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강해/여호수아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섬기는 것

Hernhut 2012. 1. 11. 02:08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섬기는 것

 

여호수아는 주님에 의해 훈련되고 준비되었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는 그가 있던 곳에서 섬기도록 준비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아직 요르단을 건너 좋은 땅에 들어가 적들을 맞설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첫 번째 세 번의 대적들은 여리고, 아이, 기브온이 되었을 것입니다. 각각의 경우 여호수아는 그분의 백성들의 참된 지도자로 주님을 따르기를 배워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장서시기

 

좋은 땅에서 싸움을 시작할 이스라엘은 요르단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따라가려고 하는 모두가 건넜던 순서대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갈망을 나타내십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을 지나서 요르단으로 들어가나니”(3:11 흠정역)라고 말했습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맨 먼저 강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물이 멈추고 또 한 덩어리로 솟아올라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쉽게 건널 수 있도록 충분한 마른공간을 제공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성이 요르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에서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백성 앞에서 언약 궤를 메니라. (요르단이 수확할 때에 항상 그것의 모든 둑에서 넘치므로) 궤를 멘 자들이 요르단에 이르매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서 잠기니라.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들이 일어서고 솟 아올라 사르단 옆의 도시 아담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무더기 위에 쌓이며 평야의 바다 곧 염해로 내려가는 물들은 모자라서 끊어지매 백성이 똑바로 여리고를 마주보며 건넜더라.”(3:14~16 흠정역). 그 땅을 얻기 위한 전쟁은 주님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표로 삼으신 것을 취하신 한 이스라엘 또한 취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흠정역). 먼저 우리가 적과의 싸움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다면 그러면 틀림없이 그 전쟁은 이깁니다.

 

두 가지 기념

 

주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각 지파에게서 한명씩 12명을 취하고 언약궤를 붙잡고 있던 제사장들이 서 있는 곳, 강에서 12개의 돌을 취해서 강가에 가져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온 백성이 깨끗하게 요르단을 건너매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백성 중에서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취하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이제 너희는 요르단 한가운데 곧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열두 개의 돌을 취하고 그것들을 가져다가 이 밤에 너희가 머무를 장소에 두라, 하라, 하시니”(4:1~3 흠정역). 그 돌은 길갈에서 증거를 삼기 위해 강에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제사장들이 나르는 언약궤가 서 있었던 마른 강에 12개의 또 다른 돌을 세웠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요르단 한가운데 곧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선 곳에 열두 개의 돌을 세웠는데 그 돌들이 이 날까지 거기 있느니라.”(4:9 흠정역). 그러므로 거기에는 12개의 돌에 대한 두 가지의 기념이 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이 나른 언약궤가 강바닥 밖으로 나온 것과 물이 되돌아 왔다는 것을 기념한 것입니다.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는 것

 

이것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바울에 의해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세워진 것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6:4 흠정역). 우리는 강바닥에서 세워져 돌들로 나타내어진 죽음과 매장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또한 강 밖으로 가져와 길갈에 세운 돌로 나타내어진 부활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침례는 매장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하나님의 활동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침례 안에서 또한 그분과 함께 일어났느니라.”(2:12 흠정역). 물속에 잠기게 되는 것은 매장을 암시하는 것이요,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부활 안으로 가져오게 하는 것을 암시합니다. 좋은 땅으로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영적 전쟁에 올 때에는 부활이 먼저요, 그 다음이 죽음입니다. “이것은 내가 그분의 죽으심과 일치하게 되어 그분과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함이요,”(3:10 흠정역). 우리는 우리가 원하고 또 관리하기를 좋아하지만 우리는 교회생활로 제한을 받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만 우리가 영적인 돌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습니까? 요르단을 건너는 것은 우리가 강바닥에서 취하여진 돌로 대표되어진 부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우리 또한 강에서 매장되도록 죽었던 다른 돌들의 무리로 대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끔 불평하는 이유입니다. 바로 우리가 부활 안에 있는 순간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 있는 제한 아래에서 죽음을 체험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있습니다. 나는 이 기간 동안 항상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이 때 또한 요르단의 죽음물 아래에서 매장된 것을 체험했습니다. 나는 주님의 증거를 위해 죽습니다. 나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부활 안에 있습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매장되었습니다!’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태로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가 독립적인 돌들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 안에 있는 지혜는 강으로부터 취한 12개의 돌들이 있고 길갈 쪽에 세워져 있습니다. 동시에 12개의 돌들이 우리가 부활뿐만 아니라 죽음과 매장이 포함하는 것을 과정을 생각나게 하려고 요르단 안에 세웠습니다. 이 죽음과 매장 없이는 우리가 특별하게 우리의 길을 가지 않을 때 우리가 주님의 증거를 위해 그분을 섬기려고 여기에 있다고 설명하기에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증거의 목적은 우리가 부활 안에서 섬길 뿐만 아니라 매장을 겪으려고 우리 자신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에 대한 이 방면은 모든 사람들로 영접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내가 아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굉장히 재능 있는 음악가들이 있습니다. 만일 그들 중 하나가 오케스트라에서 오프닝을 듣고 그것이 주님의 인도하심이 아니었음을 느꼈다면 그 사람은 위치를 찾을까요?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참을까요? 부활 안에서 있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누립니다. 하지만 죽음 안에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와 함께 서기 위해 교회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여호수아가 강에서 12개의 돌들을 세운 이유입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요르단을 건너지 못한 것이지만 먼 해안가에서 주위를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주님께서 교회생활 안에서 그분의 증거를 갖고 계시다면 우리의 육체와 혼은 다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 안에 있는 우리는 항상 죽음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주님에 대한 마음을 가진 모두는 부활 안에 있기를 원하지만 자주 죽음과 부활이 함께 가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교회생활은 육과 혼에 대한 것이 아니고 영에 대한 생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려고 부활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관심을 위해 싸우려고 부활 안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 안에 있는 요르단으로부터 와서 그저 갖는 것은 우리가 주님께서 무엇을 하는 것이든 완수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요르단을 건너자마자 싸우게 되어 다툼이 있었던 것과 주님의 증거 앞에서 이겼던 것은 그 땅에서 인정받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방법을 죽음에 넣어야만 했을 것이고 그 땅을 위해 전쟁을 하기 위해 부활 안에서 주님의 인도를 따라야만 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군대의 지휘관

 

이스라엘이 여리고 초원에 있는 길갈에 천막을 치고 있을 때 여호수아는 손에 칼을 든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옆에 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보니, 보라, 한 남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으므로 여호수아가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너는 우리 편이냐? 우리 대적들의 편이냐? 하매”(5:13 흠정역). 여호수아가 당신은 우리를 위해 계신 것입니까? 아니면 대적들을 위해 있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들을 위한 것도 대적들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었다는 암시하는 말을 합니다. “가 이르되, 아니라. 는 지금 주의 군대의 대장으로 왔느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하며 에게 이르되,”(5:14a 흠정역).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들 앞에 보내실 메신저였습니다. “내가 천사를 네 앞에 보내며 또 가나안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고”(33:2 흠정역).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특별한 면을 따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유리한 쪽에 의지하여 천막 치는 것을 바꿀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가 어떤 편에도 있지 않았다고 여호수아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맡은 자가 되어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편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동료 믿는 자들일 때조차도 그들의 편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님께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편도 저편도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편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세 가지의 대적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마침내 그들이 땅을 위해 싸울 준비되어 있는 시점에 있습니다. 이 싸움은 3개의 도시로 대표된 3개의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사탄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과 권능을 대표하는 여리고요, 둘째는 세상을 대표하는 아이요, 그리고 셋째는 타락에 빠진 사람을 대표하는 기브온입니다. 이 셋은 온 우주의 특징이 됩니다. 그들의 약속된 상속 안으로 그분의 백성을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 가지 것들을 돌보셔야만 했습니다. 그분은 적의 권능을 멸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다루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람을 돌보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온 생애에 이 세 가지 문제들을 맞서게 될 것입니다.

 

 

여리고- 사탄의 왕국

 

향기로운(스트롱버젼)”을 의미하는 여리고는 공중에 있는 사탄과 그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사탄은 틀림없이 향기롭고 매력적인 사람처럼 자신을 나타냅니다. 사탄은 아름답게 창조되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었는데 모든 보석 곧 홍보석과 황옥과 다이아몬드와 녹주석과 줄마노와 벽옥과 사파이어와 에메랄드와 석류석과 금이 너를 덮었고 네가 창조되던 날에 네 안에서 네 작은북과 네 피리의 작품이 예비되었도다.”(28:13 흠정역).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을 때 나는 그가 예수님보다 더 아름답게 나타났다는 것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그분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터이니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53:2 흠정역). 이스라엘사람들이 물리쳐야만 했던 첫 번째 도시는 사탄의 왕국을 대표하는 여리고였습니다. 여리고는 향기롭고 매력적인 도시가 되었어야만 했습니다. 사탄의 왕국 안에서 붙잡은 것은 아주 매력적인 것이요, 그것을 멸하기에 수치스러워 보입니다. 예를 들어 쇼핑몰들은 매일 수천의 쇼핑객들을 부드럽게 끌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탄의 왕국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리고의 강한 자의 영향력은 쇼핑몰에서 찾지 못하지만 교회나 영적인 모임에서는 종교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사탄은 인간들을 조정하여 사용합니다. 최근에 나온 뉴스에서 보듯 근본주의 무슬림들이 그들의 종교를 위해 기꺼이 죽기 때문에 이슬람으로 개조로 급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과 함께 만족하게 되길 원합니다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빨리 종교 안으로 돌리시는 것을 찾습니다. 종교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느끼는 거짓 안도감을 가져옵니다. 그들은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이런 것은 용서하실 거야! 이번 한 번만은 눈 감고 넘어가자!’ 등으로 자신들을 위로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종교가 사실상 하나님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죄는 잘못이라고 알고 그들이 종교가 사탄의 왕국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가 죄보다 더 나쁜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종교에 속해 있는 것보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어야만 합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나는 부자라. 내가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3:17a 흠정역). 하지만 주님은 밖에 서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3:20 흠정역). 어떤 교회는 그 그리스도인 유산으로 부유하다고 느낄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닫으십니다.

 

여리고에 맞서는 하나님의 전략

 

여리고를 이기는 하나님의 방법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것의 왕과 강한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나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도시를 에워싸고 도시 주위를 한 번씩 돌되 너는 엿새 동안을 그리할지니라. 일곱 명의 제사장은 일곱 개의 양 뿔 나팔을 들고 궤 앞에서 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너희가 도시를 일곱 번 에워싸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 뿔 나팔을 길게 불어 너희가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온 백성은 큰 소리로 외칠지니라. 그리하면 그 도시의 성벽이 납작하게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각 곧장 자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니라.”(6:2~5 흠정역). 그분은 1일에 한번씩 6일 동안 군사들 모두와 함께 그 도시의 주위를 행진하도록 여호수아를 훈련시키셨습니다. 7인의 제사장들은 양각(羊角)나팔을 들고 언약궤 앞에서 걸었습니다. 7일에 그들은 7번 그 도시 주위를 행진하고 후에 그들은 나팔을 불며 큰 소리를 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도시의 벽이 평평하게 무너질 때 백성들은 그것을 취하기 위해 그 도시 안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분명 이것은 세상 역사의 어느 전쟁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는 가장 강한 전술전략(戰術戰略)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위한 공중의 정사들과 권능들을 대항하여 싸우는 싸움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략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홀로가 아닌 이스라엘이 함께 싸우러 갔던 것처럼 몸 안에서 싸워야만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의 피로 승리를 설명하는 피의 덮개 아래에서 전쟁을 합니다. 이것은 7명의 제사장들에 의한 7개의 양각나팔로 대표됩니다. “그때에 너는 일곱째 달 십일에 희락의 나팔 소리를 내고 너희는 그 속죄일에 너희 온 땅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니라.”(25:9 흠정역). 사탄은 아주 교묘한 적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우리에게 말합니다. “할렐루야대신에 우리가 할렐루미(hallelu-me)”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이 하나의 단순한 기교로 그는 몸 안에서 지체들로서 우리의 섬을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게 하며 죄악의 자랑으로 휩쓸리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불 양각나팔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리 방식으로 우리는 승리를 얻습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며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12:11 흠정역). 우리가 실패할 때 사탄은 주가 너 같은 죄인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하고 말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쟁이 필요 없지만 교회생활 안에 있어야 하고 사탄의 왕국을 대항하여 할렐루야!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다.’ 선포하는 믿는 자들과 함께 행진해야 합니다. 그런 후 우리는 그렇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실패했었다. 나는 패했었다. 나는 문제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나의 구세주이시기에 지금 여기에 있다!’고 사탄에게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나팔을 불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에 의해 주신 전쟁계획을 따라가 보면 그들이 여리고를 이겼습니다.

 

아이- 유혹하는 세상

 

우리가 여호수아 7장에서 읽은 것처럼 이스라엘이 전쟁을 했던 두 번째 도시는 아이였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도시에 갔을 때 그들은 주님을 찾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정탐하고 몇 천 명으로 그곳을 취할 수 있겠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이 전쟁을 하러 갔을 때 그들 36명이 살해되었고 이스라엘 군대는 도망했습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항상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여리고에서 적의 수비는 그들 앞에서 바스러뜨리셨습니다. 하지만 아이에서 그들은 적들로 대패했었습니다. 왜 패했을까요? 공중의 권능(여리고)들과 전쟁하는 동안 용맹스런 선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일이 되어가는 것을 보자마자 세상 전쟁(아이)에서 우리는 세상과 깨끗하게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패배가 있은 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장로들은 주님과 그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찾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또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내 언약을 어겼나니 그들이 저주받은 물건 중에서 취하여 도둑질하고 또 숨기고 그것을 자기들의 물건 가운데 두었느니라”(7:11 흠정역). 아간이라는 젊은 사람은 여리고의 저주받은 것을 멀리하라는 여호수아의 경고에 불순종했습니다. “너희는 반드시 저주받은 물건으로부터 너희 자신을 멀리하라. 너희가 저주받은 물건 중에서 취하여 너희 자신을 저주받게 하며 또 이스라엘 진영을 저주거리로 만들고 괴롭게 할까 염려하노라.”(6:18 흠정역). 그리고 그 도시의 노략물에서 아름다운 바빌로니아 의복을 취하여 감추었습니다. 바벨론은 종교와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간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을 상징하는 약간의 은과 하나님의 본성을 상징하는 금을 취하여 감추었습니다. 아간은 하나님의 어떤 것과 세상의 어떤 것들을 취했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이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아간에게 돌을 던졌고 이 모든 것들을 불살랐습니다. 아주 조심하십시요. 교회생활 안으로 세상을 가져오지 마십시요. 만일 여러분이 세상을 가지고 들어온다면 그 세상은 여러분을 정복할 것입니다. 그것이 겉으로 보기에 소소한 어떤 것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쳐들어오려는 세상을 위해 문을 엽니다. 이스라엘이 그들 가운데서 다루어진 후 주님께서 아이 너머에 매복을 세우라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싸울 수 있는 온 백성을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의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도시와 그의 땅을 네 손에 주었나니 너는 여리고와 그것의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것의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노략한 물건과 가축은 너희를 위하여 탈취물로 취하라. 너는 도시를 얻기 위해 도시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라.”(8:1~2 흠정역). 이스라엘이 두 번째로 아이를 대적하러 갔고 승리를 얻었습니다.

 

기브온- 사람의 속임, 현혹

 

우리는 공중에서 정사(여리고)들과 먼저 싸우고 그 다음은 유혹하는 세상(아이)과 두 번째로 싸웁니다. 하지만 가장 다루기가 어려운 것은 여리고도 아이도 아닌 속이는 사람을 상징하는 기브온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을 사칭하여 먼 거리에서 왔습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하나님의 조언을 구하지 않고 기브온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만일 그가 주님께 물었다면 주님은 사실상 그 땅의 소유를 빼앗겨야만 했던 이웃이었었다는 것을 틀림없이 보여 주셨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사람에게 속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승리를 얻기 위해 우리의 실수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과 동맹을 맺기 전에 하나님을 찾지 않음으로서 실패했습니다. 이 언약은 아모리사람들의 다섯 왕들로 공격이 있었을 때 기브온 방어에 여호수아가 오도록 강요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여호수아가 아이를 점령하여 진멸하되 여리고와 그것의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것의 왕에게 행하였다는 것과 또 기브온 거주민들이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들으니라. 그때에 그들이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기브온이 왕가의 도시 중 하나같이 큰 도시요, 또 그것이 아이보다 크고 그것의 사람들이 다 강하였기 때문이더라. 그러므로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헤브론 왕 호함과 야르뭇 왕 비람과 라기스 왕 야비아와 에글론 왕 드빌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내게로 올라와 나를 도우라. 기브온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하였으니 우리가 기브온을 치자, 하니라. 그러므로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 곧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이 함께 모여 자기들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올라가 기브온 앞에 진을 치고 기브온을 대적하여 싸우니라. 기브온 사람들이 길갈의 진영에 있던 여호수아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의 손을 늦추어 당신의 종들을 버려두지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도우소서. 산지에 거하는 아모 족속의 왕들이 우리를 치려고 함께 모였나이다, 하매 이에 여호수아가 싸움을 할 수 있는 온 백성과 강한 용사들과 함께 길갈에서 올라가니라.”(10:1~7 흠정역). 차례로 주님은 성경에서 가장 큰 기적 준의 하나를 이행하시는 기회로 이것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분은 여호수아가 승리를 얻을 수 있도록 그날을 오래 지속되게 하셨습니다. “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아모리 족속을 넘겨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께 아뢰고 또 이스라엘의 눈앞에서 이르되, 해야, 너는 기브온 위에 멈추어 서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 해가 멈추어 서고 달이 멈추어서 마침내 백성이 자기 원수들에게 원수를 갚으니라. 이것이 야셀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냐? 이와 같이 해가 하늘 한가운데 머물러 서고 거의 하루 동안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더라.”(10:12~13 흠정역). 우리가 실수를 할지는 모르지만 만일 우리가 주님을 위해 있다면 그분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잘못된 의견을 사용하실 수 있으십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의 체험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주님과 그분의 계획과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실패했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다섯 아모리 왕들을 무찌르는 기적적인 승리를 통해서 그분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그것을 사용하셨습니다.

 

섬김의 삶

 

분별있는 지도자는 주님을 따르는 것과 먼저 주님께 드림으로 섬기는 것을 배운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여호수아의 삶에서 그가 이 공과를 배웠습니다. 그는 탁월을 주님께 드림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의 삶은 상속을 주신 그들의 하나님께로 그분의 백성을 데려오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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