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할 여지 없이 지난 세기의 가장 교활한 속임수였으며, 신뢰하는 남자, 여자, 어린이를 태운 기차에 가해진 사악한 계략이었다. 그것은 2차 세계 대전 중 오슈비에침이라는 폴란드 마을 외곽에서 일어났다. 아돌프 히틀러의 지휘 아래에 그가 인간 이하로 여겼던 사람들을 위한 노예 노동 수용소가 세워졌다. 전쟁이 끝난 후에야 세상은 오늘날 독일 이름인 아우슈비츠로 알려진 그 장소의 모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우슈비츠는 노동 수용소 그 이상이었다. 그곳의 주요 산업은 살인이었다. 아우슈비츠의 단철문을 통과한 사람 중 적어도 백만 명이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 그들 대부분은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자신과 가족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나치가 점령한 유럽 전역에서 모인 유대인 가족들은 붐비는 화물차와 가축차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도착하자마자 모든 신규 이주민은 즉시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한 쪽에는 소수가 갔다. 힘든 노동을 견뎌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들만 있었다. 다른 쪽에는 다른 모든 사람이 갔다. 그들은 몸집이 작은 남자, 여자, 병자, 허약한 사람, 노인, 그리고 강인한 아버지와 헤어지면서 울던 아기와 아이들이었다.
두 그룹 중 더 큰 그룹은 수용소의 다른 장소로 몰려갔고, 그들의 눈은 수수께끼 같은 장면에 머물렀다. 그들 앞에는 단정한 차림새의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작은 오케스트라가 있었고, 그들은 경쾌하고 즐거운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각 소녀는 자신 앞에 있는 음악에 매우 집중하고 있었다. 거의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었고, 지금은 청중이 된 수백 명의 사람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사과의 발표가 있었다. 수용소에 이(곤충)가 들끓었고, 모든 사람은 거주 구역에 들어가기 전에 공동 샤워실에서 소독해야 한다. 옷을 벗으라는 지시를 받은 각 유대인 가족은 옷을 깔끔하게 접어서 다른 개인 소지품과 함께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무해한 살균제를 뿌리면 몇 분 안에 당혹스러움이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 번에 최대 2천 명의 사람들이 알몸으로 언덕에 지어진 크고 낮은 건물의 문을 통해 행진했다. 문 위에는 꽃으로 깔끔하게 테두리를 두른 간판이 있었고, “목욕”이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사람이 들어가자, 문이 닫히고 단단히 잠겼다.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멈췄다.
나치 노동자들이 위에서 통풍구를 통해 설치류를 죽이기 위해 제조된 독극물인 소량의 지클론 B 결정을 떨어뜨렸다. 안에서는 치명적인 청산가스의 증기가 천장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유대인 가족들은 무언가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사람들이 기침을 한 다음 경련성으로 질식하고 구토했다.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고 비명을 지르며 당황한 군중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들어간 봉인된 문을 향해 몰려들었다. 희생자들은 서로를 밀고, 발톱을 세우고, 기어 올라가며 필사적으로 확실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많은 사람이 서로 부딪쳐 콘크리트 바닥에 깔려 재빨리 죽음을 맞이했다. 더 공격적인 사람들에게는 지옥 같은 전투가 더 오래 계속되었다.
23분 후, 모든 투쟁이 멈추고 방은 조용해졌다. 문이 열리고 가스 마스크와 고무장화를 신은 일꾼들이 들어와 뒤틀린 시체 더미를 풀어 근처 소각장으로 옮기는 끔찍한 작업을 시작했다.
마침내 방은 수백 명의 희생자들의 마지막 신체 기능인 구토물, 소변, 대변과 같은 오물을 효율적으로 씻어냈다. 유대인 가족들이 다음 열차에 탈 때 목욕탕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켜야 할 촉박한 일정이 있었다. 또 다른 열차가 곧 도착할 예정이었고, 속이고, 살해하고, 소각할 더 많은 신뢰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대량 학살한 것은 우리에게는 가장 극악무도한 범죄이며, 나치가 희생자들을 가스실로 유인한 사기적 수단은 도덕적인 정신에 그들의 죄를 더욱 혐오스럽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사기와 공포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미래의 장면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사기의 정도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사형수의 상황은 훨씬 더 나빠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아우슈비츠와 달리, 유대인 가족들은 포로의 증오를 알고 가스실 문에 다가가면서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지만, 이 미래의 군중들은 환경이 다가오면서 평화로 가득 찰 것이다. 그들은 곧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되는 기쁨을 기대하며 수년 동안 축하의 노래를 불렀지만, 그들은 완전히 자기기만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아우슈비츠에 있는 사람들과 달리, 끔찍한 고통이 23분 만에 끝난 사람들과 달리, 이들은 훨씬 더 오래 고통받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소각장의 매운 연기는 결국 어두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멈췄다. 그러나 지옥의 연기는 영원히 올라갈 것이다(요한 계시록 14:11).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날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할 것이다. ‘주님, 주님,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습니까? 당신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지 아니하였습니까?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아니하였습니까?’ 그러면 내가 그들에게 선언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마태복음 7:22, 23).
예수님은 분명히 훨씬 더 긴 이야기의 절정만을 보여주셨지만, 이 짧은 부분에서 우리는 다른 비극적인 일을 추론할 수 있다.
첫째, 방금 읽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논쟁이 그들의 마지막 방어라고 안전하게 추정할 수 있다. 그들은 분명히 이미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했다. 이제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생각이 빙빙 돌면서 그들은 주님의 오류를 확신시키려는 마지막 필사적인 시도를 한다.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무엇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그런 논쟁에서 이길 수 있기를 바라게 만들 수 있을까? 순수한 절박함뿐이다. 무엇이든 붙잡으려는 익사하는 사람처럼, 이 당황한 사람들은 변함없는 분의 법령을 비참하게 바꾸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으로 그분의 법령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분은 그들의 구세주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분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날을 기대하며 그분께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라”(마태복음 25:21)고 말씀하실 것을 기대했다. 그들은 사역을 통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권능의 흐름을 체험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기독교의 최첨단에 있었으며, 예언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이라고 생각되는 행위를 했다. 그들이 성경의 일부를 공부하고, 교회에 다니고, 심지어 영적 전쟁에 대한 특별 세미나에 참석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
이제 그들은 그분의 영광에 경탄하며 기쁨에 가득 차 그분이 말씀하실 때 주의 깊게 경청한다. 모든 말씀이 금보다 더 귀중할 것이다. 시간은 멈춘다. 영원함이 시작되었다.
그분의 음성이 침묵을 깨뜨린다. “너는 내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분이 내가 방금 들은 말씀을 정말로 하셨을까? 물론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이분이 나의 주님이자 구세주이시다. “주님, 너무 흥분해서 청력이 나빠졌나 봅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을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다시 말씀하신다. “너는 내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거부당했다.”
“뭐라고요? 아니! 아니! 아니!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저는 당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가족에 속합니다! 저는 당신을 구세주로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수년 동안 교회에 다녔습니다. 주님, 당신은 틀림없이 착각하신 겁니다! 어떻게 오해가 생긴 걸까요! 저는 당신을 믿었습니다! 당신이 저를 들여보내셔야 합니다!”
“너는 내가 한 말과 바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유다를 통해 한 말을 대부분 무시했기 때문에 속았다. 나는 반복해서 이 사실을 미리 경고했다. 나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니라”(마태복음 7:21)라고 말했다. “너는 이 땅 위에 있는 동안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았는데, 이는 네가 나를 진정으로 믿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죄는 너의 행위였다.”
“주님, 주님,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당신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지 아니하였나이까?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이적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너의 예언은 나의 성령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네가 예언한 것의 많은 부분이 나의 말씀과 모순되었다. 네가 동료 거짓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쫓아냈다고 생각한 마귀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는 그들의 죄를 마귀의 탓으로 돌리면서 다루려고 했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 믿음, 거듭남이었다. 네가 행했다고 생각한 이적들은 가짜였다. 너는 네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는 교사들을 모았다. 그들은 거짓 은혜를 선포하여 거룩함 없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너를 오도했다. 너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내가 방금 묘사한 그런 장면이 실제로 일어날까? 마태복음 7:21-23에 예언된 것에 몇 가지 일을 추가했지만, 그럴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예수님 앞에 서게 될 많은 사람은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고, “사역”에 참여했으며,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할 것이다.
현재 스스로 속고 있다면 일찍 발견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지금은 바꿀 시간이 있다. 그러면 너무 늦을 것이다.
“하지만 저는 속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한다. 속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주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속은 사람들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 “속았을 수도 있고, 속았다면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낫다.
그러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믿음 안에”(고린도후서 13:5) 있는지 스스로를 살펴보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읽을 때 시간을 내어 읽어보라. 무엇이 더 중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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