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새벽이슬처럼

집교회

Hernhut 2016. 3. 29. 11:19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의 협력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인사하라......또한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인사하라. 내가 매우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가야에서 그리스도께 첫 열매가 된 자니라.” (16:3, 5)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자기 집에 있는 교회와 함께 주 안에서 너희에게 많이 문안하느니라.”(고전 16:19)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4:15)

우리가 사랑하는 압비아와 우리의 동료 군사 아깁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1:2)

 

아마 이 부록의 제목이 본문과 같은 교회였다면 이 책을 읽는데 흥미를 떨어뜨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목을 내가 알고 있는 작은 교회를 소개하려고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 지역교회는 가정에서 삼삼오오 모이는 모임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본래 사도행전에서 시작할 때 120명이나 모인 중소(中小)교회였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나는 가르치고, 교제하기 위해 거주지의 몇몇 가정에서 모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회중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사도들이 성전(구약에 쓰던 곳)에서 날마다 그리스도로 예수님을 가르치고 전파했을지라도 성도들은 모든 집에서 그분을 가르치고 전파했다(2:46, 5:42). 이런 형태의 교회는 오늘날의 교회와 전반적으로 다르다.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모든 때에 내가 어떤 방식으로 너희와 함께 지냈는지 너희가 알거니와.......너희에게 유익한 것은 어떤 것도 숨기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보여 주며 공중 앞에서 또 집에서 집으로 다니며 너희를 가르치고”(20:18, 20) 사도바울은 아시아에 들어 온 첫날부터 아시아에 있는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을 가르치기 위해 대중 앞에서와 각 성도들의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동하며 모였다.

성경에서 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오이코스oikos. 이 단어는 한 지역에 지정된 주택이나 가정을 의미한다. 교회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클레시아ekklesia. 이 엑클레시아ekklesia는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는 믿는 이들을 가리켜 신약성경에서 여러 번 사용되었다(16:18, 5:27, 29, 1:24). 그렇지만 종종 교회라는 말은 믿는 이들의 지역회중을 말하는데 쓰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정에서 모이는 회중들의 숫자가 증가했기 때문에 그들 중 많은 무리들은 가정회중들이 연합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고, 이와 같은 집을 떠나 더 큰 거처에서 모였고, 오늘날 지역교회로 간주되는 발전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적인 교리의 관점을 넘어 더 큰 "지역교회들"이 이제 분열되고, 오늘날 존재하는 여러 "교파들"이 되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 교파들은 신구약성경이 성령으로 움직여진 경건한 사람들을 통해 시간을 넘어 주어진 신성한 기록으로 믿는다(벧후 1:21). 그들은 성경이 모순되지 않고, 한결 같다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들 자신들의 독특한 교파가 세운 교리에 동의하는 것뿐이요, 그들의 승인된 신학이 교리로 인정한 것을 따를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사고방식이 어느 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면 성경에서 가르쳐진 진리에 개인적으로 이르도록 성도들에 대한 예방접종하기를 격려한다.

성도들은 흩어져 있는 복음적인 여러 지역교회에 출석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몇백, 몇 천, 심지어 몇 만 명씩 모이는 그런 곳이 아닌 보다 작고, 진리적이고 체계적인 교리를 설명하는 교회를 찾아 출석해야 한다. 교회에 출석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께로 오도록 초대에 이어서 복음의 메시지를 듣게 된다. 이것은 교회(모든 그리스도인)의 복음적인 면에 특히나 적용된다. 교회에서 목사들의 첫 번째 책임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적인 교리에 대해 가르치는 자들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더러는 사도로 더러는 대언자로 더러는 복음 전도자로 더러는 목사 겸 교사로 주셨으니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들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속이려 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간교한 술수로 말미암아 교리의 모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4:11-15)

에베소서 4:11절에 있는 목사들과 교사들은 두 직무가 아니라 한 직무를 말한다. 어떤 사본에는 목사들과 교사들로 번역되어 있지만 더 정확한 사본에는 목사-교사들로 번역되어 있다. 이것은 헬라 원문에서도 볼 수 있는 표현이다. 두 명사 사이에 카이kai와 같은 형태로 보았다. 첫 번째 명사 앞에 정관사가 붙어있고, 두 번째 명사에는 더 이상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사라는 두 번째 명사 디다스칼로스didaskalos는 목사, 청지기, 목자, 목양자라는 첫 번째 명사에 대한 추가적 설명이라고 보았다. 목사는 교사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양무리 목자는 양무리 교사다. 목사는 선포된 말씀을 통해 양떼를 이끄는 자이다. 교회에서 목사라고 부르든 교사라고 부르든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고 말씀하셨다. 사도바울도 공중 앞에서와 집에서 집으로 다니며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것을 가르쳤다(20:20, 24-25, 27). 또 디모데에게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을 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곧 친히 나타나실 때에 자신의 왕국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때가 이르리니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 두고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리라.”(딤후 3:16-4:4)

그렇지만 교회의 하락과 타락은 그리스도인 교파와 지역교회의 다양한 숫자로 나타났다. 지난 2,000년 넘게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된 학생에게 놀랍지 않은 것이지만 특히 성경적인 대언의 학생들에게는 놀라운 것이 되어야 한다. 구약성경을 포함한 신약성경의 여러 경고들, 요한계시록 2-3장에 있는 예언은 오늘날 제도 곳곳에 존재하는 교회사를 나타낸다. 에베소교회의 처음사랑을 잃은 것을 시작하여 형편없고, 비참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라오디게아교회로 끝난다(2:4, 3:17). 오늘날 기독교 설교단에서 깊은 교리적인 가르침에 대한 부재가 오늘날 이 땅에 존재하는 디자인된 메가처치(대형교회)”, 더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로 성장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 중의 하나다. 이런 지역교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선데이스쿨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설교하고 선포하는데 거의 한 시간이 넘지 않는다. 가르침은 간행물과 각 교회의 특정 교파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니골라교리가 등장한 것이다(2:15). 니골라교리는 초기 교회사부터 등장했던 것이고 오늘날의 교회에도 여전히 퍼져있는 교리다. 에베소교회에게 경고를 한 이후 니골라당, 니골라사람들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 용어는 헬라어 니콜라이테스nikolaites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의 승리자를 뜻하는 여신 니키nike와 사람들을 뜻하는 라오스laos의 앵글로색슨식 합성어다. 그러므로 니콜라당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사에서 에베소교회에 나타난 니골라당이라고 알려진 무리가 기록되지 않는다. 버가모교회에도 니골라당이 기록되어 있지만 역시 개인이 알려져 있지 않다. 주님께서 이런 단어를 사용하신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가 있다. 니골라당이 행한 것들이나 말한 것이나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단어의 의미로 보면 니골라당에 대한 말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위에서 다스리는 계급형태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사람들은 1세기 말에 에베소와 버가모에 머물러 있으면서 적어도 어떤 부분에서 책임 있는 사람들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다른 다섯 교회에 언급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있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슬프게도 니골라당의 교리는 로마천주교의 화려하게 장식되고 아주 거룩해 보이게 하는 계층이 나타났고,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또한 어떤 진보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파에 의해서 어떤 것이 반사되고 있는 계층이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복음적인 교파와 지역교회에서도 니골라 교리의 어떤 것에 대해 동의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의 교파나 지역교회는 감독, 목사, 장로, 집사, 또 다른 지휘계통을 세우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과도한 존경과 복종을 요구한다. 그것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단한 음식을 갈망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런 진리의 말씀을 찾기란 그리 녹녹치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뜻을 같이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접촉하기를 애쓰고, 자신들의 거주지 중 한곳에서 가정집 교회를 세우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진리의 말씀을 신실하게 믿기를 원한다. 이렇게 하려는 것은 그렇게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의 유익을 줄 것이다. 이러한 일은 위계질서의 자유로운 환경에서 교회생활을 하게 된다. 많은 지역교회에 출석하게 되면 많은 것들로 제한을 받는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휘계통들이 과도한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가정집교회는 지휘계통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다만 가정집교회에 참가하는 형제자매들이 서로 교제와 친교와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도모하는 환경이 된다. 진리에 대한 효과적인 동화(同化)되도록 하는 속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심도 있게 연구하게 되며, 영적성장과 궁극적 성숙을 도모하는 환경이 된다. 이런 것들이 큰 장점이다.

복음적인 많은 지역교회 목사들은 모임에 잃어버린 어떤 사람을 오게 하려고 구원의 계획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설교는 너무나 자주 영원한 구원을 강조한다. 영원한 구원의 메시지가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교회는 혼의 구원을 더 강조해야 교회가 건강해지고 거룩한 주의 무리가 되는 것이다. 교회가 영원한 구원을 많이 말하면 그만큼 많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사람의 교리로 바뀌게 하는 것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지역교회들은 이런 사람의 교리에 빠져있다. 우리가 거룩한 그리스도의 무리요, 제자들이라면 우리의 생각, 우리의 교리, 우리의 이론을 버려야 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교회를 썩게 하는 누룩들이다. 오늘날 많은 지역교회, 교파들은 많은 사람의 생각과 이론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교회가 미지근한 교회로 만들어 가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따라가게 되어 있다.

집교회 예배의 주된 목적은 주일(the day of Lord), 또 한 주간 중 한 날 정도를 정해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영적인 성숙함으로 장성하도록 하는데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지역교회들은 성숙한 그리스도인,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이것이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을 지역교회 안에서 찾기 어려운 이유다.

사실 그리스도께 잃은 자를 얻으시게 하는 것은 지역교회에 참여하는 그 목사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거룩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다. 성경에 의하면 이것은 언행의 일치로 이뤄진다. 행함이 없는 말씀은 효력이 없다. 의로운 생명은 말씀을 따라 산출된다(2:6, 살전 2:12, 4:1, 1:27, 4:1-3). 그리스도인들의 사역이 효력이 있으려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이것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유일한 방법이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효과적으로 쓰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침 받았고, 성령께서 영원히 내주하신다(고후 1:22,1:13-14, 4:5). 하지만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영적인 능력을 갖는 것이다. 성령님은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이루시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신성한 일을 행하실 수 있으시다. 성령 충만은 사도바울이 에베소서에 말한 것에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었다(5:18-20).

그럼 어떻게 성령 충만 받을 수 있을까? 그 해답은 골로새서 3:16-17절에 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계속적으로 가르치는데 선용한다면 성령 충만함만으로 충분하다. 영적인 미성숙에서 영적 성숙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전달하기 위한 또 다른 중요한 단어는 성화. 성화로 번역된 헬라어는 하기아조hagiazo. “하기아조hagiazo는 구별되는 것, 거룩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하기아조hagiazo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요구되는데 이 요구된 성화과정을 대표하여 사용되었다(살전 4:3a). 하기아조hagiazo는 거듭난 어린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고, 영적 미성숙에서 영적성숙의 증가 단계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요, 대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성화를 체험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흠뻑 적시는 것이다(17:14, 17, 4:11-14, 1:9-11, 딤전 4:12, 13, 15-16, 딤후 2:15, 3:14-17, 벧후 3:14, 18a).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위한 중요한 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연구하고, 흡수하도록 주어졌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는 영적성장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런 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을 그분께로 데려오게 되는 것이다. 집교회 목사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위치로 이끌어야 할 중요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돌봄 아래에 있는 사역은 엄청난 책임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의 중심적인 사역은 구원받은 성도들, 영적진리를 이해하고 꽉 움켜잡을 수 있는 성도들 가운데 있다. 그는 과거의 구원방면의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구원방면과 관계있는 것으로서 각 성도들에게 영적인 진리를 널피 알리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하나님의 양들을 먹이는 것이다(벧전 5:2-4). 이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이끄심 아래에서 합당한 영적인 영양을 공급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돌봄 아래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양떼를 먹일 때에 그가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양떼를 맡는 사역자로서 그는 성령의 이끄심 아래에서 말씀을 자세히 풀어주는 위치에 있다. 그의 돌봄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은 사람의 영 안으로 선포된 말씀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령은 이 주입된 말씀을 취하실 수 있고, 영적인 성장이 되게 하시며, 결국에는 혼의 구원에 이르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1:21). 오늘날 그리스도인 무리에게 있는 비극은 교회의 목사들이 자신들의 사역의 목적에만 충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돌봄에 맡겨진 양떼를 합당하게 먹이지 못하는 목사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헤아릴 수 없는 육욕적이고 미성숙하게 하고, 영은 구속을 받고, 변화된 몸으로 살게 되었지만 헛되고 구속받지 못한 혼, 몰수를 받은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영원한 구원은 여전히 바뀌지 않지만 그들의 혼은 몰수되고, 잃을 것이다. 그들은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면 오늘날 하늘에 예비된 상속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벧전 1:4). 따라서 그들은 영광으로 나타나게 될 많은 아들들 가운데 차지할 위치가 없을 것이다(2:10). 하지만 지역교회의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 중요한 책임을 망각하고 현실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집교회를 건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빠지기를 강하게 명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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