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강해/여호수아

여호수아 두번째 여행 <서론>

Hernhut 2015. 10. 13. 22:01

전에 한 번 여호수아를 전달했던 적이 있고, 여호수아 여행을 함께 했었다. 이번 여호수아 여행은 우리가 주호촌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많은 성도들이 기도하고 동참해 주기 위해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10주에 걸쳐 전달할 예정이다. 주호촌공동체란 주님께서 보호하시는 마을을 세워 교파, 계급, 신학 없이 그리스도를 섬기고, 성경만을 추구해가는 순수한 복음교회를 말하고, 복음을 전파하러 갈 성도들을 훈련하고, 경건을 훈련하는 마을을 말한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꿈을 꾸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 10주간 전달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동참하고 기도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절실하게 기도하고 소망한다면 그 꿈의 첫 삽을 뜰 수 있지 않을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전국의 형제자매들은 한번쯤 기도해 주고, 생각해 주고, 분발시켜 주길 바란다. 한번 듣고, 한번 읽는 것만으로도 기도가 되고, 실행이 되고, 동참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수세기동안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반복적으로 약속하셨던 언약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스라엘은 기근으로 인해 이집트에 내려가 살았고, 그 후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생활을 하게 된다. 사실 그렇게 많던 야곱의 재산은 기근으로 모두 소비하게 된다. 그러한 처지가 된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전에 이집트 상인들에게 팔았던 요셉으로부터 긍휼을 입는다. 이것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영적인 어떠함이 다 고갈되었음을 말한다. 요셉은 파라오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에서 여전히 영적인 어떠함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산출된 교회요, 한 새사람, 한 인격을 말한다. 오늘날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교회가 존재한다. 사탄은 세상을 압제할 수는 있지만 요셉에게 했던 것처럼 교회를 압제하지 못한다. 요셉이 풍성했다는 것은 교회가 영적인 요소로 풍성하다는 것이다. 요셉은 자신에게 잘못했던 형들에게 긍휼을 베풀었다. 그는 너그러웠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 풍성을 형들에게 나눠줬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로 산출된 한 새사람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그 후 모세에게 이끌려 광야생활로 들어간다. 사실 광야로 가기 전에는 노예로서의 생활이 고된 생활이었기에 그 생활을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 모세를 따라나선 이스라엘사람들은 40년간을 광야에서 고단한 생활을 했다. 배고픔, 목마름도 체험을 했고, 매일 유랑생활로 지침도 경험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전에 경험했던 가나안 땅 목전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만 금송아지에게 절하고 만다. 여기서 오늘날 교회의 실행의 오류를 말하고자 한다. 이스라엘사람들 대부분은 금송아지를 만들기 위해 금을 모으고, 만들고 난 후에는 절을 하고 춤을 추웠다. 많은 종교에서도 전해지는 행위이지만 절하고 춤추는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한 일인 것이다. 교회가 형상을 보면 절하지 않지만 대부분 교회에서 춤을 추는 행위를 금하지 않는다. 찬송을 부르며 춤을 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엄연하게 가증스런 행위임에 틀림없다. 구약성경에서 춤을 춘 것이 종교적 행위였지만 신약교회에서의 춤을 추는 행위는 가증한 것이다. 아무튼 그런 행위를 한 이후 이스라엘사람들 대부분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여호수아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호수아는 그 약속을 수행하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역사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이야기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얻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으로 이길 수 있고, 구원하시는 그분의 생명을 체험할 수 있다. 여호수아의 메시지는 사람의 생명에 격려가 되고, 놀라운 충격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우리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자 하여 여호수아 메시지를 원하는 사람들은 다음 4T를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1) 갈증(목마름Thirsty): 시편기자는 “(고라의 아들들을 위해 악장에게 준 마스길) [하나님]이여, 사슴이 물 시내를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기에 목이 타니 내가 어느 때에 가서 [하나님] 앞에 보이리요?”(42:1-2)라고 기록했다. 고라니나 사슴 등 초식동물들은 물을 자주 찾는다. 물가를 찾아 목마름을 해소한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진실로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들로 비어있는 자신의 혼을 채우려고 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자신 만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빈 공간, 빈 용기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모두 빈 그릇이었다. 나나 여러분 모두가 다 빈 그릇이다. 시편기자는 이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사슴이 목마름을 채우려고 물가로 가는 것을 묘사한다. 그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혼의 목마름을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음을 말했다. 그런 후 그는 내가 언제 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빈 그릇이기에 그 빈 그릇을 다른 것-물질, 성공, 권력, 계급, 지위, 학위, 신학 등-으로 채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찾기에 목이 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외형적인 것에 목말라한다.

 

(2) 고단함(Toil): 우리가 거리에 나가보면 몰(mall) 중심의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mall)에 가면 패스트푸드, 진열된 상품들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패스트푸드점들은 빠르고 쉬운 음식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는 이렇게 쉽고 빠르게 나오는 음식을 선호한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이런 패스트푸드나 진열된 상품을 찾는 것처럼 쉽고 빠르게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효과적인 성경연구는 어려운 일이고, 우리가 많은 것을 이루기 원한다면 가치 있는 일에 부지런함을 요구한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오늘날 많은 교회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성공 기준으로 교회를 바라보고, 세상의 판단으로 교회를 본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나눌 필요가 있다. 진리의 말씀으로 강화하는 것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는 것이다.

 

(3) 시간(Time): 우리는 1분 안에 전자레인지에서 물을 데워 맛있는 인스턴스 커피를 빠르게 타 마실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축복은 대부분 하나님의 귀중한 말씀의 책을 읽고, 계획하고, 경건의 시간을 갖는데서 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축복을 얻기 원한다면 경건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의 귀중한 시간을 가지라.

 

(4) 가르침(Teachableness): 세상은 신학, 이론, 철학 등 사람의 생각으로 가득하다. 세상 사람들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러한 것에 기준을 정하고 있다. 며칠 전 한 목사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는 신학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말을 했다. 신학을 한 사람은 공식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고, 신학을 하지 않은 사람은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말을 했다. 이렇게 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으로 돌아갈 때 이런 것에서 해방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시도록 요청하는 영으로 올 때 극대가 될 것이다. 그분의 진리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를 해방시킨다(17:17; 8:32).


개요

여호수아서는 가나안 땅 정복과 소유를 설명한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잠입과 들어감

(2) 정복

(3) 땅을 소유함과 분할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철저하지는 않지만 그 약속을 이루셨다(4:1-16). 여호수아는 믿음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함을 설명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군사 역사와는 달리 여호수아서의 초점은 주의 군대의 대장, 사령관이다(5:15). 누누이 말했듯이 여호수아의 이름이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를 의미하는 것처럼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개입 때문이었음을 증명한다.

 

역사적인 관점

창세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약속하신 민족으로서 태어났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구출되어 홍해를 건넜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민족을 구속하심을 의미한다. 레위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관점에서 예배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것은 민족의 성화를 의미한다.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은 민족으로서 시험을 받고, 숫자로 기록되었다. 이것은 민족의 통솔과 유랑을 의미한다. 신명기에서 율법은 이스라엘이 땅을 소유할 것이라는 보증으로 점검되고, 되풀이되고, 그 땅 앞에 다다랐다. 이것은 민족을 지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여호수아에서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을 건너 그 땅을 소유했다. 모세가 구출의 상징이라면 여호수아는 승리의 상징이다. 여호수아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요일 5:4).

 

여호수아서의 핵심구절

내가 모세에게 말한 것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을 모든 곳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나니”(1:3) 여호수아 1:3절은 신약성경 에베소서 1:3절과 비교된다. “[하나님] 곧 우리 []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으니 문자적으로 하늘에 속한 곳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하늘에 속한 소유들과 체험들의 영역을 의미한다. 이 하늘에 속한 영역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련이 있다.

 

여호수아서의 핵심내용

여호수아서의 핵심내용은 야훼의 능력으로 그 저항 속에서도 가나안 땅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에베소서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모든 축복을 받지만 우리는 우리의 적에 대한 사실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고(6:12)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 우리 자신을 강하게 해야 한다(6:10-11, 13-18). 그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소유권은 아브라함과의 언약 아래에서 무조건적인 것이었지만 땅에 대한 소유는 믿음과 순종에 달려 있었다. 오늘날 믿음으로 인한 갈등과 정복은 우리가 입지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축복에 대한 체험은 갈등과 충돌 중심에 있는 믿음을 통해 온다.


여호수아서의 주제와 목적

언급한 것처럼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사람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수행하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정복의 역사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400년을 노예로 살았고, 40년을 광야생활을 했다. 그 후 그들은 약속된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일생을 여행을 하고, 유랑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그가 보내어진 곳을 나라로 소유한 적이 없었다. 그는 사라와 그의 가족을 매장하기 위해 막벨라의 밭과 동굴을 구매했을 뿐이다(23:1-20).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된 약속의 유산을 그의 육신의 후손과 영적인 후손들에게 남겨 두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것은 그의 육신적인 후손들이 가나안의 모든 상속을 받게 될 것이고, 영적인 후손들이 하늘에 속한 도시를 포함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축복을 받게 하겠다는 것이었다(15:13, 16, 18, 17:8, 4:12-14, 11:11, 4:1-11). 여호수아서에서 기나긴 예언된 약속이 실제가 되었다.

 

여호수아서의 첫 번째 목적

여호수아서의 첫 번째 목적은 정확하게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15:18, 1:2-6, 21:43-45).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사건은 온갖 종류의 엄청난 역경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선택적인 그분의 특별한 개입을 제시한다.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이스라엘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저항에 직면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저항에 개입하셨다. 그분은 이스라엘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도록 하셨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신 이삭의 태어남과 요새화된 도시들의 땅을 소유한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룸은 하나님의 일이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4:1-25).

 

여호수아서의 두 번째 목적

두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집트에서 그들을 불러내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의 믿음을 통해 그 땅을 소유케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진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탈출하기는 했지만 하나님과 함께 걷는 우리의 삶에 대해 저항하는 적들을 이김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1:5-7, 3:7, 4:1-3).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실패가 불신앙에 의한 것이고, 그들이 구속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지만 광야에서 유랑한 것도 불신앙 때문이었다는 것을 민수기에 대조시킨다.

 

여호수아서의 이름과 저자

구약성경의 모세오경과 다르게 이 책은 눈의 아들이자, 모세의 종 여호수아라는 주된 사람의 특성에서 그 이름이 주어진다. 여호수아가 저자로서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책의 일반적인 핵심은 저자가 대부분의 사건을 목격자였다는 것을 가리킨다. 저자가 그 사건들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자는 경우에 따라서 일인칭을 사용하여 그 사건의 사항들을 그렇게 생생하고 세밀하게 설명하지 못했을 것이다(5:1, 6). 또 다른 근거들이 저자로서 여호수아라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

(1) 탈무드로서 유대전통은 이 책의 저자로서 여호수아를 인정한다(Baba Bathra 14b).

(2) 이 책은 사건들이 일어난 후에 짧게 기록된 듯하다(6:25).

(3) 글의 형식의 일치가 한 저자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떤 부분은 확실하게 제사장 엘르아살이나 그의 아들 비느하스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어야 했던 곳(15:15:13-17, 24:29-31)이 있었지만 일의 대부분은 한 저자가 기록했다는 것이다.

(4) 여호수아 8:32, 24:26절에서 여호수아가 기록했다고 분명하게 말을 했다. 그 증거는 여호수아가 이 책의 저자임을 지지한다.

하지만 모세오경과 다르게 왜 저자의 이름을 달았을까? 하나님으로부터 대()율법을 받고, 이스라엘을 인도한 모세의 계승자이었기에 여호수아는 쉽게 잊힐 수 있었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여호수아와 그의 사역을 주님의 신실한 종, 인도자로 잊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호수아는 그리스도의 특별한 모양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그의 이름과 일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가나안 땅으로 사람들을 데려오는 일을 해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일곱 번째 날의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는 그림과 같다(4:1-16). 여호수아는 이 책 끝부분에서 사람들을 도전시킨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제 {}를 두려워하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기라.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다른 신들을 제거하고 너희는 {}를 섬기라. *만일 {}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나쁘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혹은 너희가 거하고 있는 땅의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너희를 위해 이 날 택하라. 그러나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를 섬기겠노라, 하매”(24:14-15)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이 책 표지에 붙인 두 번째 이유는 여호수아의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여호수아의 본래 이름은 문자적으로 구원을 의미하는 호세아다(13:8, 32:44). 하지만 광야를 유랑하는 모세가 야훼는 구원이시다.”, “구원하시는 야훼를 의미하는 예호수아(호세아)”로 그의 이름을 바꾸었다(13:16). 여호수아는 예호수아(호세아)의 축약형이다. 이것은 정탐꾼들, 사람들, 여호수아에게 대적들을 이기고, 땅을 소유한다는 것이 인간의 기술이나 능력이나 힘보다 야훼의 능력으로 될 것이라는 예언자적인 생각과 삶을 살게 했다. 이 책이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여호수아가 역사 속에서 세상의 가장 큰 군사 전략가였지만 그의 지혜와 전과(戰果)가 우리의 구원이신 유일한 야훼로부터 왔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가져오신 분은 야훼 그분 자신이셨다.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완패시키시고, 그들에게 땅을 소유케 하신 분도 야훼이셨다. 중요한 것은 여호수아라는 헬라어 이름은 지저스Jesus(예수)”로 예수 그분께서 죄로부터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마리아가 지시를 받아 붙여진 이름과 같다(1:21). 여호수아는 사도행전 7:45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불렸다.

 

여호수아의 메시지에 있는 가나안의 위치

(1)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안식의 장소, 휴식의 장소였다. 이집트 땅과 광야에서의 유랑생활 대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민족들의 빛으로서 역할을 해야 할 가나안 땅에서 집을 찾고 그곳에 집을 건축할 수 있어야 했다. 소유하고, 정복한 그 땅은 대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그런 땅에 주님과 휴식을 위하고, 교제하도록 이끌려졌다(6:10-11, 26:6-8).

(2) 가나안은 풍성함의 장소였다. 이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고,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었다(3:8, 17, 13:5, 33:3, 20:24, 13:27). 이곳은 16번이나 젖과 꿀의 땅으로 불렸다. 이곳은 기이하고, 특별한 과일이 나는 땅(13:26-27),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땅, 하늘의 이슬, 비를 흡수한 땅이었다(33:28, 26:5, 11:10-12).

(3) 가나안은 승리의 장소였다. 가나안에는 이스라엘보다 훨씬 강한 대적들과 권력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대적들은 이스라엘이 일격을 가하기도 전에 무너졌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이스라엘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기술이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그들의 하나님 야훼의 힘과 강력으로 된 것이었다(7:2, 9:3, 1:2-3). 전쟁은 항상 주님의 것이다(삼상17:47).

 

여호수아서에 있는 그림들과 체계

우리가 앞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여호수아서는 오늘날 믿는 성도들에게 그려진 풍성의 책이다. 그 그림은 히브리서 3:7-4:12절과 고린도전서 10:6, 11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호수아서는 오늘날 믿는 성도들의 믿음과 안식을 묘사한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대적들과 세상과 그리고 사악함에 의해 직면해 있는 삶의 여러 시련, 유혹, 그리고 고단함을 이기는 믿음을 통해 구원의 축복을 체험한다.

(1)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적절해야 하고 경건으로 우리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구원과 영적인 것을 위해 일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 안에서 휴식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곳은 우리의 휴식의 장소다. 그리스도는 이 삶 속에 있는 우리의 대적에 대해 안식의 근거가 되고, 천년왕국과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는 곳이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영적인 모든 축복을 받았다. 이 축복이 우리의 풍부함이다(1:3).

(3) 세상에서 우리는 대적들과 직면하고 전투를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믿음과 들어감을 통해 승리를 약속받았다.

(4)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우리 구원의 대장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2:10-11, 8:37, 고후 1:10; 2:14).

(5) 요르단강을 건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과 부활하는 것을 고대하고, 성장과 승리의 장소로 이동하는 그들의 그림이다.

(6) 가나안 정복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육체, 마귀들의 대적들과의 충돌을 묘사한다.

(a) 여리고 정복은 우리 영적생활 과정에 벽이 세워진 사탄적 세상 시스템에 대해 승리하는 그림이다.

(b) 아이에서 패퇴시키고 승리를 거둠은 죄의 본질, 죄에 젖어있는 우리의 성향, 우리의 강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하는 것에서 싸우고, 구출되는 것을 묘사한다.

(c) 기브온사람들의 꾸밈과 체험은 사탄과 그의 사악함의 기만과 우리가 전쟁을 하는 것을 묘사한다.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만으로 오는 구원의 필요성을 우리에게 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생명의 완전한 필요성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오, 구원하는 유일한 생명이시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는 그분의 죽으심이 없이, 그분과 그분의 생명 안에서 사는 것 없이는 우리 모두가 그분의 약함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거나 그저 문화적, 사회적, 종교적 기준을 따르는 미스터 나이스 가이 혹은 미스()나이스 레이디가 되려는 사람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진정한(진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짜요, 왜곡시키는 사람들이요, 속이는 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빛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해결책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사람들을 움직이는 사탄이 디자인한 트릭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 빛을 우리에게 비추지 못하도록 한다(고후 4:4). 무엇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인가? 그것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영광스런 생명으로 구출되고, 구원받는다.

 

우리는 절대 우리교회(기독교)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원천은 그리스도시다. 오늘날 목사나 신부나 교황이나 교주는 기독교의 원천이 되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교회(기독교)를 통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교회와 교회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제하심으로 통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재생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서 그분 자신을 재생산하신다. 이것이 교회다.

 

오늘의 공과에서 우리는 여호수아서의 원문에 있는 기본적인 영적 진리와 원칙을 전파할 것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유사점들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세와 모든 대언자들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라.”(24:27)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는데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느니라...*이제 이런 일들이 우리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들이 탐한 것 같이 우리도 악한 것들을 탐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이제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났으며 또 그것들은 세상의 끝을 만난 우리를 훈계하기 위해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4, 6, 11) 여기서 반석이란 그리스도의 임재와 그분의 사역을 말한다.

 

이 구절들은 구약사건들이 고대 이스라엘 민족 속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나타났고, 그 사건들이 역사적인 사건들이었음을 가르쳐준다. 그렇지만 그 사건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실행할 진리와 경고들이 담겨져 있다. 그 사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삶과 아주 밀접한 연결고리가 된다. 고대 이스라엘의 삶이 이집트와 이방인들과 적대적이었고, 저항을 했듯 오늘날의 성도들 역시 세상과 맞부딪혀 있다.

(1) 이집트는 인간의 생각, 우상 숭배, 신비주의, 적의 등 세상을 묘사한다. 이집트는 하나님의 구원, 구출, 목적과 정반대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말한다.

(2) 이집트에 있는 사람들은 사탄의 노예요, 세상의 심부름꾼이요, 육체의 사람이요, 일어버린 사람들을 묘사한다.

(3) 유월절의 어린양과 홍해를 통해 이집트에서 나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하나님의 강력만으로 구출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구속됨을 의미한다.

(4) 아브라함이 창세기 10:11-13절에서 행한 것처럼 이집트로 내려가는 성도들은 세상으로 다시 회귀하는 믿는 이들을 말한다. 그들은 주님께 돌이켜 구출받기보다 오히려 그 대체물과 해결책을 구하는 것이다.

(5)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은 육신적인 성도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놀라운 은혜로 구속받고 축복받았지만 하나님과 관계를 지속해 나가기를 실패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살지 못하고, 최고의 축복의 장소에서 살지 못하고, 거듭되는 패배에 의해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출과 주님을 신뢰하는 것에 실패하기 때문에 수시로 의심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6)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공급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의 소유를 소유하는 믿는 이들을 상징한다. 그것은 교제 안에 있는 믿는 성도들을 묘사하는 것이요, 저항과 대적과 대면하고 있음을 말하지만 주님께 의지하고 말씀의 약속과 원칙 안에서 믿음으로 걸을 때 구원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7) 가나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 사는 우리를 반대하는 성도들의 대적을 의미한다. 우리는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 우리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승리를 감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리고가 세상을, 아간과 아이는 육체나 죄의 본성, 기브온은 사탄의 기만, 세상의 시스템을 묘사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이 공과를 공부하면서 나는 몇 가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스라엘이 성공했던 부분과 실패했던 부분을 주의 깊게 알아보려고 한다.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우리 자신의 생활을 점검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같은 실수를 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여호수아처럼 같은 원칙을 적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있는가? 그 부르심을 우리의 삶에 도전시키고 있는가? 이스라엘의 승리로 크게 기뻐하고 유익을 얻어야 한다. 그들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될 수 있다. 여호수아서 연구가 개인적인 실패를 설명할 것을 것이다. 이 여호수아를 연구하면서 우리의 영적전쟁 가운데 있는 서로를 격려하고 기도하자.


* 주호촌공동체에 동참하기 원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은 연락바랍니다.

주호촌공동체는 농촌에서 도시를 잇는 생명공동체, 복음공동체로 경건훈련과 복음확산을 위한 훈련을 해가며, 복음을 들고 나갈 그리스도인들을 산출해 낼 것입니다.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문의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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