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헌신케 하신 것에 전적이었다. 그는 이 거룩한 헌신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가장 극심한 환경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를 사로잡아 가둔 사악한 사역자들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전파되었던 것조차도 기뻐할 수 있었다(빌 1:16, 18, 3:2).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절대 그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앙갚음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도 그는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을 더 폭로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유대인화 된 이들은 바울이 다니는 모든 도시에까지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그들은 바울이 일으킨 모든 교회에 사람들의 법령과 문젯거리를 더하여 그리스도를 가르쳤다. 그들은 자신의 야망, 불순, 그리고 비정상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오는 시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빌 1:15, 17, 갈 1:7). 바울이 감옥에 있었을 때 한 교회는 안식일에 관심을 갖고 모였고, 다른 교회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말로 유대인화 된 이들은 복음으로 수고한 바울의 모든 것을 손상시키려고 했다. 그들의 뜻은 은혜의 복음이 영향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막 7:13).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러면 무엇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치레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나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참으로 기뻐하리라.”(빌 1:18)고 말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선포되고 있는 한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이행되었다.
이와 같은 웅장함은 주님의 참된 종의 표이다. 하지만 그의 웅장함은 아량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기꺼이 교회들이나 진리에 희생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의미와 상관없이 성령의 사역을 기뻐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유대인화 된 이들의 전파가 주님께서 그에게 헌신케 하신 것을 방해하고 있었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시기 갈망했다. 그래서 그는 삶의 과정에서 분명하게 고통을 받았다.
기쁨의 능력은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높은 미덕이다. 기쁨의 능력은 심리적인 것도 아니요, 정신적인 것도, 감정적인 것도 아니요, 의지적인 것도 아니다. 또 단지 일을 견디는 것을 기뻐하는 능력도 아니다. 참된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의 누림에서만 온다. 은혜가 있을 때 주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의 달콤함과 평안을 누린다. 기쁨은 자연스런 결과다. 불안과 극단적인 상황이 일어날 수 있고, 격려하고, 기뻐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런 상황과 관계없이 꿈쩍하지 않고 그분께 헌신하고, 그분의 은혜를 누려야 한다. 바울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누렸고, 그리스도는 전파되었다. 그래서 그는 기뻐했다. 이것이 그가 살기로 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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