들을 찾아야 합니다.

 

 

세 번째 요소: 단체적인 교회생활을 소중하게 여기기

 

 

우리의 영적인 훈련 안에서 우리는 성도들과 함께하는 모든 집회와 모임을 포함한 단체적인 교회생활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하늘에 속한 본이 되어야합니다. 성경을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함께 모이는 모임을 경멸하거나 등한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25 흠정역). 그것이 큰 교회 모임이든 작은 가정모임이든 이것은 우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원칙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함께 모임을 등한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집회생활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단체적인 교회생활을 소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체험 속에서 우리는 기독교로부터 온 건강하지 못한 생각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은 난 한 주에 어떤 많은 집회를 만들 필요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난 주님의 상에만 올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 생각은 우리의 타락에 빠진 본성과 대등합니다. 자매들이여, 우리는 함께하는 교회생활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모든 교회가 함께 오는 것이든, 몇몇 성도들만이 함께 오는 것이든 모든 모이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합니다. 장로들이 결정을 내려 소집하든지 아니면 우리 스스로 우리의 가정 안에서 모임을 갖도록 부담을 붙잡는 것이든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교회의 모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본을 따라 살고 있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적으로 건강하게 될 수 없습니다. 암만 영적인 사람이라도 결국 그들이 교회와 함께 모이는 것을 그만둔다면 그들의 영적체험 안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가정에서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영적으로 죽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설명한 건강한 본이 있다는 것을 보아야합니다. 그 본은 교회생활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체적인 교회생활을 소중히 여김으로 합당하게 훈련된 것이 없을 때 우리의 본은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성하고도 영적인 본보다 오히려 땅에 속한 것을 따라서 살고 있는 것이요, 인간의 기준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성도들과 함께 훈련을 하고 교회의 모임에 나갈 때 우리는 건강한 본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집회를 내려 보거나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 바쁘기 때문에 교회집회에 갈 시간이 없다고 말을 할 때 우리는 건강한 본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집회를 폐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그것 스스로를 본이 되게 할 수 있고 히브리서 10:25절에서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25 흠정역). 습관은 본과 비슷합니다. 히브리서가 쓰였을 때 집회를 폐하는 본안에 있었던 어떤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집회에 가지 않거나 아니면 성도들과 함께 있지 않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그것이 그들의 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우리의 행위가 옳다할지라도 우리의 본이 잘못이 있을 때 우리 스스로는 계속해서 잘못하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본은 우리의 행위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성질을 잃는 것은 아주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의 집회를 폐하는 것은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자매는 성질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만일 그녀가 교회집회를 가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너희의 선행은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도 다른 자매는 이따금 자신의 성질을 잃을 수도 있지만 만일 이 자매가 모든 교회집회에 참여를 하면 주님께서는 이것이 옳은 것이다.”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관심을 집중하지 말아야 하지만 건강한 본에는 집중해야 합니다. 건강한 본의 중요한 부분은 단체적인 교회생활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