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강해/여호수아

섬김을 배우는 것

Hernhut 2009. 7. 28. 23:44

섬김을 배우는 것

먼저 우리는 여호수아가 주님께와 주님의 관심에 전적으로 헌신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그가 아말렉에 대항하여 싸우려고 선택할 수 있었던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배웠던 것 중에서 정말로 승리를 가져오게 했던 것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모세의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필요했지만 그리스도의 중보이외에 다른 것들은 엉클어져 있습니다. 각자의 승리를 얻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섬김을 시작으로부터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야 합니다. 시편기자가 기록하기를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도시를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고 했습니다. 비록 주님께서 자비롭게 승리로 여호수아를 신뢰했을지라도 여호수아가 그것을 진실로 책임져야할 사람이 아니었음이 명백합니다. 아론과 훌의 부축으로 모세의 기도를 통해 승리를 얻게 하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잃어버리는지를 아시기 때문에 그분은 여호수아 혼자서 어쩔 수 없게 된 책을 쓰도록 모세를 교육했습니다. 이 책 안에 기록한 것은 그를 기억하도록 여호수아에게 암송케 했으며, 그가 확실히 주님을 섬길 것이며, 그의 은사와 큰 능력에 의해 그의 모든 생애를 주님의 관심을 위해 싸울지라도 결과를 결정하신 이는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비록 여호수아가 얼마나 영리하고 유능하다 할지라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모세가 손을 올리고 있을 때까지 아말렉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승리를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가 정말 놀랍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승리자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를 지배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보좌 위에 계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처신하고 또 드러내지 않고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 추구함으로서 배워야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을 위한 이드로의 충고

 

이 측면에서 여호수아는 또 다른 과정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무거운 노역을 하던 이스라엘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아내와 아들들을 데리고 모세에게 도착했습니다(출 18:5). 나는 이드로가 <세상에서의>또는 <연륜이나 도덕적, 학문적으로>경건한<지혜가 있는> 사람이었음을 믿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노역장 밖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나오도록 하셨던 것을 기뻐했습니다(출 18:9~10). 그러나 그는 모세에게 말하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장막에서 보고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관점과 이해에 의해서 그는 약간의 충고를 모세에게 했습니다(출 18:17~23).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그대가 행하는 일이 좋지 아니하도다. ㆍ그대와 또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다 분명히 지치리니 이는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무겁기 때문이라. 그대가 이 일을 홀로 행할 수 없으리라.“(출 18:17~18)

 

그것이 논리적이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2백만 명이 있었으며 재판관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지쳤을 것입니다. 이드로는 계속하여서 “이제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라고 모세가 무엇을 할 것인지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것보다도 사람의 조언으로 보았습니다. 이드로는 “이제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내가 그대에게 조언을 주리니 하나님께서 그대와 함께 계실지로다. 그대는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쪽을 향하고 사정들을 하나님께로 가져가”(출 18:19) 고 말했습니다. 이드로는 백성들을 규례들과 법들을 가르쳐서 그들에게 마땅히 걸을 길과 행해야할 것을 보여주라고 모세에게 교육했습니다(출 18:20). 이것은 좋은 충고의 소리 같지 않습니까? <이성적,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말입니다.

 

“온 이스라엘에서 능력 있는 자들을 택하고 그들로 하여금 백성의 우두머리 곧 천 명의 치리자와 백 명의 치리자와 쉰 명의 치리자와 열 명의 치리자로 삼으매”(출 18:25)

 

모세는 그의 장인의 충고를 따랐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치리하도록 하고, 규례들과 법들을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다른 말로 가정 집회와 구역 집회와 큰 집회를 갖도록 하기 위해 배열을 했습니다. 내가 젊어서 이것을 읽은 후에 나의 느낌은 하나님께서 정말로 믿기 어려운 장인을 모세에게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받은 그 압박을 끊기 위해서 여러 가지 단계 안으로 그들을 조직하고 규례와 법을 사람들에게 주게 하는 그의 제안은 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느 날 니토생형제가 쓴 하나의 주장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과 이드로의 방식 사이에 다른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고 계십니까? 예수께서 또한 그가 빵과 물고기를 분배하셨을 때 오천 명을 그룹으로 조직하시지 않으셨습니까(마 6:39~40)? 그분께서 하셨던 것은 지시가 없었음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임

 

나는 몇 년 동안 이 문제를 생각해 왔습니다. 나는 마침내 많은 것들이 하나님 없이 교회 생활 안에서 “적당하게”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분 없이 “적당하게”보다도 “너무 감상적이게” 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방식은 그들이 능률적으로 달리기 위해서 조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생활 안에서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어야만 한다고 계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점을 볼 수 있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드로의 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매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교회생활 안에서 모든 것의 실체와 원천은 그리스도 만이셔야만 합니다. 비록 사람의 방식이 아무리 좋다고 한다할지라도 교회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바꾸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여호수아는 옳은 것인지 모르지만 모든 “옳은” 공과를 배워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결과를 주기 때문에 그것으로 기뻐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이 사람의 관점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함

 

깨닫도록 하기 위해 그를 이끌어 낸 아말렉을 포함하여 여호수아의 첫 학습 경험은 그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에 관해 주의 깊게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두 번째 학습 체험은 심지어 가장 좋은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요, 하나님과 우리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습니다. 어떤 협력자들은 열매 맺게 되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장로들은 그들의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협력자들이 갖기를 원하시는 것은 사역이며, 그분께서 교회를 위해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로 충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두 영역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얻었었던 모든 사람들 안에서 자랑할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시고 또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무슨 사람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사람을 붙잡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분은 “그와 같은 사람이 존재한다고? 그를 나에게 증명해보라. 나는 그가 적은 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노라.” 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개인적으로 매우 좋게 나타나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하는 것으로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소중하고 값진 형제다. 네가 좋아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신가?”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사람은 당신(예수)를 사랑합니다.”라고 주장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랑의 열매는 어디에 있느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종종 아주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이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루는 방법에 관해서 많은 조언을 주었으나 이드로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을 가져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했던 출애굽기 19:24를 보겠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너는 내려가서 아론과 함께 올라오고 제사장들과 백성으로 하여금 돌파하여 주에게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내가 그들을 향해 돌격할까 염려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방법은 교제의 원칙 안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 다른 하나님(신)들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하셨습니다. 먼저 그분은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이집트 땅 곧 속박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주 네 하나님이라. ㆍ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취하지 말라.”(출 20:2~3)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소망은 규례를 주지도 사람들을 조직하지도 않는 것이었으나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몇몇의 신들에 관해서 그들에게 당연히 대답을 요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그들이 대답하기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님을 무척 사랑하고 있는 성도를 알고 있는데 그는 전 시간 주님을 섬기기를 시작하기 전에 퇴직 수당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그의 직업에서 그가 좀 더 머무는 것에 관해 어떤 느낌이 있는지를 나에게 물었었습니다. 그 대 나는 이것에 동의했으나 나중에 나는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나는 “만일 당신이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면 지금 주님을 따르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퇴직금이 하나님을 대체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가 여러분의 이해력이 정리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여러분의 민감한 부분을 괴롭히고 또 여러분의 우두머리 비밀을 밝힐 수 있는 것이 내 소망이요, 내가 말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이것을 위해서 주님 앞에서 회개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예수 이외에 다른 신들은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국 한 가지 것에 관해서 깨끗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이외에 신이 없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안전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여러분은 이 첫 번째 원칙을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갖지 말아야만 합니다.

 

또 다른 근원적인 방법으로부터 온 명령 : 또 다른 신이 있음

 

모세의 장인의 조언은 여러분의 일생동안 하나님보다 여러분의 다른 지시를 위한 근원을 의지 하거나 열도록 하는 그의 신이 되었으며, 여러분이 홀로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하나님이시라는 원칙을 모독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모세는 이 생각을 갖고서 그의 새로운 방법을 해본 후에 그것은 그의 신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말을 할 때마다 “이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그 “계시”는 여러분의 신이 된다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갑자기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너무 많은 신들이 있는데 여러분의 일, 전문적인 직업, 영적인 훈련, 봉사, 교회나 여러분이 돌볼 약간의 양(어린 그리스도인)들을 찾을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분명하게 만드신 첫 번째 것은 그분을 제외하고는 여러분이 다른 신들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장인이 모세에게 말한 것은 그들을 위한 방법은 되었으나 주님의 것은 모세에게 베일이 벗겨졌으며, 아론은 비밀에 가까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소유하고 하나님께 관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우리 주님만을 따르는 것이 우리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 이외는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은 그들 앞에서 축제로 즐기고 있음

 

규례와 율법을 제외하고 주님께서 두 번째 것을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한해에 3번씩 그분께 명절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출 23:14). 교회생활은 이 단계를 관통합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교회생활은 천연적인 사람에 의해 소중히 해 왔고 또 우리가 명절생활로 그분을 누림으로서 그분 자신에 의해 소중히 해 왔습니다. 이러한 교회생활 안에서 단지 하나님의 것을 생각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한담이 아니고, 견해가 아닙니다. 대신에 이런 것들은 축제(명절, 먹고 즐김)입니다. 완전한 교회생활은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배어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 그들 앞에 그분의 사자(使者)를 보내심

 

우리가 하나님께 물을지 모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가 오직 당신만을 맛보고 증거하며 또 관심하는 것을 만족하시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모든 것이 놀랍다고 해서 예배할지 모르나 출애굽기 23:20~23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더 이상의 것을 요구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땅 안으로 그들을 인도하고 지키도록 하기 위해 그들 앞에 사자(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여호수아는 여호수아가 그분을 위한 것이었음을 여호수아를 일깨울 그 사람(그리스도)을 만났습니다(수 5:13~15). 이 천사는 모든 아모리 사람들, 여부스족속, 헷족속, 그리고 모든 다른 “족속” 가운데로 받아들이게 할 것이었으며, 또 주님께서는 그들을 넘어뜨릴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꿈같은 교회생활입니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너무 행복해 하나 나에 관해서는 어떤가? 너는 스스로의 중심 대학으로부터 졸업할 수 있는가?” 라고 하십니다. 비록 몇 사람이 기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은 이와 같은 단계에 도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심에 관심을 갖고 또 축복은 올 것이나 하나님께서 소망하시는 것이 아직 오직 있지 않기 때문에 가히 이렇게 말할 만합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임재 안에서 만족하게 됨

 

출애굽기 24:9~13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았는데 사파이어 보석(청옥-靑玉)으로 깔려있는 그분의 발밑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께만 관심하는 요점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또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 안에서 이것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그리스도만을 관심했으며, 그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했고, 함께 잔치를 마음껏 즐겼고, 인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자신을 보았고, 그분의 임재 안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들은 두 번째 단계 안으로 그것을 완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이나 어떤 것은 아직까지 필요했습니다.

 

흥미를 끌고 있는 또 다른 방법: 가르침을 받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시 오라고 하셨으며 이 때 그는 여호수아와 함께 산에 올라갔습니다(출 24:12~13). 이때까지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은 쉬웠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분의 율법을 새긴 돌 판을 주어 또 다른 단계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부드럽던 것이 아주 딱딱하게 되었고 가르쳤던 어떤 것들은 돌에 새겨진 것이 되었으며, 이해가 되었던 것이 제도가 되었습니다. 모세와 그의 시중드는 사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산으로 갔습니다. 왜 여호수아가 아론 대신에 모세와 함께 선택되었을까요? 아론은 너무 좋은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그는 모세와 여호수아가 산에 올라간 후에 사람들이 따르려고 하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내는데 놀아났었습니다. 필요로 했던 것은 주님의 증거를 위해서 싸움을 할 수 있었던 군인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위한 것들을 하려고 하는 자신의 능력을 신뢰할 수 없음을 배웠습니다. 그는 또한 사람의 조직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또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축제의 생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다른 신들이 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관심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상태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먹고 마실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체험이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와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내가 기록한 돌판들과 율법과 명령들을 네게 주리니 이것은 너로 하여금 그들을 가르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출 24:12) 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단계에서 배워야할 것은 여호수아가 비록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분 앞에서 행복하게 될 수 있는 어떤 것들이 필요로 하셨습니다.

 

 

만족하시는 하나님 : 그분의 증거를 세우심

 

여러분이 기도하는 가장 좋은 기도는 ‘하나님, 당신께서는 날 위해서 정말 많은 것을 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제가 당신께서 행복하시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제가 당신을 만족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께서는 나를 완전히 만족케 하십니다. 이제 나는 당신을 만족케 하기 위해 갈망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너의 시종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5:8~9에서 주님께서 모세에게 그분께서는 신성한 장소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는 너의 교회를 사랑하고, 또 나는 나의 증거를 사랑하노라. 너희가 기쁨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증거를 좋아하노라. 너의 관점으로부터 너희가 나를 만족케 하는 것이요, 내 관점으로부터 나는 너희를 나의 만족함으로 나를 만족케 하는 너희가 필요로 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주님은 모세가 그분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실 장막과 성막을 그분께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생활 안에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누린다고 선포할지 모르나, 그리스도께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매우 활동적인 교회생활을 가질지 모르나 그리스도께서는 보기에는 그분의 증거를 아직 가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전투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아론이 아닌 여호수아는 이 직분을 위해 모세를 수행할 올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담은 모세가 그분의 증거를 위해 장막을 그분께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그들의 기쁨을 위한 것들을 원했고, 주님은 그렇게 되는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갈망은 그분의 이름이 그들의 기쁨 안에서 그분을 높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본에 의해서 모든 것을 함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모세에게 계시하셨던 본에 의해서 성막을 그분을 위해서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5:9). 그것은 더 이상 그들의 축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분 앞에서 합당하게 되기 원하셨다면 그들은 그분께서 산 위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셨던 본에 의해서 모든 것을 해야만 했습니다. 인간의 조직의 첫 번째 단계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춘 두 번째 단계는 적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체험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증거에 대한 관심한 극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세 번째 단계에 오는 것은 바로 그분의 거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목표입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고 행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우리에게 베일을 벗겨 주실 본에 의해서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정말 이 시간에 의해 많은 것들을 체험 했습니다. 그는 아말렉을 정복했으며, 아말렉의 위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로 어떻게 사람의 질서(배열)를 가지고 왔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그들에게서 베일을 어떻게 벗기셨는지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쁨이 되시는 것입니다. 교회생활 안에서 사람도, 또 다른 방법도, 아무것도 되지 말아야 하지만 다만 그리스도요, 또 그리스도의 누림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은 효과적인 교회생활을 생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갈망은 더 이상의 어떤 것입니다. 그의 갈망은 그분께서 산 위에서 베일을 벗긴 본에 의해서 되었던 모든 것에 관련하여 성막과 장막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 직분(성직)

 

제사장직분의 봉사(섬김)는 또한 이 시점에서 베일을 벗겨졌습니다. 모세는 장막에서 섬길 제사장 직분을 준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증거할 제사장직분을 갈망이 있었습니다. 증거의 문제처럼 제사장직분의 문제는 교회생활 안에서 단순히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의 이상은 전진해야 하며, 또 우리는 이상과 함께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성공에 관심하는 것이 아니고 만족함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관심함

 

우리는 한 단계 한 단계, 한 걸음 한 걸음 배워야합니다. 결코 다른 성공을 시기하지 않고, 또 그 영의 일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더 큰 그룹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를 보게 된다면 그 성공을 시기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무리가 사람들을 얻어 무척 많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니토생형제를 패배시킬 수 없었습니다. 36년에 약 천여 개의 교회에서 적어도 60만에서 6백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증거를 위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얻은 것을 질투를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더욱이 “그것을 우리가 하니 아무도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역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겸손한 영과 전진하는 것을 계속 추구하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유일하신 그리스도에 관해서 관심하기 위해 가치 이상의 인간적인 조직을 얻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가 그리스도에 관해서 관심하지 않는 곳으로 계속 가려고 하지만 또한 그리스도의 증거를 관심하는 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너무 많이 그리스도를 위해 관심한다면 그 후에 우리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해 주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모세가 오늘날 교회생활인 제사장직분을 설립하고 장막을 건축해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만족하심을 위해 교회생활 안에서의 그리스도와 함께 봉사함

 

만일 우리 가운데 젊은 사람들에게 냉담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생활의 문제입니다. 내가 처음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내가 교회생활을 느낀 것은 나이 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고, 또 오직 젊은 사람들의 모임에만 갔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주님께서는 이 “나이 든 사람들”은 나의 형제들이었다고 나에게 말씀(계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 든 사람들”모임에 갔고 또 찾기 시작했고, 그들은 매우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또한 교회생활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제사장직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 누구에게 관심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무슨 봉사에 참여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이 교회생활이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이 또한 우리가 했던 그 만큼과 똑같다는 것이라고는 깨닫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성경을 읽고 그들의 가정에서 저녁식사를 하러 가고, 어떤 이들을 관심을 갖고 복음을 전하러 간다면 여러분은 교회생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동안은 주님께서 그분의 증거를 가지고 계신 것이라면 우리는 주님의 증거를 위한 것이며,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서 충만하게 되어야할 필요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여러분이 노인일 때 여러분은 일을 마치고서 집에 오는 것을 즐거워 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이러한 일을 한 후 사역을 했다는 것을 만족함을 느끼면서 집으로 갔다면 이것이 교회생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업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은 하나님, 사람, 교회, 교회모임들, 복음, 그리고 그리스도께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분배의 생활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누구에게든지 가는 것은 진실로 영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크게 실패하는 그리스도인 무리들은 이드로가 주장하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무리가 효과적이고, 합당하게 될 수 있는 것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말하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이드로가 필요하지 않다. 너는 나와 나를 누리는 것, 그리고 나를 위해 나의 증거를 건축하는 것 필요하다. 이를 위해 너는 교회생활을 아주 깊고, 건강하게 일어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년이 채 안되어서 여호수아는 아말렉을 소멸시켰고, 제사장직분에 의해 유지함으로 모든 것이 혼란을 가져 온 것은 이드로 방법이었음을 보았으며, 우리가 오직 그분과 그분의 임재 안에서 기쁨이 되어야만 것을 주님께서 계시하셨다는 것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만족을 위해 그분의 증거를 갈망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얼마나 많이 보게 되었을 까요?

 

 

산에서 내려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분의 훈련하심을 마치시고, 그분의 손으로 새기신 두 돌 판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 후에 모세와 여호수아는 산에서 내려왔는데 그 때 여호수아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가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캠프에서 전쟁이 있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따금 어떤 것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의 귀는 훨씬 더 좋았지만 나이든 사람(장로)들의 귀는 더 정확했습니다. 모세는 그것이 패배나 승리의 소리가 아니라 노랫소리였습니다(출 32:18). 나는 모세가 아주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산에서 천천히 걸어서 내려왔다고 믿습니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그를 돕고 있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호수아가 아론이 결코 보지 못했던 어떤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크게 기뻐해야 했었습니다. 아론은 하나님의 어떤 것을 누릴 체험을 가질 수 있었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건축의 문제를 보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증거를 보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제사장직분을 보았습니다. 그런 후 그는 캠프에서 소리를 듣고,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여,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나 모세는 그것은 패배나 승리의 소리가 아니라 황금 송아지를 숭배한 것으로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소리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후에 그것을 심판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훌은 더 이상 언급됨이 없습니다. 그는 행정적인 문제로 모세에 의해 아론과 함께 따로 세워졌으나, 이 사건 후 그의 직무는 사라졌습니다. 여러분이 보는 것에 빠지면 빠질수록 여러분은 더 높은 댓가를 지불해야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많은 것을 본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목적을 많이 따로 떼어 놓아야 합니다.)

 

 

인내로 배우는 것은 주님의 행정 아래에 머무는 것임

 

출애굽기 33:7~11에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배우기 위한 필요로 했던 마지막 중요한 생각을 알게 됩니다. 그는 집회 하는 곳의 시중드는 사람으로서 38년 간 계속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헤매고 돌아다니는 동안 모세는 아침에 “일” 안으로 갔고, 매일 집으로 돌았으나 여호수아는 머물렀습니다. 여러분이 아주 많은 것을 받은 이후에도 여러분은 인내심을 배워야합니다. 여러분이 알면 알수록 더 주님의 행정 안에서 머무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인과 결혼한 이후에도 모세에게 순종함으로 남아 있었습니다(민 12:1). 아론과 미리암은 그것(순종함으로 머무는 것)을 다룰 수 없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가 이 증거를 열매 맺으려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누림, 그리스도의 증거, 그리스도를 누리는 교회생활 안에서의 관심만으로 배웠던 것을 상징하는 그의 지도자를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간단한 방법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도왔던 사람과 나를 일으켰던 사람을 만지지 말라.” 여호수아는 이 모든 것으로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른 공과를 빠르게 배울 수 있었으나 이 마지막 문제는 천막 파수꾼으로서 그가 38년간 지냈습니다. 마치 여러분이 여호수아가 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자신을 준비하십시오. 여러분은 훈련되고, 또 교육되어야만 합니다. 주께 말하십시오. “주 예수여, 여호수아는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저 또한 내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세상으로부터 어느 것도 신뢰할 수 없음을 배우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누림과 그리스도를 위한 관심뿐인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저는 건강한 교회생활과 주님의 증거를 위해 싸우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제가 얻는 모든 부요로 또한 천막 파수꾼이 되는 것을 배우기 원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그를 선택했을 때 30살 되었었는지 모릅니다. 만일 그가 40살이 더 되어 모세와 함께 있었다면 그가 내 나이 정도 되었을 것이고, 이때까지 단지 천막 파수꾼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원하십니까? 모세는 그에게 다른 어떤 직분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를 일으킨 장로형제를 섬기는 것은 인내였습니다. 그는 그를 도왔던 사람과 함께 일어섰습니다. 만일 우리가 여호수아처럼 훈련받았다면 우리는 또한 주님께서 땅 위에서 그분의 관심을 위해 싸우려고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