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 되기(4)

Hernhut 2015. 2. 11. 20:06

 

 

 

영적인 전진

그리스도인의 영적생명은 생명의 한 단계에서부터 다른 단계로 전진하는 끊임없는 분투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집트를 떠나 시내산에 도달할 때까지 전진하고 머물렀다가 또 전진했습니다. 출애굽기의 이 그림은 이 분투의 탁월한 묘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주하기를 원하시고 전 코스를 완주하기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곳에서 멈추기가 정말 쉽고,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위해 가지신 하나님의 목표에 절대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도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전진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거듭남의 미덕으로 하늘로 갈 자격을 이미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이제 우리가 모든 권리를 갖도록 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전진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오래 살든 짧게 살든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조금씩 전진하고 자랄 수 있도록 우리를 부양하십니다.

 

1. 거듭남

첫 번째 역은 거듭남의 역입니다. 하지만 거듭남조차도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구속의 어린 양의 피,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 교회생활, 몸 생활, 그리고 우리 생활과 관련이 있고, 유월절로 묘사되었습니다. 거듭남은 우리의 생활 안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낳았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집트로 대표한 영역에 속해 있지 않고, 우리의 체험이 극히 제한적일지라도 하나님으로 약속된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단계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2. 침례

두 번째 역 침례는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침례에 대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고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침례는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 있는 모든 이들, 우리와 함께 이집트을 탈출하는 모든 이들을 포함합니다. 침례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출애굽은 적어도 200만의 사람들과 4백만의 소, , 그리고 다른 동물들이 가득 찼었습니다. 몹시 시끄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나는 도망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 뒤에서 포위하는 이집트 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에 관해 생각합니다. 그것은 정말 무서웠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힘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 둑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탈출구는 물을 통과하여 하나님에 의해 공급된 마른 땅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침례입니다.

 

3. 담을 넘어라

침례를 통과한 후 우리는 우리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3단계의 벽입니다.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자손이 맞닥뜨린 첫 번째 벽은 술(수르)에서 체험합니다. 이 벽들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에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 벽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해 추구해 나아가려 하는데 있어 불만족입니다.

 

번번하게 이 벽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우리의 관계로 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에 대한 우리 사랑을 이해할 수 없는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자유로웠던 어떤 것들은 더 이상 뻔뻔스럽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 친구들은 베드로가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벧전 4:4)라고 말한 것처럼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결국 우리 친구들은 우리가 그들과 주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돌아갈 수도, 앞으로 나갈 수도 없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벽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교회모임에 참여해 말하는 형제가 말하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완전히 무능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영역에서 봉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을 수 있지만 쉽게 잠에 빠집니다. 이 모든 낙심들이 벽들이 됩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 전역에서 장벽을 맞닥뜨릴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은 우리를 대항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가족, 친척, 친구에서부터 거의 모든 영역에서도 담벼락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드린다면 아무것도 우리를 좌절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좌절시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높은 담벼락은 없습니다. 결국 이런 것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구원받게 됩니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할 때 그분은 온 집안사람들을 축복하실 것입니다(16:31, 34, 고전 7:14).

 

4. 우리의 입맛을 포기하라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우리는 결국 마라로 옵니다. 마라는 물이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물을 마실 때 그 맛이 씁니다. 사실 그 물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 물은 우리의 입맛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 물은 우리의 천연적인 사람에게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 천연적인 사람은 관점, 의견,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입맛입니다. 우리는 길고 하얀 예복을 입고서 합창을 하는 큰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성가대에 참여하지 않고서 찬양하기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르간, 피아노, 기타 연주하기를 좋아합니다. 또 우리는 악기 없이 목소리로만 돕기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입맛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에 맞지 않을 때 그것은 쓴 맛이 납니다. 우리에게 맞는 물을 둘러보고, 선택하기가 너무 쉽습니다. 비록 우리가 어떤 찬양을 선택해야 할지라도 어떤 형제자매들이 기뻐하는 찬양을 선택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반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입맛만이 있어야 합니다.

 

물은 생명에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물맛이 우리 모두가 좋게 여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쓴 물에 나뭇가지를 던졌습니다(15:25). 그 나뭇가지는 십자가를 말합니다. 우리는 주님, 당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든 제가 좋아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신혼부부와 같습니다. 그들은 각자를 기뻐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의 맛을 배워야 합니다. 아내가 나는 당신의 입맛에 관심이 없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요리할거야라고 말을 하면 부드럽지 않은 결혼생활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당신이 어떠하든 나는 늦게 들어 올거야라고 말한다면 그 결혼생활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 각자가 자신들의 맛을 내려놓는 것을 배우고, 서로의 입맛을 취하는 것을 배운다면 그 결혼생활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임신했을 때에도 그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다시 그들의 맛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가족을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맛을 취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면 교회생활에서 그것이 얼마나 더 필요할까요?

 

주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의 맛과 정말 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생활과 같은 하늘에 속한 것들을 위해 맛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의, 믿음, 사랑, 그리고 평강을 추구하는 우리 형제자매들과 함께 있기를 갈망해야 합니다(딤후 2:22).

 

 

 

5. 하나님의 공급을 누려라

이스라엘 자손들과 같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다섯 번째 역은 엘림입니다. 이 엘림에는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이 오아시스에는 12샘과 70()의 대추야자나무가 있었습니다(15:27). 성경은 이 숫자 기록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셀 수 없는 소와 양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더해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숫자는 농담처럼 보입니다. 3만 명씩 한 그루의 나무의 그늘에 나누어져야 했을 때 그 나무는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습니다. 1270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인 숫자만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기록되어야 했었습니다.

 

상징적으로 이 숫자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숫자 12는 하나님(3)과 사람(4)을 곱한 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2는 영원한 완성의 수입니다. 12샘은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4:14)로 사람에게 공급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교회모임과 컨퍼런스에 갈 수도 있고, 성경으로부터 놀라운 말씀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며칠 후 우리가 들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잊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모임에서 받은 그리스도는 우리 여생(餘生)과 영원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증가되셨을 때 우리는 12샘물을 체험합니다.

 

숫자 70은 하나님(3)과 사람(4)을 더하고 시간을 완결하는 수 10을 곱한 숫자입니다. 이 숫자 역시 하나님께서 생명 안에서 우리 모든 필요를 공급하실 것을 보여줍니다. 나는 조지 뮬러의 전기를 읽기를 권고합니다. 그가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필요를 채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가 돌보는 수많은 고아들과 사역자들의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뮬러는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81:10)는 약속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그는 큰 기도를 하는 것을 배웠고, 하나님께서 크신 방법으로 응답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하나님께서 진정 살아 계시다는 것을 그들에게 배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체험에서 우리는 70()의 대추야자 나무를 갖는 방법을 배웁니다.

 

 

 

6. 우리의 수고

하나님은 홍해에서부터 12샘물과 70()의 대추야자 나무에까지 모든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행해야 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것들이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았을 때 불평만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인정받기 위해서 엄마의 요리를 취하는 응석받이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같습니다. 교회를 이끄는 장로들은 영양가가 많은 영적인 음식으로 성도들을 부지런하게 공급하려고 수고하지만 성도들 대부분은 인정받기 위해 이 공급을 취합니다. 그들은 모두 수고할 필요가 없어 합니다. 그들은 감사의 말을 절대 하지 않고, 그 음식이 그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불평이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여섯 번째 역 신광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끄셨을 때(16:1) 전혀 공급하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음식 부족 때문에 그들 모두 죽을 것이라는 그들의 불평은 충분히 정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깃점을 먹기 위해 이집트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들은 그렇습니다. 그들이 인정받기 위해 하나님의 공급을 취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이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나

주님은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16:4)고 하는 모세의 말에 반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하늘에 속한 빵 만나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그 만나를 모아야 했습니다. 그 만나는 하나님에 의한 공급이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으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순종하는지를 보기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만나는 작았습니다. 만나는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16:14), 깟씨와 같은 것(16:31)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먹이기기 위해 모으는데 어떤 일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만나를 모으는 일은 지루하고, 지치게 하는 일이었음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모은 것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만나를 모은 후 그들은 그것을 요리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나는 만나 레시피를 교환하는 여자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만나를 요리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식량을 공급하셨지만 그들은 음식으로 만들기 위해 수고하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루의 양만큼만 모을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벌레가 생기고, 썩어 냄새가 났습니다(16:20). 안식일을 위해서만 이틀 치를 준비하고 모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그리스도인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모든 것으로 우리에게 공급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쓴 물을 달콤하게 만드시고, 우리에게 대추야자 나무와 샘물을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전진해 나갈 때 그분이 여전히 식량을 우리에게 공급하시지만 그분은 우리가 그것을 위해 수고하게 하십니다. 교회모임에 가서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고, “나에게 말씀을 전해 주세요. 내게 전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충분한 식량은 거기에 있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을 줍는 시간을 보내야 하고, 그것을 우리 자신이 요리를 해야 합니다. 어느 날 우리가 영적 양식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게으름이 그 약점입니다.

 

모세는 만나를 모으라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지시했습니다.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16:16) 교회에 아주 어리고 건강치 않아 모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부양을 위해 우리가 수고를 해 열매를 맺어야 하고, 그들을 방문하기 위해 여분의 만나를 모아야 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들을 먹일 수 있는 곳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메추라기

그런 다음 하나님은 보너스로 메추라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전에 그들에게 메추라기에 대해 언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집트에서 즐겼던 고기를 놓쳤다고 많은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들의 식단으로 하늘에 속한 빵, 만나를 먹기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땅에 속한 식욕을 채울 메추라기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메추라기를 먹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었습니다. 메추라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지만 그것은 그들의 주된 식단을 대체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메추라기는 부차적인 것이었고, 만나는 주된 식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것들을 우리게 하셨지만 그들은 우리의 하늘에 속한 빵으로서 그리스도를 절대 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6:51). 우리가 축제들, 소풍, 관광, 스포츠 같은 것을 함께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교회생활을 따뜻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 치구들이나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활동을 제한할 필요는 없지만 절대 교회생활의 중심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소풍교회가 되기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스포츠교회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얻기를 원합니다. 메추라기인 소풍, 스포츠, 축제, 관광 등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보너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요, 그리스도만이 중심입니다. 主護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