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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왜 가야 하는가?

Hernhut 2016. 1. 14. 12:07

교회에 나가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가?

 

근래에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욕하기도 하고, 교회에 대해 혐오를 느끼는 사람들이 확산되고 있다. 왜 그렇게 교회에 나가는 것을 싫어할까? 그것은 사실 욕을 먹이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만 교회를 나가지 않고 인터넷이나 TV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가나안 교인, 비사이드 뱁티스트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것은 농담 이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교인으로 전락해 오더니 이젠 옆에 있는 교회에 시즌교인으로 나가는 것조차도 거절하는 시대가 왔다. 그들은 전형적인 설교보다도 숲 속을 걸으면 휴식을 취하는 것이 더 얻을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에 나도 식구들로부터 그런 요구를 많이 받았다. “왜 유별나게 예수를 믿는가? 적당히 믿고 가끔 교회에 나가라.”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그럼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떠나 살 수 있는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고립지역에서 일하고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돌보시기에 충분하시다. 그들이 교회에 갈 수 없다면 그들은 하늘에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고립지역에서 기술적으로 살 가능성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찾아야 한다. 많은 이교도들은 조상과 결부시켜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에 못나가게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가 헌금을 강요한다거나 성적문란 등으로 가정이 손상을 입고 극단에는 가정해체를 운운하며 교회에 참여하는 것을 막아선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우리는 먼저 교회의 기능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를 모를 때 이교도들이나 교회에 나가는 것을 막는 사람들에게 흔들리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부름 받았다(고전 1:9). 하지만 요한일서 1:3절은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에 들어간다고 분명하게 언급한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교회 지체들과 비교회 지체들로 절대 나누지 않는다. 시종일관 모든 성도들이 그들 지역의 회중에 참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성경에는 우주적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샘플들이 없지만 지역교회와 연결되는 샘플들은 많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있든 신약성경 안에서 서로의 범위 내에 있고, 서로 만나게 된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 있는 마을에 갈 때 거기엔 그리스도인들이 없었다. 그는 소수의 회심자들을 얻었고, 즉시 그들을 소그룹을 세우고, 작은 교회를 조직했다.

 

사도행전 20:7절은 초기 교회의 실행들을 계시한다. 주의 첫날에 제자들이 빵을 떼려고 함께 오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려고 준비한 채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계속해서 한밤중까지 말을 하니라.” 각지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한 주의 첫날에 모이는 것이 그들의 생활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곳에서 정기적으로 모였다. 각지 교회에 모이는 것이 우주적인 교회, 전 세계적인 교회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우리는 여러분의 지리학적 지역에 존재하는 우주적인 교회로 모이고, 중앙의 통제를 받는 것을 거절한다. 현시대에 여러분이 차가 있고, KTX가 있고, 비행기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요즘은 모니터와 인터넷으로 실황중계도 한다. 우리는 이것도 거절한다. 그런 것은 모두 고물상에나 갖다 주라. 자신이 사는 각지에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교회가 있다면 그곳에 나가라. 교회는 많은 목적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우리에게 어떤 개인적인 환경과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교회에 나가는데 장애물들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장벽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야한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고립되어 살 때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1. 영적인 선물(은사)을 활용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2장은 그것을 확실하게 밝힌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인 은사를 주셨다. 여기에 나와 있는 은사들 중 오늘날 사라진 것들도 있지만 여전히 활력화되고 있는 것들이 있다. 7절은 분명하게 말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신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능력들은 여러분이 좋은 느낌을 갖도록 공급하신 것이 아니다. 이 은사들은 사역을 하게 하는 능력들이다. 이 은사들은 공적인 유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베드로전서 4:10절은 서로를 돕기 위해 영적인 은사를 활용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 왜 베드로는 우리에게 그러한 명령을 했을까?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은사를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렇게 사용하게 될 때 교회는 손상을 입는다. 교회가 어려워지고 결국 교회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를 강화하는데 그들의 은사를 활용하도록 그들을 만난다. 우리 또한 다른 형제들을 강화하도록 우리의 은사를 활용한다. 복음을 전파자와 교사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사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아무도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가든지 교회가 그들에게 가든지 해야 한다.

 

 

2. 상호적 사역

교회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한 몸으로 그려졌다. 바울은 몸의 각 부분이 몸의 다른 부분의 필요를 채우려고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다른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도록 하신다. 교회 안에 약한 지체들이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우리의 능력을 활용해 돕도록 하신다. 고린도전서 12:21절은 이렇게 하도록 전달하고 있다. 눈이 손에게 이르기를,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하지 못하며 또 머리가 발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리스도인은 오늘날 스스로 살아나갈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신약성경은 서로로 가득하다. 우리는 서로 위로하고(살전 4:18), 서로 건축하고(살전 5:11), 서로에게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5:16), 그 외의 많은 것들을 서로 하도록 명령 받았다. 우리가 믿는 성도들로부터 떠나 있다면 우리는 이런 지시에 순종할 수 있을까?

 

3. 책임

하나님은 영적인 지도자들이 양을 이끄는 목자로서 우리의 안전을 위해 경계할 수 있는 곳으로서 교회를 디자인하셨다(벧전 5:1-4, 13:17). 그분 자신께만 답하는 그리스도인은 죄와 행동을 쉽게 합리화할 수 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자주 접촉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경계해 줌으로서 악하고 사나운 것에서 지켜 나갈 수 있다.

 

오늘날은 사나운 시대다. 어떻게 하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빼내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교회와 등지게 할 수 있을까 엿보는 사탄과 그의 무리들이 많다. 또 마지막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영적인 생활, 교회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 많은 교회들이 있다. 이 교회들이 그리스도께 합당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교회에 나가게 될 때 그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서 있는 교회인지 경계하라.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모이는 것에만 방점이 찍혀있지 인식하고 경계하는 데는 소홀히 한다. 히브리서 10:23-25절을 읽으면 우리가 추구하는 방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약속하신 분께서 신실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고 *서로를 살펴보아 사랑과 선한 행위에 이르도록 격려하며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우리의 함께 모이는 일을 폐하지 말고 서로 권면하되 그 날이 다가옴을 너희가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