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대한 주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마태복음 16:13-20절에서 교회를 건축하실 때 베드로에 관해 언급 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승천 날부터 딱 6개월이 되어 교회가 산출되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교회의 본질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분의 제자들은 공격적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그 본질과 맞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런 방식으로 교회에 접근하려는 그들은 교회건축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교회의 토대(터)
예수님은 “반석 위에”라는 말씀을 하셨다. 교회는 언젠가 죽는 사람 위에 건축될 수 없다. 그분의 교리 또한 사람의 생각과 이론에 근거하지 않는다. 천주교회는 첫 번째 교황이요, 교황 계승이 지속되도록 함으로서 베드로라고 주장하는데 이 구절을 사용한다. 그들의 주장처럼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마태복음 20:20-21절의 야고보와 요한은 왜 으뜸의 자리를 요청했을까? 그들이 베드로가 교회의 터였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오해했다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우리는 천주교의 주장을 반대한다. 베드로는 “페트로스petros”로 작은 돌을 의미한다. 반면 터는 “페트라petra”로 큰 바위, 기반암(基盤巖)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낯선 자와 외국인이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더불어 동료 시민이요 [하나님]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며 *또 사도들과 대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자들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으뜸 모퉁잇돌이 되시나니”(엡 2:19-20)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교회성도들의 기초가 예수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바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외에 어떠한 지식도 얻기를 거절했다(고전 2:1-2). 바울은 또 이미 기초가 놓였다고 말했다. 이미 놓인 기초가 예수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고전 3:11). 누가는 더 심도 있게 강조해 말하고 있다. “그들이 흔들리지 아니하며 사도들의 교리와 교제 안에 머물고 빵을 떼며 기도하더라.”(행 2:42) 여기의 요점은 교회의 터인 사도들의 가르침이나 교리에 성도들이 머물고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1-2절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신 것에 관해 말한다. “......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자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요 1:18) 교회의 터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오늘날 세상에서의 순종과 교회의 유효성에 매우 중요하다.
교회의 확실성
“내가 나의 교회를 건축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증과 약속과 확신이 담겨 있다(빌 1:6). 그 교회는 무리들에 의해 건축되는 것도 아니요, 방법론과 전략으로 건축되는 것도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건축되는 것이다. 교회는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시다(골 1:13-14, 벧전 2:9). 교회는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시다. 교회는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완벽해질 것이다. 동사의 미래시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 건축에 대한 그분의 최고의 사역을 계속할 것이라는 확실성을 가리킨다. 우리의 목표는 교회건축이 아니지만 말씀에서 요약된 것처럼 우리가 그분의 의지를 따르므로 그분께서 교회를 건축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사역하는 것이다.
교회의 관계
“내가 나의 교회를 건축할 것이니라.” 교회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샀다(행 20:28). 주님과 연합한 성도들은 그분과 한 영이다(고전 6:17).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거룩히 구별된 성도들은 서로 형제들이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히 2:11). 사도행전 9:4절에서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오늘날 당신이 교회에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교회에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손가락질 하는 것이요, 당신이 교회를 욕한다면 그리스도께 욕하는 것이며, 당신이 교회에 무관심하다면 그리스도께 무관심하다는 말이다.
교회의 정체성
“내가 나의 교회를 건축할 것이니라.” 교회가 무엇인가? 신약성경은 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도록 많은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결혼생활을 하는 것으로 비유한다(엡 5:22-27, 32). 아무것도 우리의 충성을 위해 그분과 경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
우리는 그분의 몸과 살과 뼈에 속한 지체들이다(엡 5:30).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은 성령에 의해 한 몸 안으로 모두 침례를 받았고, 한 몸 안으로 들어와 한 영을 마신 자들이다(고전 12:13). 이러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는 그 몸의 지체들이다(고전 12:27). 한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속해 있다. 또 그 모든 지체들은 같은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는 많은 지체들이다. 그리고 개별적으로는 서로가 지체의 기능을 한다(롬 12:4-5).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조직적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기억하라. 우리는 한 몸으로서 교회이기도 하고, 각 지체들로서 개별적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오, 몸의 머리시다. 그분은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로부터 처음 나신 분이시다. 그분은 모든 것의 으뜸이 되신다(골 1:18, 24). 그분은 그분의 발아래에 모든 것들을 굴복케 하셨고, 교회를 위해 모든 것들의 머리가 되셨다(엡 1:22-23). 성도들의 은사와 그 기능은 서로를 완전하게 하고, 섬기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성도들이 한 믿음을 갖게 되고, 그리스도를 아는데 하나가 되며, 그로 인해 완전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가득 채우는 데까지 자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성도들은 교회에 들어와 유혹하는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계, 술수 등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굳게 설 수 있는 것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사랑함으로 서로에게 진리를 말하고, 세상의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해야 한다. 이 말은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성도들이 행하는 것은 각각의 은사와 기능을 적절하게 행함으로 자신을 건축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건축하는 것이 된다(엡 4:12-16). 그리스도의 몸은 연합과 결합관계의 그림이다.
진리의 기둥과 지지대
하나님의 집 즉 교회는 살아있고, 진리의 터요, 기둥이요, 지지대다(딤전 3:15). 디모데는 크고, 어려운 에베소교회의 장로요, 목사였다. 바울은 교회 안에 어떤 거짓교사들로 인해 문젯거리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다. 바울은 교회의 자매들, 장로들, 집사들에 관해 썼을 뿐만 아니라 기도에 관해서도 썼다. 바울을 에베소교회에 가기를 원했지만 시간이 늦춰짐으로 그는 디모데에게 이러한 것을 알려줘야 했다. 오늘날 우리의 세상에서 우리는 교회 안으로 이끌어 오고 있는 세속적인 철학들, 풍속들, 방식들, 습관들, 사상들을 더욱 더 찾게 된다. 어떤 사람은 알려지지 않은 교리나 가르침, 점, 미신에 사로잡혀 그것들의 영향에 굴복하고 그것들이 진리인 양 다른 사람들을 현혹한다(유 1:4). 혼합주의는 그날의 말이 되어가고 있다.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나버렸고, 다른 종교, 다른 민족들과 혼합되었다(호 7:8). 오늘날 많은 교회가 사악함을 저지르고 타락의 길을 가고 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이론, 방식, 사상들을 교회 안으로 들여왔다. 살아있는 것을 버리고 죽음의 것을 추구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 권력을 섬긴다. 구멍 난 그릇, 금이 간 그릇을 만들었다. 이것에는 하나님을 담을 수 없다(렘 2:13).
교회의 무적(無敵)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지옥은 죽음의 장소요, 세상을 떠난 영들의 장소다. 하데스은 70인역(LXX)에서 스올로 사용되었다. 스올은 일반적으로 죽은 자들의 장소를 말한다. 이곳은 의롭거나 의롭지 않은 자를 구별하지 않는 일반적인 죽음, 죽은 자들을 두는 곳을 말한다. 사도행전 2:24, 27, 31절에서도 이 단어를 언급한다. 신약성경 대부분의 경우 하데스가 괴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로운 자들의 죽음을 위해 쓰이는 말은 파라다이스(낙원)과 아브라함의 품이다. 하데스가 나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눅 16:22-23). 하데스는 지옥과 분리된다(계 20:13-14). 하데스를 지옥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오류다(고후 5:8).
그리스도께서 건축하시는 교회는 반대에 부딪칠 것이지만 그리스도는 무덤이 생명의 일, 그리스도께서 하시고 계시는 일을 제압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니라.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5-57) 예수님은 그분께서 부활이시오, 생명이시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들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1:25-26).
그리스도인들의 전쟁은 영적인 것이다.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반대하고 저항한다. 바울은 우리가 육신 안에서 살지만 육체를 따라 전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체가 아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강력으로 적의 요새를 무너뜨린다. 사탄은 짐작과 상상, 꾸며낸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을 높이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강력은 그들의 저항과 술수도 무너뜨릴 수 있다(고후 10:3-5).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의 말씀으로 한결같지 않은 짐작과 상상과 꾸며내는 술수들을 무너뜨림으로 반응해야 한다.
교회의 권위
“내가 하늘의 왕국의 열쇠들을 네게 주리니”
예수님은 베드로를 12명의 제자들 중 책임을 맡은 형제로 말씀하시고 계시다. 그는 땅 위에서 풀고 묶을 권위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짧게 “너희가 누구의 죄들이든지 사면하면 그것들이 사면될 것이요, 누구의 죄들이든지 그대로 두면 그것들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또 교회를 위해 교육하셨다. “또한 만일 네 형제가 네게 범법하거든 가서 너와 그만 따로 있을 때에 그의 허물을 그에게 일러 주라.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었느니라. *그러나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거든 너와 함께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확증하라. *만일 그가 그들의 말 듣기를 무시하거든 교회에 그것을 말하되 그가 교회의 말 듣기를 무시하거든 너는 그를 이교도나 세리같이 여기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묶으면 그것이 하늘에서 묶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그것이 하늘에서 풀리리라.”(마 18:15-18) “묶일 것이라”는 구문은 완료 수동태 과거분사다. 완료시제는 과거에 완료된 미래에도 이어지는 행동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초한다. 우리는 땅 위에서 선포할 권위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선포할 권위는 이미 하늘에서 선포된 권위다. 다시 말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노선에서 벗어나 뉘우치지 않는 형제에게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1-13절에서 그것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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