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음료/복음칼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게 함

Hernhut 2014. 9. 22. 22:30

 

엘리야가 날마다 빵을 먹음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공급의 원칙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더 어떤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 보여 주신 것은 그분의 부활능력의 원칙입니다. 슬프게도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녀는 비통해 했습니다. 과부는 엘리야를 비난하며 [하나님]의 사람이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이 내 죄를 생각나게 하며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왕상 17:18)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말은 이유가 없었고, 불합리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엘리야가 한 것이 그녀의 아들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사실 처음에 엘리야가 과부와 그녀의 아들에게 왔을 때 굶주림에서 그들을 구했습니다.

 

한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또 다른 사람을 할 때 비난받은 사람은 육체적인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엘리야는 화를 내며 당신이 어리석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당신의 아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육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무고하게 비난하는 것을 볼 뿐입니다. 우리는 절대 은혜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람들을 위한다하더라도 그들의 감사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변화시키심이 아니면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과부를 꾸짖는 대신 엘리야는 그녀에게서 그녀의 아들을 데리고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서 {} [하나님]이여, 주께서 내가 머무는 집의 과부의 아들을 죽이심으로써 그녀에게 또 재앙을 내리셨나이까?”(왕상 17:20)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야가 어떻게 제련되었는지를 보십시오. 그는 과부가 자신에게 화를 냈을 때 분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세심함이 있었습니다. 아마 다듬어지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은 분을 내고 혈기를 부렸을지 모릅니다.

 

엘리야는 그가 과부의 집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주님의 증거였음을 주님께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축복하시는 주님을 기대했습니다. 그가 이 과부의 손님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분의 이름을 위해 그녀를 축복하셔야 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한 후 자신의 몸을 아이 위에 세 번 쭉 피고서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이 다시 아이에게 들어가게 하옵소서”(왕상 17:21) 주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소년의 생명을 회복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부터 소년을 일으키는 엘리야는 우선 그에게 그녀의 아들을 데려오도록 말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죽음의 상태에서 기꺼이 분리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돕기가 불가능합니다. 과부는 자신의 죽은 아들에게 매달렸고, 엘리야가 그를 도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엘리야는 그녀에게서 아들을 데려다가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야는 더 높은 어떤 것 안으로 낮은 상태에서 그를 일으켰습니다. 엘리야는 살아있었던 상태로 죽음에서 일으켜야 했습니다.

 

세 번째로 엘리야는 자신의 침대에 그 소년을 눕혔습니다. 그가 휴식을 체험했던 바로 그 곳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휴식을 주는 것을 그들에게 가져가야 합니다. 찬양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고, 힘의 원천이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도 힘과 평안을 찾도록 이런 것들을 가져가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 달콤한 임재를 갖도록 하는 것을 그들에게 가져감으로 죽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네 번째로 엘리야가 주님께 세밀한 기도를 한 후에 그는 세 번 소년 위에 엎드렸습니다. 그 소년 위에 엎드린 것은 엘리야가 아이와 동일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선한 복음전파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그들을 위축시키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이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들과 동일시합니다. 숫자 3은 주님께서 3일째 되는 날에 부활하신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부활을 상징합니다.

 

이 네 번째 단계는 부활생명의 원칙을 보여줍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송장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와 불법으로 죽어있습니다(2:1). 그들 모두 구원받고, 치유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치유시키려면 우리는 그들의 죽음의 상태에서 분리되도록 그들을 먼저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그들의 죽음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그들을 돕기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락방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 우리의 침상에 눕혀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임재 안으로 그들을 안내함으로 더 높은 곳으로 그들을 데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있는 평안 안으로 데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 번째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동안 우리는 그들과 동일해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누림을 그들에게 가져오고, 그리스도의 체험을 가져와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죽은 자들을 돌볼 수 있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땅에서 우리와 연합하도록 죽음 밖으로 그들을 이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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