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17
로마서 4:17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두 가지 방식으로 묘사한다.
1.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
2.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로 부르시는 분
많은 주석가는 두 묘사 모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한다고 믿는다. 두 번째 묘사는 분명히 이삭이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씨와 상속자를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것을 언급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첫 번째 설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브리서 11:17–19)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이야기를 고려할 때,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으로 하나님을 신뢰한 아브라함의 체험이라고 썼다. 히브리서의 이 구절들에 비추어 볼 때, 로마서 4:17에서 하나님에 대한 첫 번째 묘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그리면서 하나님을 체험한 것을 가리키는 반면, 두 번째 묘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 하나님을 체험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계시와 적용
하나님에 관한 중대한 체험
바울이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신다고 말한 것은(롬 4:17), 그는 이삭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다고 약속하신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불릴 때,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히브리서 11:17-19). 아브라함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부르시는 분’의 임재 안에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가 되었다(로마서 4:16).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려면 두 가지 체험을 거쳐야 했는데, 하나는 씨(그의 후손)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과 관련된 것이다. 씨앗은 생명의 문제였다. 부활은 그분의 구별의 결과였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았는데,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에 관한 체험이었다. 그는 또한 이삭을 제단에 드리고 다시 영접하였는데, 이것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비유적인 체험이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로마서 4:13). 아브라함이 어떻게 세상을 상속받을 수 있었을까? 이 세상은 하나님이 정죄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과 백성과 나라다. 이 세상을 들여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는데, 그것은 생명과 왕국에 대한 증거였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위해서는 생명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드렸을 때 이스라엘 자손의 나라에 대한 강한 증거를 약속하셨다(창세기 22:16-18).
아브라함은 이삭을,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낳았다. 이삭이 없었다면 야곱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바친 사람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삭을 낳으심으로 생명의 씨를 낳으셨다. 이삭을 드리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강한 간증을 약속하셨다. 둘 다 야곱과 열두 지파를 데려오는 데 필요했다.
생명의 관점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 또는 후손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 나라의 백성이다. 신성한 생명은 결국 우리 안에서 자라서 왕국에 대한 간증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체험,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로 부르시는 분의 체험과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의 체험이 필요하다. 두 경험 모두 필요하며 세상의 상속자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원칙을 형성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로 부르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생명의 씨앗을 가져올 수 없다.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체험 없이는, 왕국에 대한 증언이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의 탄생과 제단
하나님 나라의 증거가 되기 위해서는 죽은 자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믿음으로 받은 생명만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제단으로 대표되는 죽음의 체험이 필요하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측면이 아니라 죽음의 측면과 씨름한다. 우리는 죽임을 당해야 한다(갈라디아서 5:24).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세상에 대해, 돈에 대해, 인간의 동정심에 대해, 우리의 미래에, 우리의 희망과 꿈에 대해, 우리가 신뢰하는 이 땅의 것들에 대해, 종교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사물, 환경에 대해 죽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제단을 통과해야 하고, 죽음의 지위를 받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상속자로서 받은 첫 생애에서 왕국에 대한 간증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체험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을 때, 그는 정말로 그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창세기 22:10). 이것은 믿고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얻어 큰 민족이 될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그를 부르셨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에게 약속의 아들을 바치라고 하실 수 있었는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고, 이삭은 아버지에게 순종했다. 이삭이 번제물을 태울 나무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따라 산으로 올라갈 때에 아버지에게 “그런데 불과 나무는 있으나 번제물을 바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요?”라고 묻는다(창세기 22:7). 아브라함은 그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네가 아니냐?’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내 아들아, 번제물로 어린양을 하나님이 마련하시리라”이었다(창세기 22:8).
그들이 산에 이르렀을 때,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정리했다. 그런 다음 약속대로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위에 눕혔다.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들고 아들을 죽이려 했다”(창세기 22:9, 10). 마지막 순간에야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하여 희생 제물로 바칠 숫양을 주셨다. 이것은 놀라운 이야기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상속자가 그러한 죽음의 체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을 유업으로 받을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산출된 생명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탄생한 나라임을 알아야 한다. 생명은 하나이고, 왕국은 또 다른 것이다. 생명은 상속자를 낳고, 왕국은 증거를 낳는다. 세상의 유산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포함한다. 생명이 없으면 세상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하나님 나라가 없이는 세상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세상을 유업으로 받으려면 생명의 상속자가 되어야 하며, 그런 다음 왕국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거를 산출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단 위에 번제물로 드려야 한다. 우리는 생명의 체험뿐만 아니라 죽음의 체험도 해야 한다. 왕국에 대한 간증은 죽음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려면 믿음의 문제인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세상의 기업으로 완전히 인도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제단을 통과하여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이 체험은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증거를 나타냄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체험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 태어나고 하나님의 증거가 되기 위해 죽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생명과 죽음의 체험을 통해 칭의의 실재가 드러나고 우리는 세상을 상속받을 수 있을 것이다.
칭의의 실재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하나는 생명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생명이 없다면, 칭의는 우리에게 체험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일 뿐이다. 죽음이 없다면, 칭의는 우리 안에 실재하거나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생명은 많지만 죽음은 많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로 부르시는 분’으로 많이 체험하지만,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체험은 많지 않다. 그러나 죽음은 선호가 아니라 필수다. 오늘날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은 기꺼이 고난을 통과하고 제단 위에서 죽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의 유산은 생명과 죽음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생명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죽음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건강한 삶을 살게 하고, 건강한 노동을 하며, 왕국에 대한 간증을 실천하게 한다.
칭의의 가치
칭의의 결과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신 약속인 세상을 상속하겠다는 약속에 우리를 포함시키는 것이다(로마서 4:13).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지위에 있으면서 세상을 유업으로 받지 못했다면 하나님은 아직 만족하지 않으신다. 칭의의 가치는 우리가 세상을 상속받는 데 있으며, 하나님은 그것이 성취될 때에만 만족하실 것이다. 세상을 상속받으려면 생명뿐만 아니라 죽음도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는가?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로 부르시는 것’ 뿐만 아니라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겠다는 약속은 삶과 죽음을 체험한 결과였다. 칭의에 대한 우리의 체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나라의 나타남은 생명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죽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잘 사느냐에 달려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많이 죽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생명을 주시고, 이 삶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우리를 세상의 상속자로 삼으신 것을 분명히 찬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주님, 저는 제단에 가서 죽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고 체험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일하셔서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게 하시고, 우리가 세상을 기업으로 가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칭의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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