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강해/여호수아

섬김으로 나타냄

Hernhut 2012. 1. 6. 17:56

 

 

섬김으로 나타냄

                             by Br. 성임현(Hernhut)

                         

이 장면은 출애굽기 끝에 있는 영광스러운 사건과 함께 나옵니다. 장막이 세워지고 구름이 그것을 덮었으며, 주의 영광이 그곳에 충만하였습니다. “그 뒤에 구름이 회중의 장막을 덮고 주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더라.”(출 40:34). 그날 이후로부터 주님의 구름은 낮 동안에는 장막 위에 있었고 불이 밤에는 그 위에 있었습니다. 더 좋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수행할 준비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70인을 부르심

 

“백성이 불평하니 주께서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니라. 주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분노하사 그들 가운데 주의 불이 붙게 하시고 진영의 맨 끝 부분에 있던 자들을 소멸시키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주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가 그곳의 이름을 다베라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 가운데 주의 불이 붙었기 때문이더라. 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에 빠지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서 먹게 할까? 우리가 이집트에서 마음대로 먹던 물고기와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양파와 마늘을 우리가 기억하거니와 이제는 우리의 혼이 메마르고 이 만나 외에는 우리 눈앞에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 만나는 고수풀 씨 같고 그것의 색깔은 마치 델리움 색깔 같았더라. 백성이 두루 다니며 만나를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고 절구에 찧기 도 하며 납작한 판에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납작한 빵을 만들었더니 그것의 맛이 신선한 기름 맛 같았더라.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그 위에 내렸더라. 그때에 백성이 두루 그들의 가족대로 울되 저마다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에 주께서 크게 분노하시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모세가 주께 아뢰되,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종을 괴롭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내가 주의 눈앞에서 은총을 입지 못하며 또 주께서 이 온 백성의 짐을 내게 떠맡기시나이까? 이 온 백성을 내가 수태하였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기에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먹이를 품듯 그들을 네 가슴에 품고 주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기를,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우리가 먹게 하라, 하오니 이 일이 심히 무거워 나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나를 이같이 대우하실진대 원하옵나니 내가 주의 눈앞에서 은총을 입었거든 즉시 나를 죽여 내가 내 비참한 모습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 11:1~15 흠정역)

 

모세는 음식과 관련하여 백성들의 불평에 대해 괴로움을 느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70인을 함께 모이도록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모세를 돕도록 백성들 위에 세우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 위에 있었던 같은 영이 그들을 덮고 그들과 함께 주님께서 말씀하실 장막으로 왔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그 영(the Spirit)을 잃어버리지 않았겠지만 그는 이 다른 70명과 함께 이제 그것을 나누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까지 모세는 모두가 인정하는 지도자였고, 그의 얼굴은 주님의 임재를 떠난 후 빛이 났고 모든 백성들은 그가 지나갈 때 진지하게 그들의 장막문에 서 있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다른 아무도 이런 신성한 권한을 발휘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제 막 그분의 영을 부어주시려고 하셨습니다. 70명 중 2명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막으로 가지 않고 휘장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 중에서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있더니 하나의 이름은 엘닷이요, 다른 사람의 이름은 메닷이더라. 그들 위에 영이 머무니라. 그들은 기록된 자들 중에 있었으나 성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더라. 그들이 진영에서 대언을 하므로”(출 11:26 흠정역). 하나님은 70명 모두에게 그분의 영을 부으시고 이 두 사람을 포함하여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지도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특권을 가진 느낌과 장로그룹 위치에 있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제외하고 그들은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예언하면 할수록 그들 역시 주님의 영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젊은이는 모세에게 이런 것들을 보고했습니다. 두 사람이 여호수아의 훈련됨과 순종하는 성격을 불쾌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내 주 모세여, 그들을 금하소서, 하니”(민 11:28b 흠정역)라고 여호수아가 응답했습니다. 아마 그의 이해력(지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동으로 한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목소리를 허락하는 것은 문제를 유발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해 시기 하는가? 주님의 모든 백성들이 예언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그들 위에 자신의 영을 두시기를 원하신다.”(민 11:29)고 했습니다. 모세는 만일 70명만이 예언했었다면 그것이 정말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예언자들이었기를 바랬습니다!

 

넓어지는(관대해지는) 것

 

 

천연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가르침으로 한 목소리만을 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길은 그분의 영을 따라서 항상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70명 중의 한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었다면 나는 모세가 질문했던 것처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매우 넓으시고 크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증거를 증가시키려고 이 같은 모든 기회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좁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의 임재를 가질지 모르지만 다른 그리스도인들 또한 주님의 임재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금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요한이 응답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그를 막았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를 막지 말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눅 9:49~50 흠정역). 여호수아는 너무 좁아지게 됨으로서 모세에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주님의 종은 좁아지지 않고 넓어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헌신에 변함없이 믿음을 바치기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정해주시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임을 그만두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주간 다른 모임을 방문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어리석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증거를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과 또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나타내야만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할 수 있거나 볼 수 있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을 위해 우리가 다르게 인도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아주 평안하게 되어야만합니다. 모세는 아주 분별이 있었습니다. 그의 관점은 정말 넓었습니다. 그는 두 명뿐만 아니라 주님의 백성 2백만 모두 예언자들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만일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물론 쾌나 까다로웠을 것이지만 그 정서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당당함과 넓음(관대함)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결과였습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70명과 함께 일을 하라고 그에게 명령하셨던 것에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천막 안에 있는 두 사람위에 그분의 영을 부으셨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들을 해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역시 어떤 것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을 알고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의 갈망은 주님께서 그분의 모든 백성들을 통해 어떤 것을 더 하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모임이 두 사람을 구원되도록 도움을 주었다면 우리가 행복하게 되지 않을까요? 만일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도록 어떤 사람들을 도왔다면 우리가 그들과 함께 기뻐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 그룹에 가입하거나 가입하고 있는 것에서 떠나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높고 얼마나 넓으며 얼마나 영적인 관점을 모세가 가졌는지요! 그의 갈망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를 건축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갈망에 맞는 예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나 대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느니라.”(고전 14:4 흠정역).

 

 

저항하는 것이 아니다.

 

모세는 에티오피아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아론과 미리암은 모세에게 반대하는 말을 할 수 없었고 그것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결혼한 그 이디오피아 여인으로 인하여 모세를 비방하니라.”(민 12:1 흠정역).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의 저항에 그들을 포함했더라면 그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할렐루야! 나는 더 이상 텐트 지키는 자가 필요치 않습니다. 나는 일어나서 저항 뒤에 나의 군사들을 던질 것입니다. 그 후에 나는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겪었던 가장 위험스런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그의 지도력을 신뢰를 했고 여전히 순종적이었습니다. 그는 그를 높이고 그를 도왔던 사람이 약화시키는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결혼에 대한 모든 것에 반응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다스림과 관련하여 정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들 가운데 정하신 지도자들은 허물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것들을 만지지 말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 시험을 지나가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것처럼 어떤 나타내심을 우리에게 인정해 주실지 모릅니다.

 

 

땅으로 정탐꾼을 보내라.

 

주님께서 가나안땅을 찾기 위해 각 족속에게서 한 사람씩 선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땅을 탐지하게 하되 너희는 그들의 조상들의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곧 그들 중에서 치리자를 한 사람씩 보내라, 하시니라.”(민 13:1~2 흠정역). 땅을 취하기 위해 그들이 기대해야 할 것이 무엇이지를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열두 명중의 한사람이 될 위치에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남쪽 길로 올라가고 산으로 올라가서”(민 13:17b 흠정역).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는 언제든지 우리는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삶은 항상 더 높은 우리를 취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과 같은 영적인 높이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으로는 전진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고지에 머물러있는 것을 즐거워할는지는 모르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의도는 올라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높은 새로운 곳으로 오르고 정말 영광스러움을 느낀 후에 주님께서 그 때에도 말씀하십니다. “지금 멈추지 마라! 더 높은 곳으로 오르라!” 우리가 기름진 땅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우리 육체뿐만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능력들이 다루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政事)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엡 6:12 흠정역). 이것은 영적인 전쟁의 본성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기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는 높은 땅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모세는 좋은 땅이든 나쁜 땅이든지를 살피라고 정탐꾼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거하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 그들이 거하는 도시들이 장막인지 요새인지 그 땅이 기름진지 메마른지, 그 안에 숲이 있는지 없는지 살필지니라. 너희는 크게 용기를 내고 그 땅의 열매를 가져오라, 하니 이제 그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때더라.”(민 13:19~20 흠정역). 하나님은 이미 그에게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고 있었던 땅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데리고 올라와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처소로 이끌려고 내려왔노라.”(출 3:8 흠정역). 하지만 모세는 그들 스스로가 그것을 찾음으로 감격하는 그들을 원했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부모가 대학교를 갈 아이들을 원한다면 그들을 위해 단순하게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부모는 먼저 그 캠퍼스에 정탐하기 위해 그들을 보내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삶과 같습니다. 우리가 비록 선한 것이라고 안다할지라도 우리는 그들 스스로가 볼 필요가 있는 다른 것에 힘을 쏟을 수 없습니다.

 

정탐꾼들의 보고서

 

 

정탐꾼들은 날마다 약 16~32km씩 걸어40일 동안 온 땅을 통해서 찾았습니다. 그들은 두 사람이 운반해야만 하는 아주 큰 포도송이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또 그들이 에스골 시내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 한 송이가 달린 가지를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포도송이를 베었으므로 그곳을 에스골 시내라 불렀더라. 잘라 두 사람이 막대기에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가져오니라.”(민 13:23~24 흠정역). 돌아와서는 그들이 보고 했습니다. “모세에게 고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참으로 그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열매이니이다.”(민 13:27 흠정역). 그 땅에 있는 동안 그들은 그곳에서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보았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도 보고했습니다. “거기서 우리가 거인들에게서 나온 아낙의 아들들 곧 거인들을 보았노라.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우리가 메뚜기 같았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하니라.”(민 13:33 흠정역). 그들은 그 땅의 소산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보았지만 그들은 거인들을 이기도록 그들에게 도움 주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밤에 울었습니다. “이에 온 회중이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그 밤에 울었더라.”(민 14:1 흠정역). 메뚜기로 그들 스스로를 표현한 10명의 정탐꾼들은 그들이 그들을 작게 느꼈다고 말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메뚜기였다고 말한 것은 그들이 짓밟히게 될 것이라고 느낀 것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가망 없이 보았습니다. 사실 그들은 오늘날처럼 통찰력(비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미 있고 목적이 있으며 비전이 가득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목표와 주님의 관심을 위한 싸움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어떤 것들은 10명의 정탐꾼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그 땅의 이로운 부분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거인들은 이것을(이로운 것) 무력화 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집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백성들은 그 밤에 함께 울었습니다. 얼마나 절망적인 것인지요!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은 모세와 아론을 불평했습니다.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민 14:2 흠정역). 그들은 이집트를 어떻게 떠나왔는지, 홍해를 어떻게 넘어 왔는지, 어떻게 매일 기적적으로 먹었는지를 잊었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온 것도 잊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필요했던 모든 것들을 어떻게 공급하셨는지를 잊었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렸던 모든 것들은 10명의 정탐꾼들에 의해 그려진 맥 빠지게 하는 그림이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통과해 갈 때 가금 우리는 우리 과거의 영적 누림, 성장, 그리고 부요 모두를 잊어버립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어떻게 패배하고 있는지에 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메뚜기와 같이 우리 자신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과 주님께서 그것을 위해 우리를 얻으셨다는 것에 관해 분명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무력화 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점으로 우리가 얻었던 것이 실제입니다. 이때 우리가 거인들을 볼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메뚜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마든지 우리 안으로 이미 구성된 것들은 바뀔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불평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모세와 아론에 대항하여 울며 불평하여 이르기를 “만일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하고 투덜댔습니다.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으리라!”(민 14:2 흠정역). 불평하는 것은 가련한 상태를 드러냅니다. 주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요, 그분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요, 불평을 하기 위해 시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관심에 여념이 없이 바쁩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이런 점에서 이 같은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워하는 대신 그들은 그들의 아내들과 아이들이 희생될까봐 불평했습니다. “어찌하여 주가 우리를 이 땅으로 데려와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의 아내와 자녀가 탈취물이 되리니 우리가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하고”(민 14:3 흠정역). 비록 그들이 이것을 예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것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주님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었다면 돌아간다는 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여러분이 세상으로 돌아가기 원했던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계신 것에 직접적으로 아주 강하게 동의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다시금 여러분의 옛 친구들과 함께하기를 노력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러분은 그들이 하고 있었던 것에 더 이상 어떤 맛도 보질 못합니다. 우리는 불평할 수 있지만 우리가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반항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엎고 이집트로 그들을 데려다 줄 지도자를 세우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서로 이르되, 우리가 대장 한 명을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하매”(민 14:4 흠정역). 이 위협은 아주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고통과 슬픔의 신호로서 그들의 옷을 찢었습니다. 그들은 논쟁을 벌이며 백성들 모두에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무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매우 좋은 땅이라. 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 14:7~8 흠정역). 그들은 2백만 명의 강한 자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바위 밖으로 물이 흐르게 하셨고, 매일같이 만나로 그들을 먹이셨고, 광야에서 그들의 적을 패배케 하셨습니다. 그들은 무슨 걱정이 있었나요? 여호수아와 갈렙은 백성들에게 “오직 너희는 주를 대적하여 반역하지 말며 또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이 우리의 양식이니라. 그들의 방어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주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9 흠정역)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경고는 주님을 맞서는 저항이 아니라 모세에게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세에게 반대하는 그들의 저항이 실제로는 주님을 반대하여 저항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불평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자손이 내게 불평하는 것 즉 그들의 불평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민 14:27 흠정역). 백성들은 그들이 모세를 반대하여 불평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모세를 인정하셨다는 것을 잊고서 그분을 대항하여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리 모두 우리를 시중들고 우리를 부축해 주는 사람을 반대하여 불평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생명원천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주가 말하노라. 진실로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너희가 내 귀에 말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사체가 이 광야에 쓰러지되 곧 너희의 전체 수에 따라 너희 가운데서 스무 살이 넘어 계수된 자들 즉 내게 불평한 자들이 쓰러지며”(민 14:28~29 흠정역). 그것은 심각한 심판이었습니다. 주님은 좋은 땅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세대를 허락하는 것 보다 오히려 새로운 세대를 일으키시기로 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저항세대가 죽기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며 다니는 것이 피할 수 없었습니다.

 

불평 없이 봉사하기

 

여호수아는 이때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지도자로서 하나님과 모세와 함께 굳건히 섰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메뚜기가 되고 그들의 목적을 잃어버렸을 동안 여호수아와 갈렙은 꿋꿋이 섰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주님 편이었고, 하나님과 함께 서 있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그들의 섬김의 목표가 되었고 보았던 비전을 단단히 붙잡았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그 땅 안으로 기꺼이 데려가려는 준비를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이 광야에서 떠돌아다닌 모든 시간 동안 모세를 수행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그가 나타나게 될 만큼 되는 것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여호수아를 위해 가장 어려운 공과이어야만 했습니다. 만일 우리 중의 하나였더라면 불평 없이 그것을 할 수 있었을까요? 모세처럼 나이 들어서 생각했던 여호수아를 생각해 보십시요. “섬기던 사람이 죽을 때 나는 나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 아말렉 백성들은 항상 꼭대기에 어떻게 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합니다. 여호수아가 기꺼이 섬기기를 자원했던 것처럼 우리가 섬길만한 어떠한 사람을 찾으십시요. 여호수아는 배우기를 계속했고 모세가 죽었을 때 여호수아는 일어설 수 있었으며 그는 “우리가 그 땅을 취하러 가자!”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