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thren/연(輦)모임 메시지

요나

Hernhut 2014. 11. 12. 11:14

 

그리스도, 이스라엘

요나는 그의 체험으로 볼 때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어 볼 때 요나는 하나님의 두 맏아들들의 양면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두 양면성에 있는 가르침은 정도를 넘어 풍성하고 유익함이 있습니다.

 

요나에게서 비치는 그리스도

요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매장,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땅에 속한 사역을 하시는 동안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성령에 대항하는 신성모독이 이어졌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리스도께 표적을 요구했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보다 그 표적에만 관심을 집중함으로 그리스도는 그들의 관심에 주의를 환기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요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점부터 그분의 사역은 왕관보다 더 십자가의 지시로 전진해 나가셨을 것입니다. 요나가 밤낮으로 사흘 동안 고래 배 속(큰 물고기의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밤낮으로 사흘 동안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12:40, 1:17)

 

예표적으로 요나는 큰 물고기 배 속에서 죽었습니다(2:1~2). 2절에 있는 지옥은 히브리어 원문은 스올Sheol로 번역해 놓은 단어요, 헬라어 원문에는 하데스Hades로 번역해 놓은 단어와 같은 의미입니다. 이곳은 죽은 자들의 장소입니다.

 

실제에서 그리스도는 갈보리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요나처럼(2:31, 16:10) 스올Sheol(하데스)로 내려가셨습니다. 요나와 그리스도 둘 다 삼일 밤낮 죽음의 장소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3일 만에 일어나셨음을 말한 것입니다(1:17, 12:40, 24:7, 21, 46, 고전 15:4).

 

삼일 밤낮삼일 째 날이라는 표현은 성경이 그 문제를 나타내 보여줄 때만 서로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삼일 밤낮는 표현은 요나 1:17절에 대해 그리스도로 언급되었고, 서양식 생각이 아니라 또 다른 구약성경에서 표현하는 유사한 용어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용어들이 나옵니다. “하루의 일부라는 표현은 그날의 모든 시간과 비교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합니다(40:13, 20, 삼상 30:12~13, 대하 10:5, 12, 4:16, 5:1).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삼일 밤낮을 죽음의 장소에 계셨을 뿐만 아니라 삼일 째 되는 날에 일어나셨음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양의 관용적 표현으로 삼일 낮과 삼일 밤이라는 표현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어떤 성경 연구가들이 시도하는 것처럼 이것은 72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동양에서 유래한 서양적 해석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잘못된 해석이라고 분명하게 계시했습니다. “삼일 낮과 삼일 밤이라는 표현이 72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요나가 일어났던 때가 셋째 날과 관계가 있었나요? 그 답은 알아내기가 쉽습니다.

 

물고기 배 속에서 삼일 낮 삼일 밤동안 있었던 요나가 72시간 보다 짧은 삼일 만에 일어났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계시되었어야 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72시간 내내 요나가 있었다면 요나는 72시간 후 넷째 날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적인 기준으로부터 나흘 낮 나흘 밤으로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은 창세기 1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뗄 수 없는 구성단위입니다.

 

그것 외에 이미 말한 것처럼 요나는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도 일어날 것처럼(호 6:1~2) 셋째 날에 일어나셨습니다(고전 15:4). 이런 면에서 요나는 셋째 날에 일어났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다른 예표와 실제는 부적합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요나에게서 비치는 이스라엘

요나서에서 요나는 이스라엘로 비쳐집니다. 요나는 이방 도시 니느웨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나님에게서 명령받았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 명령을 거절했고, 또 다른 지시로 다른 길로 가려고 했습니다(1:1~3). 요나는 큰 폭풍우가 일어나는 바다에서 배가 파선될 위기에 놓였고, 결국 그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1:4~16).

 

바다는 이방민족들, 죽음의 장소로 은유적인 표현으로 성경에서 사용했습니다(14:21~31, 1:12~2:10, 13:1, 17:1, 15, 21:1, 4). 이 두 의미는 요나서와 유대 역사에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요나를 삼키도록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1:17). 요나는 그 물고기 뱃속에서 죽었습니다(2:1~2). 그런 후 삼일 밤낮요나는 마른 땅에 살아나게 되었고, 다시 명령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이방도시 니느웨로 갔습니다(1:17, 2:10, 3:1~10).

 

똑같은 것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났었고, 또 일어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땅의 이방민족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기 위해 세우셨고, 세상 끝날 때 땅에서 여호와의 증거를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43:9~12).

 

요나처럼 과거 이스라엘은 가기를 거절했고, 결국 바다에서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죽음의 장소에서 끝났고, 이방민족들 가운데 흩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늘날 세상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그들은 그 세상에서 죽은 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2,000년 동안 (바다에서 이틀 동안 머무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죽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영적인 생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넘어 이스라엘의 부르심에 대한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오늘날 온 땅에 흩어져 거주하는 이스라엘은 요나시대에 바다에 큰 폭풍우가 일었던 것을 예표하는 이방민족들 가운데서 현재의 모든 불안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한 아들이 다른 아들에게 전하는 생명

삼일 밤낮 후”, “셋째 날이지만 요나와 같이 이스라엘이 다시 살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그분 자신께서 셋째 날에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신 것에 의해 영향을 주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한 아들이 또 다른 아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것은 나사로의 부활의 말씀에서 사실적으로 보여줍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요한복음에 있는 8가지 표적들 중 일곱 번째 기록입니다. 요한복음의 8가지 표적들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다루실 것과 관계가 있고, 그것들 모두 유대인들에게 행해진 표적들입니다(20:30~31, 고전 1:22).

 

나사로의 부활 때 그는 4일 동안 무덤에 누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틀 동안 유대 땅에서 나와 계셨습니다(11:6~7, 17, 39). 그 때에 유대 땅에서 나와 계시는 이틀 후 그리스도는 우리가 유대로 다시 들어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부터 나사로의 일어나게 되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것입니다(11:3~6, 24~25, 43~44).

 

원문에 있는 이틀은 그리스도께서 부재하신 2,000년 즉 이틀을 가리킵니다. 표적에서처럼 이 이틀 끝 무렵 그리스도께서 다시 우리가 유대로 돌아가자고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목적이 같을 것입니다. 나사로로 예표된 자(이스라엘)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러 유대로 가실 것입니다.

 

호세아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고, 이스라엘이 그분의 시야에서 살도록 일으키실 날이 이틀 후 셋째 날이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 이틀이라는 기간은 유대인 제도 2,000년을 다룹니다. 이 제도 끝 무렵 마지막 7년 대환란 동안 유대인들에 의해서 시달리는 것이 절정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5:13~6:2).

 

이후 요한복음 11장에 있는 “4”(11:17, 39)4일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4일을 유대 역사 4,000년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 보면 이스라엘은 창세기 12:1~3절에 있는 축복과 관계있는 그들의 완전한 부르심을 알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에 있는 일곱 번째 표적에 있는 그 민족은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시야 안에서 절대 살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구약에서 계속된 불순종으로 이스라엘은 민족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극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방민족들 가운데로 민족의 분산을 낳았고, “이방 시대가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다가오는 그날에

아브라함에서 그리스도까지(이틀)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그분의 재림까지(이틀 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완전히 깨닫는 것은 채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바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유대사람들은 그들이 찌른 분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들은 찌른 분의 피를 도용(盜用)할 것입니다. 그들은 바다(이방민족, 죽음의 장소) 밖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하나님의 시야 속에서 살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2장에서처럼 똑같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는 성경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는 유월절 밤 죽음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든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식구들 중 맏아들을 대신해 어린 양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죽인 어린 양의 피는 집의 문설주와 문기둥에 발랐습니다. 이것은 대리 죽음을 통해 그 가족 중 맏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지만 문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지지 않음은 대체물이 없기 때문에 맏아들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한 밤중에 이집트 땅을 통과하고, 문지방에 발라진 피를 보시는 주님은 그 집을 지나가셨습니다. 주님은 그 집의 맏아들이 이미 죽었다고 아셨습니다. 어린 양은 식구 중 맏아들을 대신해 죽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만족하셨습니다.

 

하지만 한 밤중에 이집트를 통과하시는 주님께서 문설주와 기둥에 피 바름이 없는 것을 보시면 주님은 그 가족 중의 맏아들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 후 가족 중 맏아들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자신의 죽음을 체험했습니다(12:1~29).

 

다가오는 시대에 이스라엘은 죽인 어린 양의 피를 도용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맏아들로서의 이스라엘(4:22~23)대리자의 죽음을 가지고 죽은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 피를 보시고, 맏아들이 죽은 것으로 하시는 하나님은 만족하실 것입니다. 피의 적용을 통해 신생(新生), 거듭남이 일어날 것입니다. 민족은 어느 날” “순식간에태어날 것입니다(66:8).

 

그 후 믿음으로 죽은 구약성경 시대의 아브라함 후손들은 나사로처럼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피를 적용하는 모든 민족, 살아있는 유대인과 피를 이미 적용받아 부활한 유대인은 하나님의 시야에서 함께 살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성도들은 나사로처럼 육체, , 그리고 피를 가진 천연적인 몸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대환란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 그리스도의 재림 때 구원받은 자들은 계속해서 같은 몸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천연적인 몸을 가진 민족은 새 언약 아래에서 제사장들의 왕국, 거룩한 나라로서 신권 안에서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언약하신 땅에 거할 것입니다(19:6, 31:31~33).

 

요나처럼 이스라엘은 바다(이방민족, 죽음의 장소)에서 나올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신권 안, 새 언약 아래에 있는 원래의 장소에 돌아간 유대사람들은 요나가 바다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이방도시 니느웨로 간 것처럼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고서 땅 도처에 퍼져있는 이방민족들에게로 갈 것입니다(45:1~5, 26, 43:1~10; 53:1~12).

 

한 아들(이스라엘)은 다른 아들(예수)께만 찾을 수 있는 생명의 메시지를 전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서야 비로소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이 이스라엘을 통해 땅의 민족들에게 흘러넘칠 것입니다. 主護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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