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 되기(3)

Hernhut 2015. 2. 7. 13:21

 

 

5. 엘림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 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15:27) 엘림이라는 이름은 야자나무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를 떠난 지 약 15일이 지났었습니다. 그동안 그들은 피곤에 지쳤고, 목이 마른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나 아이들, 노인들, 그리고 환자들은 훨씬 더했겠죠. 그들은 태양열로 무덥고, 따가웠고, 괴로웠으며, 적당히 피하여 쉴 그늘조차 없었기에 낙담을 했던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엘림에 도달해 12샘물과 70() 야자나무를 찾았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와 같은 찾음에 정말 기뻐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2백만이 넘는 사람들에 무수히 많은 동물들이 물을 마시고, 70() 야자수 아래에서 햇빛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의 야자수는 그리 많은 그늘을 만들지 않습니다. 70주 야자수라고 해도 아주 제한된 그늘만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곳이 큰 야자나무 숲이었다면 모든 사람이 햇빛을 피해 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여러분의 야자수 한그루에 거의 3만 명 정도가 나눠져 쉬어야 합니다. 일렬로 나란히 설지라도 얼마나 길게 그늘에서 쉴 수 있을까요? 샘도 마찬가지로 거의 거의 10만 명씩 여러분의 샘을 나눠야 하고, 여기에 모든 양떼들과 소떼들 모두를 더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주 쩨쩨하게 주신 것처럼 보입니다.

 

12

사실상 여기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거기엔 12샘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숫자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고, 숫자 4는 하나님의 창조물 특히 사람을 나타내고, 숫자 12는 새 예루살렘에서 숫자 12를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영원한 것들을 대표합니다(20:1~21:27). 12샘에 대한 그림에서 하나님은 살아계신 샘으로서 그분께서 영원을 위한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7:3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영원을 위한 우리의 거룩하신 공급이십니다.

 

70()의 대추야자

70()의 대추야자는 무엇을 말하나요? 숫자 703+410을 곱한 숫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늘과 대추로 대표된 사람의 필요를 채우시려고 사람에게 더하셨습니다. 숫자 10은 영원이 아니고 시간의 어떤 것을 대표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영원한 공급은 12샘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시간 안에서 사람의 필요는 70()의 대추야자에 맞춰집니다. 물 없이는 우리가 소멸하겠지만 대추야자 나무는 이 생명 안에서 우리를 만족케 할뿐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우리가 사람의 필요가 없다면 우리가 정말 영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할 때까지 우리는 이와 같은 필요를 가질 것입니다. 우리는 살 곳, 입을 옷, , 동료, 음식, 건강, 적어도 재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또 교회생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삶 속에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공급이 되시기 위해 오실 때 그분은 영원 곧 3×4로 오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 자신으로 가득하게 채우십니다. 그분은 우리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러 오실 때 그분은 3+4로 오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십니다.

 

나는 오랫동안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주의 신실하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분은 내게 70()의 대추야자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3+4×10로서 오십니다. 그분의 거룩하신 공급은 풍부하고 한없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사람의 필요를 채우시는 방법은 항상 정말 적절하고도 건강한 것입니다.

 

2백만의 사람들이 70()의 대추야자 나무와 12샘의 한 가운데에 텐트를 쳤습니다. 그것은 부적절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께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완전히 책임지실 수 있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셨습니다.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것까지도 채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절대 놓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6. 신 광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16:1)

 

신 광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죄를 암시하지 않습니다. 신은 광야의 일부로 주어진 이름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음식도, 물도, 휴식도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다른 것들은 별로 없는 가시덤불이 가득한 광야였습니다. 가시가 저주로부터 나왔던 그때부터(3:18) 그곳은 저주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시내산에서 보냈던 2년을 포함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광야에서 방랑하며 40년을 보냈습니다.

 

불평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모든 집회는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을 했습니다(16:2). 하지만 그들의 투덜거림은 반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아주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먹을 음식이 없었기 때문에 나오는 불평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지도자들이 영양분 있는 영적인 음식을 공급하지 못한다면 그 성도들은 불평을 할 권리와 책임까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평의 습관을 갖지 말아야 하고, 리더쉽을 전복시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복시키려고 하는 것은 모반이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불평하는 것이나 중얼거리는 것은 우리가 배고프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16:3) 그들은 죽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와 같이 힘든 삶을 극복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죽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앉아서 고기를 먹고, 배부르게 빵을 먹었던 이집트에 관해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빵을 얻기 위해 파라오의 노예로 그처럼 어려운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아사(餓死)하도록 광야로 모든 사람들을 데려온 것 같았습니다. 이와 같은 불평은 아주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영적인 식욕을 잃어 먹지 못한다면 모두 장로들의 책임입니다. 성도들이 자랄 수 없다면 모두 장로들의 책임입니다. 성도들이 발전하지 못한다면 모두 장로들의 책임입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배고프다고 말한다면 합법적인 불평이요, 장로들은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주를 따르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들은 대가(代價)를 치러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지만 참된 공과를 배우려고 광야의 길을 걷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교회 모임에 출석하고, 하늘에 가기를 기다립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생활을 사는 것은 가치가 없고, 어떤 성장 역시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대가(代價)를 지불하도록 요구하실 때 세상의 빵을 얻느라 얼마나 어렵게 수고해야 하는지를 잊고서 그들은 이집트의 고기만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상 필요한 것에 관해 주님께 불평하는 것은 아주 합법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집트의 고깃점과 빵을 멀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도 쉽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께 흥미를 갖고 살기란 어렵습니다.

 

만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음식이 부족한 것을 불평했습니다. 음식이 부족한 것은 불평할 이유였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전복시킬 의도는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벌하시지 않으셨지만 모세에게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찌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16:4~5)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공급되는 그 빵을 모아야 했었습니다. 6일 째 날에만 여분의 것을 모아야 했습니다. 이는 안식일인 7일 째 날에는 빵을 모으는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생활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매일의 식단이 필요합니다. 형제들이 확실하게 책임져야 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하늘에 속한 영양분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13~15) 만나는 이게 뭐지?”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만나!”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만나가 무엇인지 모를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근원, 공급, 양식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메추라기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v. 13).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메추라기의 모양을 따서 고기를 그들에게 보내셨다고 그들의 고깃점을 놓쳤다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를 약속하셨지만 메추라기를 언급하신 일이 없습니다. 메추라기는 저녁에 내려와서 그들의 약함을 보양하도록 하기 위해 진 주위에 덮여 있었습니다. 그 날에는 왔고, 그 다음 날에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갈망은 그들이 하늘에 속한 빵 중의 하늘에 속한 식단을 먹도록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땅에 속한 그들의 식욕을 만족하게 할 어떤 고기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신약성경을 믿는 이들로서 우리가 구약성경 만나의 실제, 하늘에 속한 빵으로서 그분을 먹도록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6:31~33, 50~51). 그분의 의도가 이와 같은 하늘에 속한 식단을 먹도록 하는 것이지만 때론 우리는 여러 가지의 다양한 활동으로 메추라기를 먹습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은 건강하게하고 주님에 의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들은 우리 교회생활의 실제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대부분의 활동, 사회적인 활동과 같은 일들은 단순히 메추라기입니다. 이와 같은 식단은 잠시 좋은 것이지만 우리가 매일 그것들을 먹는다면 건강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생활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누린다면 아주 적적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많은 것들은 교회생활에서 지속할 수 있고, 우리가 그 일들을 인정해야 하지만 이것들은 절대 우리의 초점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메추라기는 여분의 영양분이요, 여분의 누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만나로 매일 영양을 보충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살아있는 빵처럼 그분 자신으로 양육 받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식사입니다. 이와 같은 식단으로 그분은 매일 우리를 부흥시키십니다.

 

만나는 긴 밤의 체험에 이어 아침에 산출되었습니다. 우리가 많은 압박과 죽음을 통과한 후 작은 생명이 산출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어떤 체험을 통과한 후 작은 새로움이 산출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만나를 보내시는 원칙입니다. 어떤 사람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우리는 그 메시지를 누리지만 만족함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것을 나누고, 우리가 많은 것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을지라도 우리는 매우 만족합니다. 이런 경우에 동료들과 그리스도의 고통에 교제하고, 서로에게 교회생활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결국 모두에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만나입니다.

 

이것은 진지한 말씀입니다. 만나는 신선하고, 오랜 밤이 지나고서 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주는 생명의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을 만족시키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여러분의 걸음에서 나옵니다. 主護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