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새벽이슬처럼

돌들

Hernhut 2019. 4. 7. 22:19

주님께서 뿌리시는 것이 자라기 시작하면 돌이 있는 지역으로 곧바로 자라 나간다. 이것은 우리가 대비해야 할 두 번째 일이다. 대개 커다란 돌들은 아니지만 조그마한 돌들이 많이 섞여있다. 우리 안에서 생명이 자랄 때마다 이 작은 돌들이 우리를 만져 혼란스럽게 한다. 생명이 자라는 대신 커 보이는 것은 돌이다. 있을 줄 몰랐던 바위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해 크기가 얼마가 됐든 간에 생명을 자라게 할 것이다. 바위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갈등을 빚는다.

우상들은 생명이 없다. 그러므로 우상들은 관심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고, 우상들과 갈등을 겪을 일도 없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관심으로 가득하시다. 그분은 목적이 있으시고, 많은 것을 이루시기 원하신다. 우리 안에 있는 바위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절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우상들이 바위들로 불리는 이유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어떤 것을 뿌리실 때마다 우리 바위 중 하나를 만난다. 그 바위가 작더라도 갈등이 있다.

나는 교회문제에 관한 한 아주 많은 방법으로 좋은 토양이었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갑자기 그들은 의문, 논쟁, 그리고 변명으로 가득해졌다. 다른 것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관심과 동등하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교회의 몸 생활을 할 때 커다란 갈등을 겪는다.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성장이 멈췄다. 우리의 관심이 주님의 관심에 동의하지 않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바위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원하고 주장할 때 우리 안으로 뿌려진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런 고집은 여러 논쟁으로 우리를 골치 아프게 한다.

우리가 돌이 섞인 마음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이 합당해 보이더라도 우리는 좋은 마음이 아니다. 우리가 돌이 섞이지 않는 마음이라면 모든 것이 아주 합당하지 않을 수 있지만 결국 주님은 합당해지도록 우리를 조절하실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관심을 보호하고 있지 않다면 주님은 우리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방법을 찾으실 것이다.

한번은 교회에 있었다. 교회에 모인 인도하는 이들과 시중드는 이들까지도 자기들의 관심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합당한 말씀을 인용했기에 합당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내심은 불순함으로 가득했었다. 그들은 큰일에 대한 그들의 꿈에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성도들에 대한 꿈이 아니었다. 몸 생활에 관한 꿈은 아니었다. 한 젊은 형제가 이런 교회의 상태를 모르고 그가 학교를 다니기 위해 가까운 그 교회에 등록을 했다. 왠지 모르게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는 내내 이 젊은 형제는 여전히 순수함을 유지했다. 그가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는 아는 이는 주님과 그 젊은 형제뿐이다. 그가 졸업한 후 본래 다니던 교회로 돌아가 그 교회를 섬기려고 그의 갈망을 표현했다. 그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가 체험한 것이 이기적인 불순함이었던 것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의 관심을 지키기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그를 지키고, 그 안에서 자랄 수 있게 하셨다. 이 형제는 여전히 나에게 격려가 된다.

결혼한 지 30년이나 된 또 다른 중년부부가 있다. 현대 생활에서 이런 생활을 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많은 결혼이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진다. 어떻게 그렇게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들 둘 다 자기 관심이 없다. 남편은 아내를 위한 것이요, 아내는 남편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둘 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신실하게 30년 동안 함께 주님을 봉사하는 것이 그들의 비결이다. 그들 가족이 아주 잘 유지되고, 아주 많은 주님의 축복을 받는 이유가 그들에게 각자의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다. 주님은 이와 같은 하나 됨을 갈망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과 하나 되기를 갈망하신다. 주님께서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을 갈망하시는 것은 우리 상태, 환경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우리 안으로 계속해서 뿌리시는 이유다. 그분은 우리가 일들로 이미 채워져 있고, 세상을 사랑하고, 우리가 해야 한다는 생각하는 것을 계속 할 것이라는 것을 아시지만 그분은 계속해서 뿌리신다. 그분은 가끔씩 그분의 임재 안에서 어떠한 시간을 보냄에 따라 우리가 분주함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바위를 들어낼 것이라는 것을 아신다. 그러면 종자는 변활 것이다.

주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관심으로 산다는 것이요, 우리의 온 존재가 그분의 관심에 대한 것이다. 주님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이 될 때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아주 많은 것을 하실 수 있다. 주님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이 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뿌리시는 것이 무엇이든지 머잖아 돌을 만날 것이요, 항상 안에서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주님은 한 가지 일을 원하시고, 우리는 또 다른 것을 원한다. 우리가 주님의 관심을 포기하거나 그분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나에게서 배우라. 내가 바위들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지만 나의 관심과 주님의 갈등이 있을 때 나는 주님께 말한다.

저는 주님이 나의 구세주이신 것이 행복합니다. 당신은 저를 지배해 주소서. 제가 당신을 지배한다면 당신께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요!

주님께서 그분의 방법을 갖도록 하시니 얼마나 기쁜지!

 

 


'빵과 음료 > 새벽이슬처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토양  (0) 2019.04.13
가시들  (0) 2019.04.10
분주함  (0) 2019.04.01
종자를 성실하게 뿌리는 분  (0) 2019.03.30
우리 마음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종자가 뿌려짐  (0) 2019.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